2010년 2월 4일 목요일

기독교에서 윤회가 배제된 사연

기독교에서의 전생과 윤회에 대하여



예수의 가르침 이후 초기 기독교에서 윤회와 환생은 정식으로 인정되던 교회신학의 일부였다.

서기 2세기경 로마에 최초의 기독교학교를 설립했던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는 환생을 가르쳤고,

그리스의 신학자 오리게네스(Origenes)와 성 히에로니무스(St. Hieronimus),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도 환생설을 가르쳤다.

당시의 크고 강력했던 기독교 종파인 그노시스파(영지주의)와 마니교도들도 윤회설을 가르쳤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 역사의 약 400년간 환생설은 보편적인 가르침의 일부였다.

그러나 종교와 권력이 결탁하면서, 개인적인 노력과 발전으로 영혼의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와 황제의 권위가 무너진다는 정치적 우려에 따라

윤회를 가르치던 당시의 용어인 '선재론(先在論)'의 개념이 교회신학에서 삭제되었다.

서기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80?∼337)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신약성경에 실려 있던 윤회에 대한 언급들을 없애기로 결정하여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모든 복음서에서 환생을 암시하는 구절들을 완전히 삭제해 버렸고,

6세기경 동로마제국의 폭군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는 독단적으로 윤회설을 이단이라고 결정하고, 553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환생사상을 가르쳤던 오리게네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황제와 그의 아내는 윤회사상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서로마제국에서는 오리게네스의 윤회설이 널리 퍼져 인정받고 있었다.

황제는 동로마의 승정 159명을 초대하고 서로마로부터는 6명의 승정만을 초대해 공의회를 열었고,

당시의 교황은 동서 로마가 같은 수의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으면서도

공의회에 불참한 뒤 그 회의에서 결정된 윤회설의 이단 규정과 오리게네스의 파문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세기 이후 환생설을 신봉하던 교파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면서,

기독교가 지배하던 서양에서는 환생설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환생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이단으로 몰렸던 교파들의 신앙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르네상스 시대에 잠깐 지성인들의 관심을 끌었다가 곧 잊혀진 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운동으로 이어지며 기존의 기독교 교리에 도전하게 되었다.

신지학자들은 불교와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연구하여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과 조화시키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현대의 성직자들 중에도 초기 기독교의 성인들처럼 윤회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벨기에 가톨릭 교구의 메르시 추기경은 '개인적으로 윤회사상을 믿지는 않지만 윤회론이 가톨릭교회의 본질적인 가르침과 모순되지는 않는다.'고 선언했고, 영국 런던 성바울교회의 잉그 감독은 '윤회론과 근대 감리교 교리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말했으며, 감리교 목사인 레슬리 웨더헤드도 윤회론의 지지자였다.

서양의 대표적 지성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윤회론을 믿는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혔던 인물들이 의외로 많다. 고대에는 그리스의 플라톤, 피타고라스, 플루타크 등과 로마의 대문호였던 버질, 에니우스를 비롯해 근세에는 쇼펜하우어, 헤겔, 볼테르, 에머슨, 발자크, 위고, 베토벤, 나폴레옹, 톨스토이, 블레이크, 브라우닝, 휘트먼, 벤저민 프랭클린, 헨리 포드 등이 윤회론을 믿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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