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9일 금요일

이제 나는 나의 의식 전체를 가지고 보기 시작했다. 나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영원한 기쁨의 샘을 감지할 수 있었다

라빈드라드 타고르


영적 자유 즐긴 행동하는 신비주의자






기복적 힌두교 버리고 정신적인 면 추구
신·자연·인간은 하나 … 체험, 시로 표현
동양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 금자탑 쌓아


동양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타고르는 제도로서의 종교는 너무 피상적이어서 참된 내적자아를 발견할 수 없다며 이를 배격했다.
인도의 시성이라 불리는 라빈드라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는 1861년 벵골의 콜카타(옛 이름은 캘커타)에서 열세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데벤드라드 타고르(1817~1905)는 그 당시 ‘근대 인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람 모한 로이(Ram Mohan Roy, 1774~1833)가 인도사회의 개혁을 목표로 창설한 브라흐모 사마즈(Brahmo Samaj) 운동의 제2대 지도자였다.


어머니는 일찍 죽고 아버지는 여행에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어린 타고르는 주로 하인들의 손에서 자랐다.

정식 학교 교육보다 저택 주위를 배회하거나 아름다운 자연에 거니는 것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12세 때 아버지를 따라 여러 달 동안 인도를 여행하면서 여러 가지 전기도 읽고, 역사, 천문, 과학,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고전 시도 살펴보았다.

문맹과 가난 퇴치에 앞장

16세 때 첫 시집 『들꽃』을 썼고, 다음 해인 1878년 변호사 공부를 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런던에서 법 공부보다는 셰익스피어와 기타 문인들의 글에 더 크게 매료되었다.

1880년 학위를 끝내지 않고 인도로 돌아와 인도의 자연과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특히 갠지스 강은 평생을 통해 그의 정신적 젖줄과 같은 역할을 했다.
1883년 결혼을 하고 다섯 자녀를 얻었다. 1890년 타고르는 지금의 방글라데시에 있던 광대한 가족 농지를 맡아 돌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보낸 이후 몇 년 간 타고르는 가장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다.

아버지의 개혁정신을 물러 받은 타고르는 1901년 자기의 개혁적인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산티니케탄 (Santiniketan)으로 옮겨가 아쉬람을 세웠다.
여기에 기도하는 집, 도서관, 정원과 함께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학교까지 설립하여 새로운 교육을 실천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의 부인과 두 자녀가 죽었다.

1921년에는 가까운 곳에 ‘농촌 재건 기구’를 설립하고 문맹과 가난을 퇴치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불가촉 천민 차별제를 비판하는 등 한 때 정치에도 참여하였다. 또 자연과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시인으로 가장 잘 알려졌다.

1913년 스스로 벵골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103편의 연작시 『기탄잘리(Gitanjali, 신에게 바치는 송가)』로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죽기 전 몇 년 동안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는데, 그 때 지은 시들이 가장 아름다운 것들로 여겨지고 있다.

1941년 여든 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천여 편의 시를 쓰고, 3천여 점의 그림을 그리고, 2천여 곡을 작곡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황금 조각배 The Golden Boat』, 『초승달 The Crescent Moon>』, 『정원사 The Gardener』 등이 있다.

예이츠, 앙드레 지드, 로망 놀랑, 에즈라 파운드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한 그의 시는 인도 문학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일을 했을 뿐 아니라, 주로 종교적 신비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 영성의 중요성을 인지시키는 일에도 크게 기여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힌두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특별히 전통적인 기성 종교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타고르는 아버지가 이끌던 브라흐마 삼마즈의 정신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운동 단체는 힌두교의 형식적이고 기복적인 면을 배격하고 정신적이고 ‘순수한’ 면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 우파니샤드와 베단타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베단타 전통 중에서 그는 샹카라와 라마누자를 조화시킨 ‘중도 코스’를 따랐다. 타고르는 특히 제도화된 종교의 형식적인 면을 배격하고 단순하면서도 깊은 예배 방식을 실천하던 벵골의 신비주의적 시인들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도 공부했다.

그러나 타고르는 그의 깨달음이 근본적으로 책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이 영적 ‘비전’에서 얻어지는 것이라 여겼다.

타고르가 처음 비전을 본 것은 18세 때였다. 그의 회고록에 보면 “해가 잎이 무성한 나무 꼭대기 위로 막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눈에서 눈꺼풀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온 세상이 온통 아름다움과 기쁨의 물결과 함께 찬연한 빛으로 목욕한 것처럼 보였다.

그 빛줄기가 내 심장에 겹겹이 쌓여 있던 슬픔과 실의의 장벽을 꿰뚫고 들어와 우주적인 빛으로 넘쳐나게 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내 눈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나의 의식 전체를 가지고 보기 시작했다. 나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영원한 기쁨의 샘을 감지할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웃음의 물안개가 온 세상으로 날아가 흩어졌다.”

2천편 시-3천편 그림 남겨

타고르는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을 몇 번 더 했는데, 이런 경험들은 무엇보다 신과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만물동체의 느낌을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그는 이런 경험을 갖기 위해서 어떤 종교의 특수한 수행을 실천하지도 않았다. 그의 유명한 시 “폭포의 일깨움”에서 표헌한 것처럼 그런 경험은 자연적으로 그에게 이르렀다.

“그날 아침 햇살이 내 영혼의 뿌리를 건드렸다. 아, 아떻게? 아침 새의 노래가 이 어두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아 어떻게? 나는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의 삶은 잠에서 깨어났다.” 고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느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고 하면서 이런 엄청난 체험이 언설을 넘어서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체험에서 그는 참된 깨달음을 얻었음을 확신한다고 했다. 사실 타고르가 가졌던 이런 경험은 세계 여러 신비주의자들이 가지는 공통적 체험인 셈이다.

18세 때 영적 깨달음 체험

미국의 종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January, 1842~1910)는 신비적 체험이 갖는 네 가지 특성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음, 잠시적임, 피동적으로 얻게 되었다는 느낌, 깨달음이라고 했는데, 타고르의 체험은 이런 특성들을 두루 갖춘 체험이었다.

이런 체험이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타고르는 시인으로서 이를 시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보통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미술이나 음악이나 시와 같은 예술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표현 불가능하다고 그냥 버려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간을 위해 어떻게라도 표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나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시인의 종교다”고 선언하고, “나의 종교적 삶은 나의 시적 삶과 동일한 신비적인 성장 라인을 따랐다”고 하면서 그의 시가 신비체험과 직결된 것이라 했다.

타고르는 신과 하나 됨, 그러면서도 동시에 개별성을 강조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랑과 자연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는 특히 자연의 아름다움이 이런 신비적 체험을 촉발하는 수단이라 주장했다.

그는 신비체험을 갖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금욕주의적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또 제도로서의 종교는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사람들에게 참된 내적 자아를 발견하도록 할 수 없다고 보고 이를 배격했다.

타고르는 제도권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를 구가한 행동하는 신비주의자였던 셈이다.

타고르와 관련하여 한국인들에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타고르는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 여러 나라, 중동, 미국, 캐나다, 멕시코, 일본 등 많은 나라를 방문해서 강연도 하고, 앙리 베르그송,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로버트 프로스트, 토마스 만, 조지 버나드 쇼, H.G. 웰즈 등 문화계 지도자들이나 지식인을 만나 보았다.

1929년 타고르가 일본을 방문 중 동아일보 도교 지국장 이태로 기자가 찾아가 한국 방문을 요청했지만, 다음 날 캐나다로 떠나고, 인도로 돌아갈 때도 일본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요청에 응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다음 날 그를 배웅하러 나간 그 동아일보 기자에게 짧은 시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일즉이 亞細亞의 黃金時期에/ 빗나든 燈燭의 하나인 朝鮮/ 그 燈불 한번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東方의 밝은 비치 되리라

타고르가 써준 원문은 없고, 그 원문이라 생각되는 영어 시는 다음과 같다.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원래는 이처럼 4행시인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동아일보 1929년 4월 2일자에 주요한 번역
으로 실린 시에는 1912년에 영역된 타고르의 『기탄잘리』 35편의 일부와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하는 한 줄이 여기에 덧붙여진 형태로 변형돼 나타났다.

덧붙여진 부분은 다음과 같다.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일제 시대 한국인의 ‘희망’

물론 이 덧붙여진 부분이 한국을 위해 쓰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시의 배경이 어떠했든지 간에, 이 시가 일제시대 암울한 환경에 처했던 한국인들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만은 확실하다. 이런 인연 때문인가 인류의 스승 타고르는 우리에게 더욱 친숙하게 여겨진다.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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