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7일 수요일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의 이야기

한 세기 전에 불과 10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생에서 경영자로 성장하였고,
고국에 돌아와 민족기업을 일으키고는 항일투쟁을 위한 특수요원으로 변신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기업을 키워 사회에 환원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윤의 추구는 기업성장을 위한 필수 선행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그의 말에서 남다른 기업관을 엿볼 수 있다.
1920년에 대학을 졸업한 유일한 박사는 세계적인 전기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G.E)에 동양인 최초의 회계사로 취직,
동양 현지 총 책임자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월급을 받으며 일생을 편안하게 살기 보다는,
민족에 봉사하는 기업을 경영하는 것을 택했다. 그래서 1924년 승승 장구하며 성공을 거듭하던,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회사와 재산을 정리하고 귀국한다.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동포들의 문제를 단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
그 중에서도 제약회사를 키우는 일이라고 판단한 유일한 박사는 1926년 12월에 자신의 이름 ''유한''을 따고
세계로 통한다는 의미를 가진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설립하게 된다.
그는 사업을 다각화하여 의약품 생산과 함께 위생용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하여 민중의 건강과 생활 향상에 힘쓰고,
우리나라의 특산품인 화문석, 도자기, 죽제품 등을 미국에 수출하여 민족자본 형성에도 기여하였다. 이는 당초
민족의 실력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던 부친의 뜻을 실현하는 길이었고,
동시에 선생이 품고 있던 민족적 대업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광복 후 미국에서 귀국한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여 사장과 회장,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인간 존중을 사업의 기본철학으로 가지고 있던 그는 육영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시대부터 종업원들의 소양 교육을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1952년 전란 중에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교육비뿐만 아니라 숙식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며 숙련된 지식 노동자의 양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65년에는 오늘날의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개인 소유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여 학교를 계속 지원하였다.
또한 유일한은 기업경영에 있어서도 선구자적인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실현한 경영자다.
그는 유한양행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자신이 100% 소유하고 있던 주식의 52%를 사원들에게
양도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한 것이다.
1969년 유일한은 기업경영의 일선에서 은퇴하게 되는데,
그는 이때 자신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조권순(趙權順) 전무에게 사장직을 승계하여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다. 그에게 미국 변호사로 활동하던 유능한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경영권을 세습하지 않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것이다. 물론 소유도 자신이나 가족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선재단과 종업원, 그리고 국민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라는 그의 기업관을 실천함이였다.
뿐만 아니라 유일한은 정경유착을 하지 않았고 납세의 의무를 철저히 지킨 경영자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시절의 많은 사업가들이 권력에 밀착해 이권을 따내고 부를 축적했지만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같다.) 그는 역대 정권의 탄압과 유혹 속에서도 일절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
그는 세금에 대해서도 철저했다. ''기업이 세금을 많이 납부해야 정부가 국민을 위해 예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상식을 가진 그는 조금의 누락도 없이 세금을 납부했다.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혹독한 세무조사를 수없이 받아야 했지만
한치의 어김도 없이 납세의 의무를 지킨 그는,1968년 3개월에 걸친 세무조사 끝에 어떤 혐의도
발견되지 않자, 오히려 모범 납세자로 선정되어 정부로부터 국내 최초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일한은 기업인으로서만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그 어려운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서 각고의 노력 끝에 기업가로서 몸을 일으켰으며,
사업가로서는 꿈도 꾸기 힘든 항일투쟁의 선봉에 나섰고, 나아가 나눔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그에게 기업은 목적이 아니라 나눔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가치판단 기준은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서라고 강조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줴의 모범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76세로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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