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2일 금요일

[람타] 6장. 삶뒤의 또 삶

[람타] 6장. 삶뒤의 또 삶

6. 삶 뒤에 또 삶



죽음이라는 것은 크나큰 환영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오직
육신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몸 안에 거하는 개성적 자아는 영원히 지속한다.



당신은 한 송이 꽃보다도 못한가? 꽃의 생명은 무엇인가? 꽃은 꽃봉오리가 따뜻한 햇볕을 받아 활짝 피어난 것이다. 경이로운 꽃 향기는 주위에 가득 퍼져, 모든 것이 새로운 생명의 약속을 기뻐하게 만든다. 새들은 더욱 높이 하늘을 날고, 벌들은 부지런히 꿀을 따며, 인간들은 즐겁게 사랑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경이로운 꽃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씨를 맺는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가 열린다. 아! 이를 '지혜'라고 한다. 이는 삶의 결실이다. 그리고 과실을 수확하며, 가을의 풍취가 만연한 온 땅에서 추수를 한다. 그러고 나면 나무는 그 화창하던 일을 잃어버리고 북풍에 떨며 앙상한 모습으로 거기에 서 있다.

거대하고 하얀 침묵이 내려오면 나무 가지는 두텁고 눈부신 빛으로 덮이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추위에 떠는 황량한 대지가 펼쳐진다. 이제 그 꽃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혜 속에 남아 있다. 지난 봄에 자라던 그 모습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다시 나오게 된다. 계절이 바뀌고 겨울이 가고 나면, 봉오리는 다시 나온다. 보라! 새로운 꽃이 다시 핀다.

생명의 지속성을 한 송이 꽃에서도 볼 수 있는데, 왜 당신은 자신을 꽃의 생명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자신이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 과실을 맺고, 가을에 잎을 떨어뜨리고, 그리고 겨울에 죽어 버릴 뿐이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꽃보다 더 아름답지 않은가? 당신의 생명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사실이 그러하다. 꽃이 봄마다 다시 피는 것처럼, 당신도 생 다음 생 또 다음 생으로 이어져 계속 살 것이다.

당신이 겪어 왔던 그 긴 세월 동안 쌓여온 사연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스터 : 내 모친은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녀가 지금도 살아 있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살아 있다면, 그녀가 행복한지도 알고 싶다.

람타 : 죽음을 믿는가? 마스터.

마스터 : 때로는 죽음을 믿는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계속해서 살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나는 아이가 셋이다. 내가 그 애들에게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갓 태어날 때부터 각자가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라면서도 그 성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고양이나 개도 어릴 때부터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나는 이 한 생에서만 그 성격이 모두 형성된다고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전에도 살았고, 앞으로도 계속 살 것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한다.

람타 : 훌륭한 관찰이다. 중요한 진실을 말하겠는데,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말기 바란다. 생명에 결코 종말은 없다. 몸을 버리는 것은 사실이다. 목을 따고 내장을 꺼내고 어떤 짓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몸체 안에 있던 개성적 자아는 결코 파멸시킬 수 없다. 어떻게 생각을 파괴하고 없애버리며, 칼로 베고 멸할 수 있는지 잠시라도 생각해 보라. 그럴 수는 없다.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력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생각과 감성의 보이지 않는 집합으로서 개성적 자아라고 하며 신체 모습의 내면에 살아 있다.

덕성, 활기, 성격을 만드는 것은 생각의 보이지 않는 본성이고, 그것은 에너지다. 이것이 입을 움직이게 하고 눈을 움직이게 하고 팔다리를 움직이게 한다 - 말하자면, 이 신기한 에너지가 가느다란 끈을 당겨 움직임이 가능해진다. 아무 것도 에너지를 파괴하지 못한다. 아무 것도 다른 것에서 생명력을 빼앗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커다란 환영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오직 육신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몸 안에 거하면서 육신을 움직이는 그 본성은 다시 돌아오고, 원하면 새로운 신체를 구성한다. 몸 안에 살아있는 생명력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해 두라.

이제 이 세상을 떠나는 실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 주겠다. 육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으면, 에너지 - 영혼 - 는 그 실체의 영성에 의해 빠져나온다. 모든 것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와 창조성을 가질 수 없다.

영성이 영혼을 불러일으켜 영혼이 자리하던 공간에서 풀어 주면,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평화롭게 된다. 당신의 종교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하나님의 요람에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더 이상 없도다." 이것이 진실이다. 이 세상을 떠나면 육신의 본능과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것은 더 이상 두려움, 아픔, 고통, 육신의 배고픔, 걱정을 일으키는 '시간'이라는 환영을 경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과 관련되었던 모든 것은 더 이상 지니지 않은 채, 유토피아라고 하는 곳에 머물게 된다. 그곳이 '하나님의 요람'인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휴지기에 드는 것과 같다. 영성이 영혼을 불러일으키면, 영혼은 몸 안에 있는 마지막 센터를 통하여 위로 이동한다. 이 센터를 차크라(역주 : 회전하는 바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로서 인체의 주요 신경총 근처에 위치한 에너지 저장소다. 회음부, 배꼽, 태양총, 가슴, 후두부, 이마, 정수리의 일곱 차크라가 있으며, 쿤달리니(영적 에너지)가 터질 때 차크라는 생기를 띠고 활성화된다. 정수리 차크라(뇌하수체)가 완전히 열리면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한다) 또는 막이라고 한다. 기억의 집합인 영혼은 뇌의 한가운데 있는 뇌하수체라는 마지막 일곱째 막을 통하여 몸의 세포체를 빠져나간다. 이 과정은 종종 바람소리가 들리면서 터널을 통과하는 듯한 경험으로 느껴진다. (역주 : 죽음을 경험했다가 다시 살아났던 사람들의 경우에 대한 보고서에 의하면, 조사대상의 60% 가량은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을, 30% 가량은 다리를 건너는 느낌을 가졌으며, 나중에 빛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이 터널을 지나고 나서 보이는 빛이 당신 존재의 빛, 당신 존재의 영성이다. 일단 당신의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가면, 육신은 죽고, 당신은 다시 자유로운 영혼체가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한 순간이고, 고통도 없다.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은 빛을 내고 눈부시게 밝아진다.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당신은 물질의 밀도를 벗어나 빛의 존재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당신은 강력한 마음이자 감성이며, 당신의 몸은 빛의 몸(光體)으로서, 빛의 형상을 하고 있는 당신이 받아들이는 생각에 따라 자신의 전기적 형상을 바꾼다. 그 지점에서부터, 당신은 일곱 세상 중의 하나로 가게 된다. 당신이 어느 세상으로 가는지는 이 세상에서 당신이 감성적으로 표현했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삶이며 그것의 다른 수준들을 말한다. 예수아 벤 조셉은 일곱 하늘나라를 말했다. 사실상 일곱 세상이 있다. 그곳은 실제의 장소이고 실존하는 세상이며, 이 세상은 그 중 하나이다. 그 세상들 중의 어느 곳에도 인간을 고문하고 벌하는 지옥 같은 곳은 없다. 인간이 그런 짓을 잘 하는 것이다. 당신이 육체를 떠나면, 당신이 이 세상에서 표현한 의식-이해, 또는 축적된 감성적 태도에 따라, 당신은 항상 그에 걸맞은 세상, 또는 진동 수준으로 가게 된다.

일곱 가지의 깨침, 또는 일곱 단계의 의식-이해 수준이 있다. 일곱 단계의 이해란 번식과 생존, 두려움과 고통, 힘, 느끼는 사랑, 드러내는 사랑, 모든 생명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내가 곧 하나님 이렇게 일곱 단계로 이루어진다.

한 가지 이해를 얻기 위해 당신이 숙고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생각은 그에 고유한 진동률을 가지고, 이것은 느낌으로 경험된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고통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중이라면, 당신은 고통과 관련된 더 한정된 생각을 숙고하고 있는 것이고, 이에 따라서 고통이라는 감성으로 경험되는 낮은 진동률이 발생한다. 만약 당신이 사랑을 이해하고 또 표현하는 것을 숙고하고 터득하고 있으면, 사랑의 나눔과 표현에 해당되는 더 높은 진동률이 고양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당신의 의식이 초점을 두고 있는 그 이해는 당신이 가게 될 세상이 된다. 왜냐하면 당신 존재의 영성은 당신을 알맞은 진동률의 세상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의 모친은 이 세상을 떠나, 큰 평화와 안식의 상태에 있다. 이는 그녀가 간절히 원했고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녀가 얻은 의식-이해 정도에 맞는 수준의 세상으로 이끌려 그곳으로 갔다. 그녀는 현재 자기에게 맞는 수준의 상태에 있다 - 당신이 지금 이 상태에 있는 것처럼. 그녀가 있는 곳은 네 번째 수준으로서, 느끼면서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랑의 감성적인 태도에 맞추어져 있다. 당신의 모친은 느낌이 큰 실체이지만, 그러나 종종 그녀는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기의 느낌 대부분을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과 그녀의 남편은 종종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신의 모친은 고귀한 수준에 있으며, 그녀가 원하는 동안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진보를 생각하게 되면, 그때 빛의 존재로서 생각의 다른 차원으로 확장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또는, 그녀가 선택한다면, 그녀는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녀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유전형질을 빌어, 물질의 세상인 이 이승에서 그녀는 일곱 번째 수준의 이해를 향한 진보를 계속할 수 있다.

이승, 이 현세는 '본보기 세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서 실체는 자신의 창조력을 물질에서 목격할 수 있고, 감성을 어떤 식으로든 실제로 표현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일곱 중에 어둠이 있는 유일한 곳이자, 빛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유일한 곳이다. 실체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사회의식이라는 프로그래밍을 통하여, 무지로 돌아서 버리는 곳이다. 이러한 일이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 그래서 이곳에서 진보하는 것이 때로는 매우 힘든 것이다.

당신의 모친이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한다면, 당신의 아이의 자식으로 태어나든가 당신 아이의 자식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그녀가 당신이 살아 있을 때 돌아온다면, 당신의 딸이 아이를 가지고자 할 때에 그 딸의 아이로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 허용한다면 모친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쳐다보고 있을 때, 뚜렷한 얼굴과 겉모습을 초월하는 어떤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그녀를 알아볼 것이다 - 당신의 느낌으로.

이곳을 떠난 당신의 모친도 당신을 알 수 있을까? 아주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육신을 업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잘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식하고 있는 모든 수준에 맞추어 자신을 조율할 수 있다. 더 이상 물질 밀도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 가벼운 밀도, 더 높은 진동 수준에 있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사는 세상과 나란히 존재하는, 사고체(思考體)나 광체(光體)로 나타나는 다른 수준의 진동률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당신의 모친은 당신을 잘 알 수 있다 - 이처럼 당신도 이곳을 떠난 뒤에, 원하기만 한다면, 여기에 있는 이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모친은 행복한가? 당신이 이곳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그 불행은 당신이 이곳을 떠났을 때 증폭이 된다. 왜냐하면 몸이 없으면, 당신은 순수한 느낌과 감성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신의 감성은 증폭되고 강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증폭되는 덕분에 당신이 계속해서 기쁨을 더 잘 이해해 나가는 데 필요한 수준이 어디인지를 빨리 알 수 있게 된다.

한 세상에 대한 얘기를 해 주겠다. 만약에 당신이 그곳을 보게 된다면 당신의 존재에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곳은 의식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의 수준에서 표현되는 곳으로 많은 실체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평원 같은 곳으로 평평하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그들의 광체로는 산이나 들, 초원과 꽃, 하늘을 볼 수 없다. 빛의 실체로서 수십억의 실체가 끊임없이 줄을 지어서 누워있다. 그곳에 누워 자신은 죽어 있다는 환상을 가진 채로 잠을 자고 있다. 생명은 무덤 너머까지 존속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생각은 생생하고 관심도 있으며 강박관념에 싸여 있기도 하고 변덕을 부리기도 하나, 그의 에너지 측면에서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살아 있는데도 그러하다. 기억하라. 어떤 것이라도 굳게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진실이라고 확신시킬 수 있다. 우리가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은 그대로 현실로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창조성과 의지는 강력하다.

그곳에 있는 많은 실체들은 그들이 죽으면 구세주가 그들에게 돌아올 때까지 죽은 채로 있게 된다고 배웠다.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신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느낌 때문에 그 가르침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죽기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 부활을 기다리는 곳으로 가게 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여러 실체가 줄에 줄을 맞추어 그들보다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누군가에 의해 부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깨우려고 했으나 - 매우 적은 수만이 깨어 일어났다 - 그 이전에 그들 대부분은 어떤 악마가 나타나서 그들을 깨우려 할 것이라고 배웠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누가 그들을 깨우려고 시도해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치고 그 잠에서 깨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걸릴 것이다. 가장 불행한 가르침이다.

지금 이야기한 이곳이 유일하게 고통스러운 곳이다 - 그와 같은 이해를 절대적인 앎이라고 믿고 있는 실체들이 있는 곳이다. 혹 당신이 가서 본다면 당신의 형제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곳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세상은 장엄하다.

마스터 : 람타, 죽은 이를 만나거나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가능한가?

람타 : 당신의 모친을 보고 싶은가?

마스터 : 그렇다. 매우 보고 싶다.

람타 : 그렇게 될지어다. 그러기를 모친이 동의한다면,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이 모친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않은 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당신은 나중에 그것이 상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다. 당신의 모친을 빛으로 보게 되는 것은 그녀가 당신보다 고귀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빛은 그녀의 원질이 진동하는 매우 빠른 속도에 의해서 나온다. 그 속도에 의해서 빛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그 실체의 빛을 본다면, 그것은 단지 그녀가 높은 진동률로 낮은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세상에 있으면서 여기 이 청중 사이에 모여 있는 이들도 많다. 그들이 사랑하는 실체가 이 청중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희미하게 빛나는 빛이며 당신이 그들을 보려고 한다면 시선의 초점을 벗어난 바깥 부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직접 보려고 하면, 원추세포로 이루어진 당신들의 눈으로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역주 : 오라를 보기 위해서는 간상세포를 이용한다. 어떤 물체의 오라를 보기 위해서는 그 물체의 주위에 있는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초점의 바깥 부분을 통해 그 물체를 보는 방식으로 오라 읽기 훈련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 있다. 알겠는가?

마스터 : 알았다. 고맙다.

람타 : 좋다. 알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아무 것도 믿지 말라는 것이다. 결코! 믿는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이해해야 하는 것을 당신 자신에게 억지로 주입시켜 버리는 일이다. 믿음은 매우 위험하다. 믿어 버림으로써, 당신의 존재에 진리로 정립되지 않은 것을 쫓아 살고, 행동하고, 믿어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 이렇게 되면 당신은 매우 연약하게 된다. 이처럼 연약한 상태에서, 당신은 조종당하고, 저주받고, 비난을 받으며, 그리고 생명마저도 잃을 수 있다 - 모두 믿음 때문에.

무엇이든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을 알라. 그저 이해하기를 원하고 당신 존재 안에서 우러나는 느낌에 귀기울임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당신의 느낌이 지혜롭다는 것을 항상 신뢰하다. 느낌을 거스르지 말고, 내면에서 좋게 느끼지 않으면 억지로 믿으려 하지 말라.

또 살인자와 살육자를 동정하는 것을 배워라. 그들은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 겪어야 할 엄청난 감성적 부담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 이러한 일에 수천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죽임을 당한 자는 곧바로 육신을 갖게 된다. 살인자는 결코 잊지 못한다.



마스터 : 이 지상의 삶을 떠나면 자신의 삶을 평가하거나 그 다음 생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 어디로 가는가?

람타 : 이해의 과정 중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종합적인 태도에 걸맞은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된다.

예를 들자면 당신은 '제한 속의 생존' 단계에서부터 고통의 단계, 힘의 단계, 그리고 말없는 사랑의 단계까지 충분히 이해하였다. 그리고 사랑을 실현하고, 사랑을 말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다섯 번째 의식의 단계를 경험하고 있다. 이 생을 지나게 되면 낙원이라고 하는 다섯 번째 세상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은 당신이 현재 인식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이해 수준이다.

달리 말하면, 마스터, 당신이 지금까지 알고 이해하게 된 것들은 매우 광범위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가치와, 당신의 소중함, 당신이 터득한 진리의 독자성, 당신의 사고과정이 갖는 힘을 배우고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주위에 있는 생명 가운데서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하였다. 다른 이를 동정하고 모든 생명의 고귀함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 모든 진실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하고 깊이 숙고함으로써,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존재의 이상으로서 또한 자아왕국에 실현될 진실로서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이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더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 남아 있고, 존재의 한없는 상태는 아직 보지도, 경험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또한 지금 현재 표현하고 있는 것들을 먼저 알고 이해할 때까지는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거나 이상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지혜가 쌓이고 쌓여야만 더욱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먼저 당신 자신의 지고한 아름다움을 알고 난 뒤 당신 자신에 대해 사랑과 동정심을 표현해 보지 않고서는, 당신은 모든 생명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거나 알 수 없고 또 다른 이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을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없다. 자아에 대한 사랑이 실제로 이해가 되면, 그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 이외의 생명까지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의 이해가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일단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당신 밖에 있다고 느껴지는 생명마저도 바로 당신 자신임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알겠는가?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당신은 당신의 사고방식과 감성을 표현하는 태도에 걸맞은 의식-이해의 세상으로 가게 된다. 당신은 더 무한한 이해가 가능한 세상으로 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직 당신 자신의 현실이 되지 않았으므로, 그와 같은 이해의 경지가 실재한다는 것을 당신이 아직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스터 : 그러면 이곳을 떠날 때 이 세상으로 돌아오건 다른 세상으로 가건 우리의 삶은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일 것이다.

람타 : 정확하게 이해하였다. 그것이 당신의 사고방식에서 더 무한해지는 법을 내가 당신에게 가르치고 있는 이유이다. 당신의 생각이 더 무한해질수록, 당신 삶도 그렇게 된다 -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당신이 이곳, 생각과 감성이라는 당신의 왕국에 창조하는 세계가 더 클수록, 이곳을 떠날 때나 당신이 선택하여 다시 돌아왔을 때, 당신은 더 큰 세상을 경험할 것이다. 죄책감, 그리고 자신이나 남에 대한 비판, 형제에 대한 비꼼과 증오 따위에 젖어 있는 이들은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그 경험을 계속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배움을 얻을 때까지 계속된다 - 그러한 것들로 그들 자신을 가득 채우고 마침내 그들이 가야 할 더 바람직한 길이나 경험해야 할 더 큰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깨닫게 될 때까지.

마스터 : 일곱 세상이 있다고 했다. 다른 세상들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특히 일곱 번째 세상에 대해서.

람타 : 당신이 있는 이곳은 첫 번째 세상이다. 3차원 지각이 가능한 곳이다. 이곳에서 실체는 하나님을 물질이라는 형태로 이해한다. 이곳에서 얻는 것은 훌륭한 것이다. 탄생의 과정을 겪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육신의 한계와 본능을 견디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모든 수준의 의식과 이해가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표현되는 하나님' 또는 본보기 세상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감성적 이해를 넓히기 위하여 물질적 형태로 의식을 나타내고 목격할 수 있는 곳이다. 수많은 세상이 있지만 당신이 있는 이 지구라는 곳은 본보기 세상으로서 실체가 육체를 빌려 경험하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두 번째 세상은 고통과 후회, 죄책감을 이해하는 경험을 쌓는 곳이다. 세 번째 세상은 힘을 실현하는 세계이다. 이곳에서는 다른 이들을 통제하고 다스리고자 한다.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성이나 육체적인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마음속의 생각'으로 그렇게 하며 남들을 자기의 관점으로 보게 만들려고 한다. 네 번째는 사랑의 세상이다. 이 세상에 사는 이들은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깊이를 표현하지 못한다. 빛의 존재로서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만, 그러나 그것을 표현할 능력이 없다.

다섯 번째는 낙원이라는 곳이다. 이곳은 '황금빛'이라고 하는 것으로 둘러싸인 첫 번째 세상이다. 생각해 보라, 태양에서 나오는 빛과 같은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다섯 번째 세상에서는 그 빛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다. 모든 것들은 고유한 색을 가지고 그 싱그러움을 드러낸다. 그곳엔 또 밤이 없이 황금빛만이 있다. 그리고 음악, 아름다운 음악이 항상 들린다. 모든 것을 감싸는 빛은 그 색상에 따라 경이롭고 조화롭게 움직이면서 진동을 한다. 이 조화로운 운동이 '생명의 숨'이다. 공기를 호흡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낙원의 세상에서는 소리와 음악으로 숨을 쉬고 빛 속에 산다.

알다시피, 첫 번째 세상인 당신들이 사는 이 세상에도 육욕과 고통, 그리고 힘을 이해하고 통달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현실세계에 사랑을 가져왔다. 그들은 이곳에서 사랑의 표현을 비교적 쉽게 성취할 수 있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단계의 이해는 이 본보기 세상에서 쉽게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여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첫 번째 세상에 있으면서 사랑을 베푸는 이들,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밖으로 표현하며 자신의 삶을 사랑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은 이 세상을 떠나면 다섯 번째로 간다. 낙원이라는 세상에는 수십억 년이나 나이를 먹은 이들도 있으며, 이들은 이 낙원이 너무나 멋진 곳이어서 그 위에 다른 세상이 더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다섯 번째 세상에서 사는 이들은 사랑을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한 순간에 원하는 것은 바로 나타나게 된다. 고기 잡는 것을 좋아하는 낚시꾼이 낚시를 하고자 원하기만 하면, 그 순간 그는 바로 앞에호수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호수에는 사이프러스와 포플러 같이 그가 좋아하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그 호수의 가을 모습을 좋아하면 포플러는 이제 계피 색깔이 되고 사이프러스는 짙은 에메랄드빛으로 물든다. 낚싯줄을 던지면서 신선한 바람을 원하면 시원한 미풍이 호수를 가로지르면서 불어온다. 그 풍치 좋은 호수 한가운데로 작고 연약한 지렁이 미끼를 던지고 어떤 고기를 잡고 싶다고 원하면 그것을 잡게 된다. 그 고기는 이 지구의 고기와 같은 모습이다. 이제 그 고기를 자신이 꿈꾸던 집으로 가지고 가서 조리를 한다. 그는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한다.

이곳에 사는 실체들은 그보다 더 좋은 곳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그곳을 낙원이라고 부른다. 사랑을 깨닫고 표현하지 않는 이들은 도달하기 어려운 곳이다.

다섯 번째 세상에서 한동안 머물고 나면 모든 것을 둘러싸는 빛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자신은 무슨 자격으로 그곳에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많은 이들은 왜 자신이 그곳에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해하지 않는다. 그저 단순히 받아들인다. 그러다 결국 곰곰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빛과 음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러면 그때 눈부신 생명력의 에너지를 보게 된다. 이것은 평등함을 가지고 있는 에너지로서 빛과 꽃과 고기와 호수와 가을의 계피색 포플러, 모두가 대등하게 보인다. 이때부터 만물의 평등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고, 아무 것도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알기 시작한다. 이것을 보기 시작하면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이해하고 알게 되었던 그 모든 사랑을 가지고 온갖 사물, 온갖 실체의 하나됨을 숙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섯 번째 세상으로 진보한다.

여섯 번째 세상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나무나 바람,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자신과 별개라고 믿고 있는 이에게, 다른 모든 것과 완전한 하나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그것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여섯 번째 세상도 일곱 번째의 입구일 따름이다. 일곱 번째에서는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당신의 실체는 완전하게 그렇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하나됨 안의 하나님'만을 보고 그 하나됨의 세상에 살 때, 그는 자신이 보는 그것이 되며, 또 그것과 더불어 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치의 초상관성(超相關性)과 무상(無上)은 일곱 번째 세상의 특징이다. 그 세상으로 가는 길은 여섯 번째 수준을 이해하는 것, 즉 당신의 본래 모습을 아는 것이다. 당신의 본모습은 순수한 하나님, 순수한 논리, 순수한 생각, 순수한 생명, 순수한 빛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전체로서 본질이며 토대이다.

이제 일곱 번째이다. 눈부신 것보다 더 눈부신 것을 상상해 보라. 그 밝음의 진화하는 핵심은 색깔이 더 이상 밝음을 가질 수 없는 그러한 빛의 근원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눈부신 빛을 낸다. 밝음의 핵심에선 이러한 경이로움이 번쩍인다. 핵심이 있는 바다는 움직이고 팽창하며 위로 굽이쳐 오른다. 핵심이 굽이쳐 오르면 핵심에서 나오는 밝음은 빛의 열병식을 만들어 낸다. 빛의 다발이 외곽으로 퍼져 나가면서 그 핵심부는 계속 진화한다. 그리고 존재한다.

그 핵심에 다다르는 이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라고 하는, 그 핵심에 다다라 밝음을 더하며 장관을 만들어 내는 이는 핵심에 대한 생각을 숙고하며 독특한 형태로 그 핵심이 되어 지속해 온 존재다.

핵심을 숙고하고 그와 하나가 된 당신은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근원이 된다. 핵심이 밝게 빛날 때 그곳에서 나오는 것은 생각이다. 독특한 형태로 지속되는 당신의 생각에서부터 모든 생명의 의식이 양육되고 확장된다.

내 설명은 매우 모자란 것이다. 이 일곱 번째에 대한 비전은 공간과 시간, 측정의 한계를 넘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 감성적인 이해에까지 다다른다. 그러나 마스터,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진화하고 이해를 넓히고, 한 순간 한 순간, 한 걸음 한 걸음, 깨달음에 깨달음을 더함에 따라, 당신의 미래는 점점 더 확장이 되고 마침내 당신의 감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감쌀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가 당신이 기쁨을 느낄 때이다. 이것이 일곱 번째 세상이고 하나님인 것이다. 여기가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다다르게 될 종착점이다.



마스터 : 왜 사람들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지 알고 싶다.

람타 : 마스터, 그 이유는 이곳에 있는 사람만큼 많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여러 번 살았고 이곳이 익숙하기 때문에 이곳에 돌아온다. 그들한테 이곳은 고향과 같은 곳이고, 말하자면 '뿌리'인 셈이다. 이곳을 떠날 때, 그들은 많은 이들에 대한 감성적인 애착을 가지고 떠난다. 그러한 애착은 죄의식이나 증오 때문만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도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졌던 이곳과 다른 실체들에 대한 애착은 감성적인 끈이 되어 생 다음의 생 또 다음 생으로 이어가며 그들을 다시 이곳으로 이끌게 된다.

그리고 여러 다른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경험을 쌓고, 그런 다음 그 이해와 경험을 가지고 이 세상에 돌아오는 모험가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세상에서 경험을 완성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으며 다른 세상으로 가 버리기도 한다.

마스터 : 당신은 사람이 죽으면 그 자신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여러 가지 세상 중의 한 곳으로 가고,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람타 : 그렇다. 말한 그대로이다.

마스터 : 그 결정은 어떻게 내려지는가? 누가 그 결정을 내리는가? 각자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인가?

람타 : 마스터, 각 실체가 살아온 전생에 상관없이, 누군가 저 높은 곳에 앉아서, 그에게 특정한 세상 또는 장소로 가라고 지시하거나 감독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이 지구에 오래 전에 살았던 한 사람의 경우를 얘기해 주겠다. 그 사람이 이곳을 떠날 때, 그는 힘과 고통을 경험하고 이해하였다. 그는 또 사랑의 감미로움과 안온함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그의 이해가 다섯 번째 세상에 맞춰져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가게 된 곳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는 휴양지와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다섯 번째 세상이란 실체들이 그들의 생각 - 생각은 그들의 소리이기도 하다 - 을 통해 그들이 상상하고 원하는 것을 쉽게 발현시키는 곳, 그것도 순식간에 나타나는 그러한 곳이다. 그들은 색깔과 형상과 환상, 그리고 삶의 모든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원하는 동안만큼 그들의 모든 꿈들을 계속하여 경험한다 - 무엇인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때까지. 그리고 실제로 더 있다. 그들이 볼 수 없는 두 곳의 세상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해는 그들의 사고방식 안에 들어있지 않으며, 또 그들의 삶에서 표현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 세상을 경험하려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보아야 하고 하나님처럼 되어야 한다. 비록 그들이 미숙하게나마 사랑을 표현해 왔지만, 그들은 아직 모든 생명인 하나님과 하나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은 낙원의 세상에서 잠시 동안 지내고 난 뒤, 무엇인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도움을 청했다(도움은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 보라, 그 앞에 지극히 놀라운 실체가 나타났다. 빛 가운데 비단을 휘두른 눈부신 옷을 입고 있었다. 다가온 그이에게 물었다. "오 현자여, 제가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이 낙원에서 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내가 그토록 소원했으나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던 고기가 있고, 항상 꿈꾸어 왔으나 가져 보지 못한 그러한 집도 있습니다. 정원사가 필요하지 않은 꽃들도 있습니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곳입니까! 내 옷을 보십시오. 이전에 입어 본 적이 없는 옷을 지금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많은 친구가 여기에 있으나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여기에 나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나를 고민에 빠지게 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이 경이로운 것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경이로운 것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지혜로운 이가 그에게 말했다.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을 한껏 즐기고 있는 이에게, 그리고 무엇인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갖는 이에게, 자신에게 그렇게 베풀어 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고 있는 이에게 축복이 함께 하기를."

"사실 그것이 제가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놀라운 것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비록 하나님을 약간 두려워하기는 했으나 이제 그분께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지혜로운 이가 말했다. " 마스터, 나와 함께 가세.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한 연못가에 도달했다. 아무 데로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었다. 지혜로운 이가 말했다. "마스터, 내 옆에 와서 앉아 저 연못을 들여다보게."

그 사람은 연못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본 것은 무엇인가? 그는 이 지상에서 살았던 삶을 보게 된 것이다 - 아기로 태어나서 모친의 젖을 빨고… 예쁜 엉덩이를 내놓고 뒤뚱거리던 시기를 지나고… 무릎이 까지기도 하고 공깃돌 놀이도 하고… 젊어서는 이성에 끌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결혼하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또 자식과 출세, 일과 친구, 그리고 재물까지.

그리고 깜짝 놀랐다! 그는 그 자신을 전에 전혀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생에서 자신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힘있는 사람이었으나 그 힘으로 누구도 노예로 만들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러한 것을 말하는 데 전혀 거리끼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시절에 그는 가르치고 터득하고 사랑하며, 겸손하고 영성이 순수한 이로 평판이 자자했다.

자신의 삶이 연못에 비치는 것을 다 보고 난 후, 그가 본 것을 깊이 생각하고 나서 지혜로운 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꽤 잘 했군요."

지혜로운 이가 말했다. "잘 했네. 매우 잘 했네… 하나를 빼고 말일세. 자네는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려고 애쓰지 않았으며, 그 하나님을 자신과 모든 생명에게서 언제나 분리시켰다네."

"자네 부인을 돌아보게. 부인에 대한 자네의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것이었지. 그러한 면에서 자네는 꽤 잘 했다고 보네… 한 가지를 빼고는. 자네 부인이 자네가 준 그 모든 것에 관계 없이 자네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할 만큼 자네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네. 그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자신이 정말이지 얼마나 위대한지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기지 않았네."

"그래서, 자네의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자네에게 제안하네. 다시 돌아가게. 자네가 표현해 놓은 것들이 그곳에 있고, 자네가 얻은 것이 그곳에 있네. 지금 자네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 존재 안에 있는 사랑을 표현하고, 모든 것의 아름다움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을 스스로 터득해야 하네."

"돌아가기로 결정했다면 한 마디를 더 해 두겠네.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주의하여 선택해야 하네. 자네 앞에 주어진 역할에 따라 자네 본연의 자아가 되어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일세."

"잠시 혼자 내버려두겠네. 잘 생각해 보게. 필요한 만큼 시간을 갖게. 돌아가기로 결정하면, 나에게 알려 주게. 가장 바람직한 길을 알려줄 수 있을 거네."

그 사람은 그곳에 앉아 조금은 지칠 정도로 생각을 했다. 그는 그전에 가져 보지 못한 것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가 돌아가면 그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그는 고민스러웠다. 그를 낙원에 있게 한 그 하나님을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실체를 청해 그에게 말했다. "지혜로운 이여.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해야 볼 수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말했다. "필요한 것은 언제 자신으로 하여금 알게할까라는 결정이네. 언제든, 어디서든 괜찮다네. 지금 자네의 욕구에 따라 실행하려는 것은, 선택한 시간이나 장소에 상관없이 자네에게 필요한 경험을 제공할 것이네. 그러나 자네의 가족과 다시 함께 있고 싶다는 특별한 욕구가 있다면, 권하건데 - 이것은 단지 권하는 것일 뿐이네만 - 그들과 함께 지네게.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자네가 가장 많은 배움을 성취했기 때문이네."

이 말을 한참 동안 생각하고 나서 다시 물었다. "하오나 지혜로운 이여, 질문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았을 때 어떻게 그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지혜로운 이가 대답했다. "자네가 자신을 알면, 그를 알게 되네."

그 대답을 듣고 그 사람의 가슴은 환해졌다. 존재하고 나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그 자신과 똑같을지도 모르겠다고 자신과 하나님을 연관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물었다.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 내 가족에게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 연못을 들여다보게. 무엇이 보이는가?" 그 사람은 연못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그가 두고 온 어린 아들이 이제 장성하여 사랑스런 여인과 사귀며 구혼하고 있었다. 서로 사랑에 빠지고 사랑의 행위가 막 시작되었다.

"기회가 왔네. 자네가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네 - 자네 아들의 자식으로."

"내 아들에게? 내 아들의 아들이 되라는 말씀인지? 아버지인 내가 내 아들의 아들이 된단 말입니까? 그가 내 부친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 살았을 때에도 그는 자네의 부친이었고, 자네는 그의 아들이었네. 그래서 지금은 다시 한번 반복할 따름이네."

그 사람은 생각을 해 보더니 지혜로운 이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어떻게 내 아내의 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릴 때는 할머니를 몹시 따르게 될 것이네. 자네가 성인이 될 때쯤엔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가게 되네. 그리하여 자네 가슴속에 있는 사랑을 말할 수 있게 도와주던 무엇인가는 할 일을 다 마치게 되고, 그때부터 하나님을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과제를 떠안게 될 것일세."

그는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나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여. 모든 것이 준비되면, 나는 내 아들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그에게 말했다. "곧 씨앗이 나오게 되네. 그것을 보는 순간에, 자신을 자네 아들의 빛의 일부가 되도록 하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가 돌아다보았을 때, 놀랍게도 그 실체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에 그는 그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이미 아들의 빛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은 그가 거기에 있는지 모르지만, 부친에 대한 느낌이 요사이 마음속에 자주 떠올랐다. 그래서 "내 아버지가 지금 나를 볼 수만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부친은 그러고 있었다.

어린애가 자궁 안에 들어서는 순간이 왔다. 그 사람은 이 어린애의 신체 구조 일부분이 되려고 했다 - 그가 원하는 삶에 따라 생각으로 그렇게 한다. 그는 수정하는 순간에 몸을 점유할 수도 있고, 태어나고 나서 일년 후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

그 사람은 매우 민첩했다. 모든 것이 그에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빨리 그 어린애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밀어 넣었고,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리고 한 순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렸다. 처음 그가 알게 된 것은 목에서 나오는 기침이고, 누군가 눈을 닦아 주고 포근한 무엇으로 그를 감싸 준다는 것이었다…

그 삶에서 비록 어린 아기였어도, 이 실체는 이미 사랑하는 법을 알았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는 방법이며 또 그가 터득해야만 되는 하나님이 되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 실체의 이름은… '붓다'이다.

항상 당신이 선택한다. 항상 당신한테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 아무도 당신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 만약에 낙원에 있던 그가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그 다섯 번째 세상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세상은 그의 지혜와 빛으로 축복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댓글 없음:

블로그 보관함

팔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