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9일 금요일

통섭 최재천교수



언제부턴가, ‘통섭(統攝)’이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지요. 이 말은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지식의 대통합’을 뜻합니다. (불교에서 최고의 경지가 ‘화엄’인데, 그 방법론을 ‘통섭’이라고도 한다지요.) 말하자면, 따로국밥이 아닌, 섞어치기라고 할 수 있죠. 즉, 분석과 종합을 포괄한 서로 다른 지식 간의 경계 허물기. 사실 그렇지 않은가요? 한 분야만 파고들어선, 한 우물만 파고선, 이 복잡다단한 세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잖아요. 어떤 사물이나 사고든 따로 존재할 수 없거든요. 세계의 모든 것은 잇닿아 있어요. 그게 통섭이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알다시피, 올해 2009년은 ‘다윈의 해(The Year of Dawin)’랍니다. 태어난 지 200년(1809년)이 됐고,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50년(1859년)이 됐죠. 우리에게 진화론은 과학이론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는 측면도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진화론은 인류 문명의 방향을 바꾼 위대한 ‘발견’입니다. 인류에 공헌한 인물을 꼽는 미국의 한 설문에서 다윈은 전체 7위에 오를 정도였다죠. “다윈의 이론은 생물학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문학, 예술, 철학 등 현대의 학문과 예술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인의 의식 구조와 삶까지도 바꾸어놓았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며, 개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이런 영향을 가히 혁명적이어서 우리는 이를 ‘다윈 혁명’이라고 부릅니다.”(『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pp.64~65)

이 두 가지 화두와 관련 깊은 사람이 있습니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자연의 진화를,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우리 사회를 고민하는 지식인입니다. 지난 2006년 서울대에서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의생학연구센터’를 만들기도 했죠. 의생학은 자연이 고안해놓은 구조, 기능, 섭리 등을 인간의 삶에 응용하려는 노력을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하기 위해 최 교수께서 만들어낸 말입니다.

그런 최재천 교수께서 지난달 30일 이화여대 대학원관 중강당에서 ‘21세기 사회문화와 지식의 통섭’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가졌습니다. 강연을 하는 이 자리, 최 교수가 바로 결혼식을 한 자리라네요. 그래서 더욱 감회도 깊고, 기분도 묘하다는 그는 오늘 이 자리, 과학·사회·문화 등을 엮어서 궁극에서는 ‘통섭’의 개념으로 묶는 이야길 나누고 싶답니다. 그것이야말로 청중인 우리들도 바라던 바, 시작부터 귀가 솔깃합니다.

최재천 교수는 이런 분이에요

우선 최 교수 스스로 말씀하는 정체성을 들어보죠. “저는 산, 들, 강, 바다를 뛰어다니며 동물들이 뭐 하며 사나 관찰하는 사람이에요. 동물행동을 연구하는데, 동물들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따져보고, 어떤 진화과정을 거쳐왔기에 이런 행동을 할까, 연구하는 거죠. 물론 동물에는 인간도 포함됩니다. 생물학자는 인간을 다루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럼 인간은 생물이 아닌가 봅니다.(웃음)”

진짜 그래요. 생물학자는 역사학자나 거의 마찬가지. 범주가 다소 다를 뿐. 역사학이 몇 백, 몇 천 년의 역사를 연구한다면,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의 진화를 연구하는 생물학은 그보다 훨씬 기나긴 몇 백만 년의 세월을 연구하지 않던가요. 천문학은 더 오랜 우주의 시간을 연구하는 것이고요.



그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건넵니다. “많은 동물을 따라 다녀보고, 그 많은 동물을 연구해봤지만, 지금 제 앞에 앉아있는 동물(?)들만큼 이상한 동물이 없습니다. 혼자 떠들게 하고, 강의하고 듣는 행동, 굉장히 신기합니다. 여왕개미도 수십, 수백 마리를 앉혀 놓고 이런 강의를 하지 않습니다. 강의하고 듣는 것, 굉장히 인간적인 행동이자 굉장한 경쟁력입니다.”

맞아요. 그의 책에도 인간에 대한 이런 얘기가 있었죠. “인간은 상당히 모순적인 동물입니다. 아름다운 일을 하는가 하면, 동물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켜 대량학살을 감행하기도 하지요. 개미를 빼놓고는 그런 동물은 없습니다.”(같은 책, p.57)

사실 동물을 연구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랍니다. 제인 구달 박사가 침팬지를 연구한 것이 내년이면 60년이 되는데, 처음에 그도 애를 많이 먹었답니다. “침팬지는 야생 동물이라 먼발치에서 사람을 슬쩍 보기만 해도 다 도망갔다는 겁니다. 도대체 이래 가지고 무슨 연구를 할 수 있을까? 가까이 갈 수가 있어야 무슨 관찰이든 연구든 하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한 6개월쯤 지나서야 아기 침팬지가 다가와서 제인 구달의 손을 만졌는데, 그 어미가 저 뒤쪽에서 바라보면서 그냥 놔두더라는 겁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제인 구달은 침팬지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침팬지들이 이제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구나.’ 하는 걸 알았답니다.”(같은 책, p.32)

그만큼 영장류를 연구하기 위해 돈은 돈대로 들고, 힘은 힘대로 들다보니, 20세기 후반에는 연구가 시들해졌답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와서 인지과학과 뇌과학이 뜨면서 영장류 연구도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네요. 최 교수도 1996년부터 까치를, 2006년부터 자바긴팔원숭이를 연구하고 있는데, 후발주자의 설움도 털어 놓습니다. 자바긴팔원숭이 연구는 속된 말로, 주워 먹은 경우죠. 독일, 일본의 연구자들이 먼저 연구하다가 안 오기 시작했고, 그래서 최 교수 연구진이 하겠다고 나섰답니다.



“시작해보니, (다른 나라 연구진들이) 왜 관뒀는지 알겠더라고요. 자바긴팔원숭이를 따라가면서 연구하기에 무지하게 힘든 지형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누굽니까. 은근과 끈기, 몸으로 때우는 민족 아닙니까. 운 좋게 6개월 만에 (자바긴팔원숭이와) 친해져서 2년 이상 연구하고 있습니다. 올해 말 논문준비를 하고 빠르면 내년에 국제학술지에 자바긴팔원숭이 논문을 낼 것 같아요. 무지하게 자랑스럽습니다.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우리 사촌에 대해 쓴 논문이거든요.” (박수)

최 교수는, 자신을 ‘자꾸 뒤돌아보며 사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생물의 진화를 연구하는 것은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그런 연구가 미래와 연결됐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죠? 그는, “What is VISION?”이라는 질문을 던지고선, 이런 말을 인용합니다. “FORESIGHT with INSIGHT based on HINDSIGHT(Pastor Myles Munroe).” 그리고 2020년, 향후 10여 년 동안 겪을 경향, 정답일 수는 없겠지만, 최재천 교수가 얘기하는 ‘Socio-culture trends’를 살펴볼까요.

The Age of Ageing 고령화

최 교수가 미래 연구에 뛰어든 이유가 바로 ‘고령화’랍니다. 아시죠? 어느샌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고령화 국가가 되고 있어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산아제한을 부르짖던 국가시책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는 외로워요.’라고 바뀌었고요. 정말, 어찌 보면 눈 깜짝할 새였어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2020년이 되면 65세 이상 노인들이 15세 미만 어린이들보다 많아집니다. 인구도 줄기 시작하고요. 그래서 저는 ‘Dynamic Korea’가 아니라 ‘Dying Korea’로 표현(『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했어요. 이건 느낌이 아니라, 통계자료에 입각한 겁니다. 우리나라는 죽어가는 나라예요.”

The Age of Women 여성

최 교수는 확신에 차서 얘기합니다. “다음 시대는 여성의 시대(The Age of Women)고, 여성 시대가 온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남성들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살기 어렵습니다.” 또 말합니다. “여성 경제력이 홀로 아이를 키울 수 있고 약간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른다면 왜 미쳤다고 지아비를 섬기겠어요. 결혼 지평도 바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는 여성의 지위를 높여야 한다고 말씀하네요. “전 세계 어디를 비교해도 우리 여성들은 뛰어납니다. 여기 남자들도 인정하죠?” 그럼요. 인정하고말고요. 인정하지 않으려야 이미 그것은 눈에 드러난 ‘사실(Fact)’인걸요. ‘찌질’한 우리 수컷들은 많이 반성해야죠. “우리나라 여성들이 얼마나 탁월한가요. 김연아, 핸드볼 등등 굉장히 많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동양권에서는 여성 지위가 중하위권이라는 거지요. 이 문제를 해결해야 우리는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선진화를 꾀하신다고 주야장천 주장하시는 분들이 엉뚱한 곳에 힘 쏟지 말고 어디에 힘을 쏟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



The Age of Climate Change 기후변화

엄청나게 중요한 이슈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관에 들어가는 날까지 우리 삶을 완벽하게 사로잡을 빅이슈, ‘기후변화’. 그리고 결정적인 근거를 내놓습니다. 구글에서 찾았다는데. 그것은 바로, 여성들의 속옷 변화입니다. 18세기부터 지금까지 점점 짧아지고 있는 여성들의 속옷.

물론 우스갯소리지만, 이런 말씀을 합니다. “자연과학이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딱 증거나 정답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축적되고 쌓이면서 알 수 있게 되는 거죠. 지구가 더위지고 있고, 그것도 너무 빠른 속도로 더워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에요. 새까맣게 타야 그게 증거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앨 고어가 <불편한 진실>로 노벨상을 타고 나서야 우리 정부는 ‘이게 중요한 거구나.’ 싶어서 나서더라고요.”

그리고 정부에서 미래전략으로 내세운 ‘저(이산화)탄소 녹색성장(Low Carbon and Green Growth)’. 최 교수께서도 깜짝 놀라고 감동까지 먹었대요. 대운하 파시겠다는 양반이 갑자기 녹색성장을 얘기해서. ‘역시 기업인 출신이라 변신이 확실하구나.’라며 좋아했답니다. 그런데 역시나. “너무 빨리 녹색기술 개발을 얘기해서 불안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녹색과 정부가 말하는 녹색이 달라서 이것 참…….”

무엇보다 최 교수는 ‘복지’를 강조합니다. 특히 그동안 우리가 소홀했던 생태복지에 대해. “우리나라는 아직 ‘복지’ 하면 가난하고 아픈 사람을 지원하는, 일 벌어지고 땜질하는 복지를 생각하는데, 선진국은 그게 아니에요. 아프지 않게, 못살지 않게,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미리 만들어놔요. 그게 긴 장래를 봐도 돈이 덜 들어요. 그게 생태복지예요. 인간복지뿐 아니라 생태계 복지를 생각해야 하고, 이게 현대적 개념의 복지예요. 국가복지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복지와 생태복지를 합한 거예요. 우리나라는 180개국 가운데 국가복지가 60위인데, 인간복지는 28위, 생태복지가 162위예요. 알 만하죠? 정말 우리 삶을 녹색으로 만드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The Age of Resource Depletion 자원고갈

최 교수께서 문제를 냈습니다. “미국의 치즈 가격이 오르고 있다. 왜?” 답은 이렇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치즈 맛을 알게 되어서.” 고개를 끄덕일 만하죠? 좀 과장해서, 중국이 움직이면 그게 세계 표준이 될 수 있는 시대잖아요. 그리고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요즘엔 인도네시아까지 더해 이들 국가에 의한 세계 경제의 변화가 주도되고 있죠.

그런데 문제는, 이들 국가들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원 고갈에 대한 우려입니다. 최 교수가 우려하는 바는, 특히 FEW(Food Energy Water). 이번 세기에 FEW는 고갈될지도 모른다는 것.

여기서, 잘못된 상식 하나. 우리나라가 ‘UN이 규정한 물부족국가’라는 레떼르는 거짓~. 찢어버리라는 것이 최 교수의 확언입니다. “UN이 그런 적 없습니다. 미국의 한 사설연구소가 잘못 연구한 것을 한 신문이 또 잘못 인용해 십 몇 년 동안 잘못된 정보를 듣고 있는 겁니다. 물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행복한 나라예요. 다른 나라와 강을 공유하지도 않고, 강은 우리나라에서 시작해 우리나라에서 끝나요. 우리나라는 물이 많은 나라예요. 강수량도 적지 않고.”

물은 그렇다 치죠. 그렇다면 우리는 걱정거리가 없느냐. 최 교수는 바로 식량이 제일 걱정이라고 하네요. “쌀과 계란을 빼고, 좀 산다는 나라치고, 우리나라 빼고는 이렇게 식량의존도가 높은 나라가 없어요. 식량 수출국들이 자국에 식량이 부족하다가 우리가 먹어야겠다고 하면 우리는 큰일 납니다. 우리는 이제 농업국가 아니에요. 과거에는 농업국가라고 배웠는데, 무슨 짓 하다가 이 꼴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농산물 수출국이 잘사는 나라예요. 옛날에는 공산품이었지만. 21세기 세계 경제를 이해하려면 FEW를 이해해야 해요. 작년에 우리가 석유 때문에 흔들린 것 보세요. 세계 12위권 경제 대국이. 이번 세기에는 식량 폭동도 끊임없이 벌어질 겁니다. 21세기 경제는 이 세 자원의 경제예요.”

전 이걸, 우리에게 로컬 푸드(Local Food)가 필요한 이유로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착한(윤리적인) 소비가 필요하다는 것도. 중간도매업자나 다국적 식품회사의 노동과 자원에 대한 무분별한 착취에 저항하는 공정무역도 대안이 되지 않을까요?



The Age of Mixing 혼화

섞임. 그러니까, 샐러드. 샐러드가 정말 그렇잖아요. 제대로 섞여서 조화를 이루는. 용광로에서 하나로 되기보다 각자 성질은 유지하면서 잘 섞이는. 전 사실 인류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요. 우리나라도 다민족·다문화 국가가 되고 있다곤 하는데, 아직 샐러드는 아니죠.

최 교수도 ‘혼화(Mixing)’를 강조합니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피가 섞여본 적이 있느냐?’라고 역사학자들에게 물었더니, 답을 못 하더군요. 이건 흐름이죠. 흐름을 거부하고 ‘난 안 바뀔 거야.’ 하는 게 좋은 건지, 거대한 흐름의 선봉에 서야 하는지, 잘 판단해야 해요.” 그리고 문화와 문명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합니다. 우리가 알기론, 문화가 큰 개념이고, 문명은 하위 개념인데, 이것을 뒤집어서. 그리하여, 인간은, 세계는 과학문명이라는 큰 개념에 속한다고 보는 거죠. 여러 숙주를 공략할 수 있는 바이러스가 강한 바이러스이듯, 여러 문화에 통할 수 있는 바이러스, 즉, 누가 더 전염성이 강한 문화 바이러스를 만드느냐가 관건이 된다는 겁니다.

The Age of Creativity and Innovation 창의와 혁신

창의와 혁신은 소수의 것만은 아닙니다. 과거 창의성은 극소수에게서 나왔지만, 이젠 그렇지 않죠. “평범한 사람의 아이디어도 괜찮다고 인정받으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뛰어야 합니다. 그걸 지식사회라고 하고요. 평생 공부해야 하는 사회가 된 거죠.”

그리고 네 명의 이름을 거론하고 공통점을 묻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다 빈치,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아시겠어요? 다 돌아가신 분들이라거나 남자라는 말씀, 사절이에요. ^^

맞아요.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분들입니다. 한 분야에 매몰되지 않고. 그리고 최 교수는 슬슬 ‘통섭’의 이야기를 건넵니다. 2년 전 가야금 명인 황병기 옹과 첼리스트 장한나의 대담 기사에 나온 이야기랍니다. “우물을 깊게 파려면 넓게 파라!” 맞아요. 삽질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공간에서 몸을 놀려봐야 우물은 깊게 파지지 않잖아요. “여럿이 함께 파면 깊게 팔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가 힘을 합치고 모으면 새로운 설명 체계를 찾아보는 것, 그것이 통섭입니다. 그래서 인문학과 자연과학도 만나야 한다고 했어요. 그것이 ‘괜한 짓’이라고 판명될지 몰라도. 근본이 다른 학문이라도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죠.”

그 시도가, 알다시피 『대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도정일·최재천 지음/휴머니스트 펴냄)였답니다. 도정일 교수(인문학)와 최재천 교수(자연과학)가 나눈 이야기를 다룬 책. “처음에는 각기 화성과 금성에서 온 것 같았어요. 그러다 5년 정도 만났고, 지겹다 그만 만나자, 한번만 더 만나자, 해서 하나씩 준비해서 만났어요. 도정일 교수님은 이 세계가 얄팍하지 않고 두터워졌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고, 저는 ‘호모 실리우스’, 즉 공생의 개념을 얘기했습니다. 놀랐어요. 이거 어떻게 똑같은 개념을 얘기하나 싶어서.”

그렇죠. 지식의 통합. 오직 하나의 지식만 옳은 것이 아니라, 지식과 지식이 만나, 좀더 깊고 넓은 지식이 되는 것. 그러니까, 통섭. 이런 노력들을 한 통속이 되자는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에게 최 교수께서 건네는 말은 이것. “Good fences make good neighbors(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 너무 하나가 되면 골치 아프고, 어느 정도 담이 있어야 좋답니다. 절대 담을 없애자는 것도 아니고, 짬뽕학문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죠. 언제든 넘나들 수 있는, 좋은 담.

“알면 사랑한다”

자연. 우리는 자연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그저 우리 옆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연은 마냥 우리에게 베풀지만은 않습니다. 최근의 인플루엔자도 어쩌면 인간을 향한 역습이 아닐까 싶으니까요. 우리는 자연과 좀더 친해져야 합니다. 다시 언급하자면, 의생학. 최 교수는 이것을 간단하게 정의합니다. 자연을 흉내 내는 학문. Biomimicry(생물모방)과 Ecologic(생태논리). 그리고 우리네 일상의 자연을 닮은 제품과 물건을 보여줍니다. “자연은 베껴도 괜찮습니다. 표절해도 괜찮습니다. 21세기는 아이디어의 시대고, 저 같은 사람에게 문제를 많이 던져주세요. 문제 해결이 가능한 동식물을 찾아내겠습니다.(웃음) 자연과도 통섭 가능하고, 모든 학문이 넘나들면서 통섭 가능한 것을요.”

고개를 끄덕입니다. “인간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자연에서 배우며 살아왔습니다. 유럽의 동굴벽화와 울진의 암각화만 보더라도 고대의 인간들이 동물의 행동을 얼마나 세심하게 관찰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같은 책, p.8) 그리고 역시나 이 말도. “자연을 배워 응용하려면 기존의 지식체계를 넘나들 수 있는 융합 또는 통섭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 모든 걸 쪼개어 분석하던 환원주의의 20세기가 저물고 통섭의 21세기가 열렸습니다. 섞여야 아름답고, 섞여야 강해지고, 섞여야 살아남습니다. 학계, 기업, 사회가 함께 섞여야 합니다. 이런 거대한 변화의 선봉에 일찍이 비빔밥을 개발한 우리 민족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닐 듯싶습니다.”(p.8)

최 교수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도 해 줍니다.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것도 좋지만, 그게 어려우면 이미 있는 것을 섞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도 꼭 했으면 좋겠어요.” 역시나 통섭입니다. 한 우물만 파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게 필요하고 통했던 시대도 있지만, 지금은 다르잖아요. 그렇죠? 저는 생물학자를 처음 만나 뵈었지만, 그게 인문학과 꼭 다르지만은 않다는 것도 확인했어요. 그리고 알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자연을, 생물을, 동물을. 인간만이 아닌. 세계의 모든 것은 잇닿아 있고, 그것은 비단 인간들만의 잇닿음이 아님을.



아, 맞아요. 우린 연애하면서 그러지 않나요. 한 사람을 제대로 알면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사랑하면 더 많이 알고 싶은 것처럼. 최 교수는, 이미 그렇게 자연과, 생물과 사랑하고 계신 거겠죠? 그 속에 포함된 인간 역시. 집으로 가기 전, 역시나 이런 말씀을 책에 자필로 적어주시네요. “알면 사랑한다.”

우리, 사랑할까요. *^^*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섭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나는 최근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의 저서 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우리 학계와 사회에 통섭(統攝)의 개념을 화두로 던졌다. 나는 거의 반세기 전 스노(Sir C. P. Snow)가 지적한 바 있는 두 문화 즉 인문학과 자연과학간의 장벽을 허물고 지식의 기초체계를 통합하는 것이 21세기 인간 지성의 최대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우선 우리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진리의 궤적을 따라 과감히 그리고 자유롭게 학문의 국경을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진리의 행보는 우리가 애써 세운 학문의 구획을 전혀 존중해주지 않건만, 우리는 스스로 쳐놓은 학문의 울타리 안에 갇혀 진리의 옆모습 또는 뒷모습만 보고 학문을 한답시고 살고 있다.

통섭(統攝)은 ‘큰 줄기’ 또는 ‘실마리’의 뜻의 통(統)과 ‘잡다’ 또는 ‘쥐다’라는 뜻의 섭(攝)을 합쳐 만든 말로서 “큰 줄기를 잡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잠시나마 나는 내가 이 말을 최초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원효대사께서 그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설명할 때 자주 쓰신 용어다. 따라서 통섭의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전에도 학문의 경계를 허물려는 노력은 늘 있어왔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아 우리가 또다시 통섭을 얘기할 때에는 그 범주와 방법론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기회에 통섭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몇몇 용어들에 대한 작업 정의를 내리고 최소한 실질적인 차원의 합의라도 도출하고자 한다.

유사한 개념의 용어들로 세 가지가 자주 등장한다. 통합(統合), 융합(融合), 통섭(統攝)이 그들이다. 통합은 "모두 합쳐서 하나로 모음 또는 둘 이상의 것을 하나로 모아서 다스림"이라는 뜻으로 통일(統一, unification) 또는 응집(凝集, cohesion)의 의미를 지닌다. 대학에서 서로 다른 학과들이 하나의 학과로 묶이는 과정이나 우리나라 정당들이 이합집산 하는 과정을 통합이라고 보는 데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융합은 "녹아서 또는 녹여서 하나로 합침"이라는 뜻으로 흔히 핵, 세포, 조직 등이 합쳐지는 과정을 묘사할 때 흔히 쓰인다. 영어로는 syncretism, convergence, fusion 등의 의미에 가깝다. 통섭은 "서로 다른 요소 또는 이론들이 한데 모여 새로운 단위로 거듭남"의 과정으로 정의하면 좋을 것 같다. 통섭은 단순한 병렬적 수준의 통합이나 융합을 넘어 새로운 이론체계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2006년 연말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우리 옛말을 들려주셨다. "우물을 깊이 파려면 넓게 파라." 지금은 김치냉장고가 있어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김장을 하고 나면 김칫독을 땅에 묻어야 했다. 그 때 김칫독을 묻기 위해 땅을 팔 때 정확하게 김칫독의 지름만큼만 파기 시작했는가? 아무도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김칫독의 지름보다는 사뭇 넉넉하게 파기 시작한다. 학문도 깊이 파려면 우선 넓게 파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류가 축적해놓은 지식은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넓게 파기 시작해야 하는데 혼자서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너무나 명확하다. 여럿이 함께 넓게 파기 시작하면 훨씬 더 깊게 팔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통섭을 해야 하는 무식하리만치 단순한 이유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우리 학계에 통섭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내 솔직한 답변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문과-이과를 구분하여 고등학교 교육을 시키는 나라에서는 사실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머지않아 우리나라에도 문과-이과 장벽이 무너질 것이고 분과학문적인 교육이 아니라 통섭적인 교육이 자리잡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미 상당수의 대학들이 사뭇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화여대는 이화학술원을 출범시켰고, 서울대학교도 다양한 융합전공과정을 도입하고 대학원을 ‘통섭대학원’으로 만들 궁리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경희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부산대학교 등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통섭적인 교육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교육을 의미한다. 자연과학자로서 할 얘기인지 모르지만 나는 학문이란 인문학으로 시작하여 인문학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문도 어차피 언어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는 왜 지금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인문학과 기초과학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를 하나 제기하고 싶다.

우리는 바야흐로 고령화시대에 살고 있다.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된 ‘사오정’ ‘오륙도’ 현상은 기껏해야 그저 20여 년 써먹기 위해 우리 모두 그 길고 끔찍한 입시지옥을 거친다는 걸 의미한다. 본격적인 고령사회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직업을 적어도 서너 번은 바꾸게 될 것이다. 만일 평생 갖게 될 직업을 모두 예측할 수만 있다면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 모든 직업에 필요한 전공 공부들을 다 해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현명한 방법도 아니다. 수십 년 후에 써먹을 전공을 지금 준비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대학 시절 기초학문 즉 인문학과 과학의 기반을 확실하게 닦아놓으면 언제 어떤 직업으로 옮겨 타더라도 변신이 가능하다. 그런 능력을 이른바 수능 즉 수학능력이라고 부른다. 진정한 수학능력은 기초학문에서 길러진다.

세계적인 명문 대학들이 수백 년 동안 한결같이 기초학문의 교육을 강조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적인 명문 대학들은 이제 전공에 상관없이 모든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인문학 과정과 자연과학을 필수로 요구하고 있다. 인문학적 소양은 모든 학문과 인생사에 필요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주목할 점은 이 모든 대학들이 자연과학을 권장과목 정도가 아니라 필수과목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에 관한 지식과 이해 없이 21세기를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분명하게 인식하고 대비하는 것이다. 우리 인문학계는 또다시 ‘인문학의 위기’를 부르짖고 있다. 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이제 그야말로 떡처럼 들러붙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로든 하나의 지식체계로 통섭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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