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옮긴이: 류시화
출판사: 도서출판 푸른숲
만국공통의 약처방
부속품도 필요없고, 건전지도 필요없다.
다달이 돈 낼 필요도 없고
소모품 비용도 들지 않는다.
은행 금리와도 상관없으며
세금 부담도 없다.
오히려 마음의 부담을 덜어 준다.
도둑 맞은 염려도 없고
시간이 지나 퇴색할 염려도 없다.
한 가지 사이즈에 모두가 맞으며
질리지도 않는다.
가장 적은 에너지를 사용해
가장 감동적인 결과를 낳는다.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어 주고
행복감을 키워 준다.
절망을 물리쳐 주며
당신의 눈을 빛나게 하고
스스로 당신 자신을 존중하게 해 준다.
감기, 얼굴에 난 종기, 골절상에도 효과가 있으며
불치병까지도 극적으로 낫게 한다.
이 약은 특히
가슴에 난 상처에 특효약이다.
이 약은 전혀 부작용이 없으며
오히려 혈액 순환까지 바로잡아 준다.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약이다.
처방은 이것이다.
최소한 하루에 한 번씩
식후 30분이든 식적 30분이든
서로 껴안으라는 것이다.
헨리 매튜 워드
독자에게 전하는 말
삶에서 일어난 생동감 넘치는 일화들을 글로 옮겨 적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우리가
모 은 이야기들은 그 감동과 의미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적어도 다섯 번 이상씩 고쳐 쓴 것들
이다.
이 책을 읽을 때는 당신 역시 서둘러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버리려고 하지 말기 바란다.
여기 이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는 우리 두 사람의 40년에 걸친 경험을 바탕으로 선보이
는 최상의 요리이다. 따라서 당신의 존재 깊은 곳까지 스며들도록 천천히 음미하라는 것이 주
방장인 우리의 권유 사항이다. 또한 이 수프는 많은 영양가를 간직하고 있다. 야채 샐러드나 보
리빵을 곁 들이진 않았지만, 수프 그 자체만으로도 당신의 마음을 열고 인생의 기운을 되찾게
하는 힘을 지 니고 있다.
우리가 제목으로 정한 닭고기 수프는 미국에서 예로부터 전해 오는 민간요법의 하나로, 몸
살 감기에 걸렸을 때 할머니나 엄마가 끓여 주는 전통 음식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우리는
이 책 이 삶에 지쳐 기운과 용기가 필요한 당신에게 충분한 치료 음식이 되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 수프 속에 유명한 사람들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실제 일화들을 사랑과 배움,꿈의
실 현, 가르침, 부모 노릇하기 등의 재료들을 나눠 놓았다. 삶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이
야기, 눈물이 쏟아지게 만드는 감동적인 이야기, 지혜가 담긴 일화 등을 우리 두 주방장은 주
된 요리 재료로 삼았다.
이 '닭고기 수프' 시리즈를 엮으면서 거듭 하는 말이지만, 이 책은 한 번에 다 읽을 수도
있 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권하지 않는다. 시간을 갖고, 좋은 술처럼 한 번에 한 모금씩 천
천히 음미하기 바란다. 그러면 당신은 따뜻한 열기를 느낄 것이고, 마음과 영혼이 오래 전에 잃
었던 생 기를 되찾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들의 경우, 우리는 그 원작자를 찾아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그
것 을 다시 써 달라고 부탁했다. 따라서 많은 이야기들이 그들 자신의 목소리이며, 우리 두 편집
자의 목소리는 가능한 한 섞지 않았다. 따라서 각각의 이야기가 주는 감동은 전적으로 그 이야
기의 경 험자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지 편집과 각색에 의한 것이 아님을 여기에 밝힌다.
우리가 만든 이 특별한 수프는 미국뿐 아니라 이미 전세계 27개국의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
에 올라 있다. 뉴욕 타임즈 190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오른 최고의 화제작이기도 하다.흥미 넘치는
스릴러물이나 애정 소설도 아닌 '영혼을 위한 요리책'이 이만큼 화제를 끄는 것에 대해 우리
두 사람은 아직 인간의 가슴 속에 희망과 감동과 눈물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이제 당신의 식탁 위에, 또는 잠자리 옆에 우리가 만든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를 차려
놓 는다. 이 수프는 당신이 잠이 올 때 잠을 달아나게 할 것이고, 잠이 들더라도 편안하고 평화
로운 잠이 오도록 도와 줄 것이다. 우리가 이 수프를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즐겁게
한 스푼 씩 음미하길 바란다.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1. 꿈을 이루기 위한 스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방해해선
안 된다.
작자 미상
지구가 움직인 이유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안젤라는 근위축증이라는 희귀병에 걸겼다. 신경계를 포함한 일종의 신
체 무력증이었다. 차츰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불가능해졌으며, 몸을 움직이는 것도 한정된 부분
만 가 능했다.
의사들은 안젤라가 이 병에서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전혀 갖지 않았다.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
해 보내야 할 것이라고 모든 의사가 진단내렸다. 한번 이 병에 걸리면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열세 살 소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곳 병원 침대에 누워 안젤라는 자기의 말을 들
어 주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자기가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걷게 되리라고 다짐하곤 했다.
그 후 안젤라는 샌프란시스코의 바다 근처에 있는, 장애자를 위한 특수 재활 센터로 옮겨져
심 리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증세에 적용될 수 있는 모든 정신 요법이 다 동원되었다.
심리 치료가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강한 의지와 정신력에 감동받았다.
그곳에서 심리 치료가들은 안젤라에게 시각화 요법을 가르쳤다.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고 정
상 적으로 걸어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계속해서 마음 속으로 상상하는 치료법이었다. 그것이 실
제 치 료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지라도, 적어도 그녀가 병원 침대에 누워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 동 안에는 정신적으로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안젤라는 월풀(신체 장애자를 위한 물리치료법)이나 운동 등 신체와 관련된 치료법에도 열심
히 었지만, 침대에 누워서 하는 시각화 요법에도 강한 신념을 갖고 열심히 매달렸다. 그녀는 상상
속 에서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젤라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침대에 누워서 열심히 자신의 두 다리가 움
직 이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기적이 일어났다. 침대가 움직인 것이다! 침대가 병실
안 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젤라는 소리쳤다.
"이것 좀 봐요! 드디어 해냈어요! 난 해냈다구요! 내 다리가 움직였어요!" 물론, 이 순간 병원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 역시 소리를 지르며 대피소로 달려가고 있었다. 여 기저기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장비들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유리제품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이 사실을 안젤라에게 말해선 안 된다. 실제로 아무도 말해 줄 수가 없었다. 안
젤라는 자신이 드디어 해냈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난 뒤인 지금, 안젤라는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다. 물론 자신의 두 다리로
걸어서다. 목발이나 휠체어 따위는 이제 필요없게 되었다.
생각해 보라.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일대의 대지를 뒤흔들 만큼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
이 하찮은 신체의 병 따위를 정복할 수 없겠는가?
하녹 맥카티
비밀상자
대학교 4학년 때 나는 겨울 방학을 맞아 집으로 내려갔다. 2주 동안의 짧은 방학이었지만, 두
남동생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계획으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우리
는 너무 신이 나고 흥분한 나머지, 엄마와 아버지를 휴가 보내 드리고 우리가 대신 가게를 보
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두 분은 가게에 매달려 계시느라고 몇 해 동안 휴가 한 번 떠나지 못
하셨던 것 이다.
부모님이 보스톤으로 휴가 여행을 떠나시기 전날, 아버지는 가게 뒤켠에 딸린 골방으로 가만
히 나를 부르셨다. 그 방은 너무 작아서 피아노 한 대와 접는 침대만으로도 꽉 찼다. 사실 침대
를 펴 놓으면 그 발치에 앉아서 피아노를 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방은 우리 식구들 중에도
출입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낡은 피아노 뒤로 손을 넣더니 그곳에서 시가 담배를 넣는 네모난 상자 하나를 꺼내
셨다. 상자 뚜껑을 열고 아버지는 그 안에 든 것들을 내게 보여 주셨다. 상자 안에는 뜻밖에도 신
문기사 오려 둔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난 어려서부터 탐정소설들을 수없이 읽은 터라, 가위로 오린 신문기사들이 담긴 비밀 상자
를 보자 갑자기 흥분이 되었다.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것들이 뭐예요. 아버지?"
내 물음에 아버지는 진지하게 대답하셨다.
"이것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신문의 독자 투고란에 실린, 내가 보낸 기사와 편지들이다." 나는
몇 장을 꺼내 훑어보았다. 반듯하게 오린 각 기사마다 한결같이 '월터 채프먼'이라고 아버
지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왜 진작 말씀해 주시지 않았어요. 아버지?"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난 네 엄마가 이 사실을 아는 걸 원치 않는다. 네 엄마는 늘 내가 학교 교육을 별로 받지
못 했으니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지적해 왔다. 난 한때 정치 사무실을 운영하고 싶었던 적도 있
었지 만, 네 엄마가 절대로 못 하게 했다. 아마 내 무식함이 탄로나서 실패할까 두려웠던 게지.
난 그 냥 재미삼아 이 일을 해 왔다. 네 엄마 몰래 신문에 글을 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한 번도 들키지 않고 그렇게 해 왔단다. 내가 보낸 글들이 신문에 실
리면 난 그 것들을 오려 이 상자 속에 감춰 두곤 했지. 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이 상자를
보여 주리라 고 마음먹었었다. 그것이 바로 너다."
내가 몇 편의 기사를 읽는 동안 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계셨다. 마침내 내가 고개
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았을 때 아버지의 눈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덧붙이셨다.
"지난 번에 마지막으로 좀 무리한 시도를 해 봤다." 내가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또 글을 보내셨군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맞았다. 우리의 종교 잡지에다 전국 대의원들을 공정하게 선출하는 방법에 대한 장문의 글
을 기고했지. 그걸 보낸 지 벌써 석 달이 넘었다. 아마 내가 너무 무리한 주제를 잡았던게 아닌
가 생 각이 드는구나."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알아온 아버지의 전혀 새로운 면이었기 때문에 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를 지어 말했다.
"아마 잘 될 거예요. 미리부터 실망하진 마세요."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어쩜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까지 마음 죄며 기다리진 말아라." 아버지는 내게 미소와
함께 윙크를 보내고는 비밀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그것을 피아노 뒤켠 의 공간 속에 도로 숨
겨 놓으셨다.
다음 날 우리 부모님은 버스를 타고 하버 힐 역으로 가셨다.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보스톤으
로 떠나실 예정이었다. 나는 두 남동생 짐과 론을 데리고 가게를 보면서 아버지의 비밀 상자에
대해 생각했다. 아버지가 글 쓰는 걸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난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
다. 어쨌 든 난 그것을 동생들에겐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나만의 소중한 비
밀이었다.
숨겨진 상자의 비밀.
그날 이른 저녁, 내가 가게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데 엄마가 버스에서 내리시
는 것이었다. 엄마 혼자였다. 엄마는 광장을 가로질러 잰 걸음으로 가게를 향해 걸어오셨다.
우리는 일제히 엄마에게 물었다.
"아버진 어디 계세요?"
"너희 아버진 죽었다."
엄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엄마
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설명에 따르면, 보스톤의 파크 스트리트 지하철역의 군중
속을 걸어가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지셨다고 한다. 그때 지나가던 한 간호사가 몸
을 굽혀 아버지를 살펴보더니 엄마를 쳐다보면서 "죽었군요."하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버지 옆에 멍하니 서 있었고, 지하철에서 몰려나오는 사람
들 이 아버지에게 걸려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러자 어떤 목사가 다가오더니 "내가 경찰을 불
러 주 겠소."하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마침내 구급차가 와서 두 사람을 곧장 시체 보관소로 데려
갔다고 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호주머니 속에 든 물건들을 꺼냈고, 시계도 풀었다.
그 뒤 엄마는 혼자서 기차를 타고 돌아왔으며, 다시 버스를 타고 집까지 왓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이 충격적인 사건을 전하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셨다. 남에게 자신의 감정
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엄마의 오랜 훈련이자 자부심이었다.
우리들 역시 울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가게로 내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에게로
돌 아갔다.
오랫동안 우리 가게를 다닌 한 단골 손님이 물었다.
"오늘 저녁엔 노인 양반이 어딜 가셨나?"
내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돌아가셨어요."
"저런! 정말 안됐군."
그는 그렇게 말하고 가게를 나갔다.
나는 아버지를 한 번도 노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손님이 묻는 질문에 화가 났
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일흔 살이셨고, 엄마는 쉰 살이셨다. 아버지는 언제나
건강 하고 행복하셨으며, 연약하고 예민한 엄마를 아무런 불평 없이 잘 돌봐 오셨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는 떠나고 안 계셨다. 가게 선반을 정리하면서 부르시던 그 휘파람 소리
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다신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노인 양반'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례식 날 아침, 나는 스크랩 북을 가져다가 가게 테이블에 앉아 조문객들이 보낸 문상 카드
를 정리하던 도중에 우편물 뭉치 속에서 두툼한 교회 잡지 한 권을 발견했다.
평소에 나는 지루한 내용의 종교 출판물 따위는 들춰 보지도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어쩌
면 아버지가 보낸 글이 실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서둘러 잡지를 넘겼다. 그렇다. 그곳에 아버지의 기고문이 몇 장에 걸쳐 실려 있었다.
나는 잡지를 들고 작은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을 터뜨
렸 다. 난 용감하게 참아 왔지만, 전국 대의원 선출 방법에 대한 아버지의 대담한 조언이 잡지에
실 려 있는 걸 보고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난 기사를 읽고 또 울고, 또다시 읽곤 했다. 잡지 속에는 아버지의 훌륭한 제안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는, 헨리 카보트 롯지 경의 편지가 정중한 필체로 동봉되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기고문을 오려 롯지 경의 편지와 함께 피아노 뒤의 비밀 상자 안에 넣었다.
그 후 나는 비밀 상자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랫동안 하나의 비밀로만 남
았다.
플로렌스 리투아르
주홍글씨
역사속의 위대한 성공에 얽힌 이야기들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까운 친구가 해 준 한마디
의 격려의 말, 또는 믿음의 표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믿음을 간직한 아내 소피아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위대한 문호들의 대열 속에서 나다니
엘 호오돈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나다니엘 호오돈이 비참한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인생이 완전
히 실패했으며 다니던 직장인 세관에서 해고당했다고 말했다. 이때 소피아는 오히려 기쁜의 환
성 을 질러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아내 소피아는 흥분해서 말했다.
"이제 당신은 드디어 문학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호오돈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감 없는 침
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긴 해. 하지만 내가 글을 쓰는 동안 우린 뭘 먹고 살지?" 그 말에 소피아는 서랍을 열
고 상당한 액수의 돈을 꺼내 놓았다. 호오돈이 놀라서 물었다.
"도대체 이 많은 돈이 어디서 났지?"
소피아가 말했다.
"난 당신이 천재적인 작가라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언젠가는 당신이 명작
을 남기리라는 걸요. 그래서 매주일 당신이 가져다 주는 생활비에서 조금씩 떼어 놓았어요. 그
러니 이 돈이면 우리가 앞으로 1년은 생활할 수 있어요." 그리하여 소피아의 믿음과 신뢰 속에
서 미국 문학의 대명사격인 <주홍 글씨>가 탄생하게 되었 다.
니도 꾸벵
믿음의 마술
난 아직 축구나 야구를 시작할 만큼 나이를 먹진 못했다.
난 아직 아홉 살도 안 됐다.
엄마는 내가 야구를 시작한다 해도
다리 수술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다지 빨리 달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난 엄마에게 말했다.
난 그렇게 빨리 달릴 필요가 없다고.
내가 일단 야구를 시작하면
언제나 담장 밖으로 홈런을 날릴 테니까 말이다.
그런 다음에 난 천천히 뛰어가면 되는 것이다.
에드워드 J. 맥그라트 2세
<인생을 보는 특별한 시각>에서 인용
릭 리틀의 추구
새벽 다섯시. 릭 리틀은 졸음 운전을 하다가 3미터 높이의 강둑에 부딪친 뒤 길가에 서 있
는 가로수와 정면 충돌했다. 이 사고로 부러진 척추를 치료하느라 릭은 여섯 달이라는 긴 시간
을 병 원 침대에서 보내야만 했다.
이 기간 동안 릭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느 때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난 13년 동
안 받아 온 학교 교육이 채워 주지 못한 것이 그의 삶에는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2주일 뒤, 릭이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의
식 을 잃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릭은 또다시 절감했다.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인간 관
계의 문제나 감정적인 문제들에 대해 형식적인 학교 교육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 여러 달에 걸쳐서 릭 리틀은 한 가지 구상을 했다.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법 과 인간 관계의 기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등을 가르치는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그것이었다.
릭은 이 프로그램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 찾아다니다가 국립 교육원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
를 접하게 되었다. 서른 살의 성인 남녀 1천 명에게 학교 교육이 과연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 주었는가를 묻는 질문에 80퍼센트 이상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
답한 것이다.
그 1천 명에게, '그렇다면 학교가 무엇을 가르쳐 주기를 희망하는냐고 묻자 가장 으뜸 가
는 대답이 인간 관계의 기술에 대한 것이었다.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과 잘 지내는 법, 좋은 직
장을 찾아 그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법, 좋은 부모가 되는 법,
자녀늘 정상적으로 키우는 법, 경제적인 문제를 관리하는 법, 그리고 삶의 의미를 배워 나가는
법 등이 사람들이 배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릭은 이런 내용들을 가르치는 새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에 사로잡혔
다.
그래서 그는 다니던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고등학교 학생들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미국 전
역 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에 넣을 내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120개 고등학교의
학 생 2천 명에게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1. 자신이 현재 안고 있는 문제나 앞으로 부딪치게 될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
는 교육 프로그램을 고등학교 과정에서 만든다면, 나 자신은 어떤 내용의 프로그램을 만들 것인
가? 2. 학교나 가정에서 자신이 훌륭하게 처리하길 원하는 인생 문제 10가지를 적어 보라.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나 도심지의 빈민가 학교에서나, 또는 시골 학
생 이거나 도시 학생이거나 대답은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외로움, 그리고 자기 자신이 싫다는
대 답이 인생 문제의 우선적인 항목이었다. 또한 학생들은 서른 살의 성인 남녀가 대답한 것과
똑같 이 삶의 기술들을 배우기를 원하고 있었다.
릭 리틀은 이 조사를 하는 두 달 동안 차 안에서 잠을 잤으며, 전부 합쳐 60달러로 생활했다.
대부분의 식사는 크래커와 땅콩 버터로 때웠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날도 많았다. 릭은 무일푼에
다 후원자도 없었지만,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데 온 정열을 쏟았다.
릭의 다음 단계는 인생 상담과 심리 치료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미국 전역의 유명한 교
육자와 카운셀러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릭은 명단에 적힌 사람들을 한 사람씩 찾아가
서 그들의 자문과 지원을 요청했다.
전문가들은 릭의 새로운 접근 방식, 즉 무엇을 배우고 싶어 하는가를 학생들에게 직접 물어
보 는 방식에 대해선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구체적인 도움을 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들이 릭
에게 하는 말은 격려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자넨 너무 어려. 대학으로 돌아가게. 먼저 학위를 따야지. 그 다음에 대학원에 진학해서
이 연구를 계속하게나."
하지만 릭은 포기하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릭은 이미 자동차와 옷가지들을 전부 팔
아 버린 뒤였고, 친구들한테 진 빚이 3만 2천 달러나 되었다. 그때 누군가 릭에게 사회 재단을
찾아 가서 후원금을 요청해 보라고 제안했다.
맨 처음에 찾아간 사회재단은 실망만 안겨 줄 뿐이었다. 재단 사무실로 들어가 릭은 겁이 나
서 문자 그대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 재단의 부회장이란 사람은 덩치가 크고 냉정하기 짝이 없
는 얼 굴 표정을 한 남자였다.
릭이 30분이 넘도록 열의를 다해서 어머니의 자살 시도 사건과 2천 명의 학생들에 대한 설문
조사, 그리고 고등학생들을 위한 새로운 내용의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계획을 설명하는 동안
그 남자는 말 한마디 없이 듣고만 있었다.
릭의 얘기가 끝나자 부회장은 한 묶음의 서류뭉치를 릭 앞에 던지면서 말했다.
"이보게 친구, 난 이곳에서 20년이 넘도록 일해 왔네. 그 동안 우리 재단은 여기에 적힌 교육
프로그램들을 전부 후원했지. 그런데 결과는 모두 실패였어. 자네의 계획도 실패로 끝날 거야.
이 유가 뭐냐구? 그거야 분명하지. 자넨 스무 살밖에 안 됐고, 아무런 경험도 돈도 없으며, 대
학 졸 업장조차 없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구!"
재단 사무실을 나서면서 릭은 그 남자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
다.
릭은 먼저 어느 재단이 십대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몇 달에 걸쳐서 후원금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것은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
니었다.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그 일에 매달려야 했다. 각 재단의 관심 방향과 요구 사항에
맞춰 별도의 후원금 신청서들을 작성하느라 꼬박 일 년이 걸렸다.
릭은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신청서들을 각 재단으로 발생했다. 그것들은 곧바로 되돌아왔다. 모
두가 거절당한 것이다.
릭이 보내는 모든 신청서가 거부를 당했다. 155번째의 신청서마저 거부당하자 그나마 릭을
지 원하던 힘들이 무너져 내렸다. 릭의 부모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으며, 교육학자
이면 서 그 동안 직장을 떠나 릭의 신청서 작성을 도왔던 켄 그린도 말했다.
"릭, 난 이제 돈이 한푼도 안 남았네, 내겐 돌봐야 할 아내와 아이들이 있어. 아제 마지막
한 번의 신청서에 더 기대를 걸어 보겠네. 만일 그것마저 실패한다면 톨레도의 교사 생활로
돌아가 겠어."
릭에게는 마지막 한 번의 기회만이 남았다. 절망 속에서도 아직 확신을 버리지 않은 릭 리틀
은 몇 명의 비서관들을 설득해 켈로그 재단의 회장 루스 모우비 박사와 점심 약속을 얻어 내
는 데 성공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중간에 모우비 박사와 릭은 우연히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나치게 되었다.
모우비 회장이 물었다.
"하나 먹겠나?"
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릭은 떨리고 당황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아이스크림 콘을
짓 누르고 말았다. 콘이 부서지고 초코렛 아이스크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릭은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닦아 내려고 몰래 애를 썼지만 모우비 박사가 금방 눈치채고 말았
다. 모우비 박사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아이스크림 파는 사람한테로 다시 가서 냅킨 여러장을
갖 다 주었다.
젊은 친구는 홍당무가 된 얼굴로 차에 올라탔다. 스스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이스크림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친구가 어떻게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보조금을 신청할 수 있
단 말인가.
그로부터 2주일 뒤 모우비 회장이 릭에게 전화를 걸었다.
"릭, 자네는 우리에게 5만 5천 달러의 후원금을 신청했네. 미안하지만 우리 위원회의 투표 결
과 그 신청을 거부되었네."
릭은 눈물이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하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두 해 동안이나 정열을 바쳤
는 데 이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모우비 회장이 말했다.
"우리 위원회에서는 그 액수로는 자네의 프로그램을 실행하기에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
지.
그래서 자네에게 13만 달러의 후원금을 주기로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릭은 기쁨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더듬거리는라 감사하다는 말조차 제대 로 할 수 없었다.
그 이후 릭 리틀은 자신의 꿈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1억 달러의 기금을 모집했다. 그가 만
든 '삶의 기술 프로그램(The Quest Skills Program)'은 현재 32개 나라와 미국 50개 주의
3만여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해마다 3백만 명의 아이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삶의 중요
한 기술들 을 배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열아홉 살의 한 젊은이가 '그건 불가능해!'라는 주
위의 지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다.
1989년에 '삶의 기술'프로그램의 믿어지지 않는 성공에 힘입어 릭 리틀은 자신의 꿈을 더 넓
혔다. 그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큰 규모의 후원금인 6천5백만 달러를 모집해 '세계 청소
년 협회(The International Youth Foundation)'를 설립했다. 이 협회의 목적은 전세계의 성
공적인 청소년 프로그램들을 서로 연결하고 확대시켜 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릭 리틀의 인생은 소중한 영감에 바쳐진 정열의 산 증언이며, 더불어 자신의 꿈을 이룰 때까
지 끝없이 추구해 간 인행의 표본이다.
페기 만
또 하나의 표시를
어느 비 내리는 오후, 열일곱 살의 소년 존 고다드는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자기 집 식탁에
앉 아 하나의 계획을 떠올렸다. 존은 노란색 종이 한 장을 가져다가 맨 위에 '나의 인생 목표
'라 고 썼다. 제목 아래에다 존은 다음과 같은 127가지의 인생 목표를 적어 내려갔다. 그 이후
현재까 지 존 고다드는 그 중에서 108가지의 목표를 이루었다.
아래에 있는 것이 존 고다드의 인생 목표 목록이다. 이것들은 결코 쉽거나 간단한 목표들이
아 니다. 이것들 속에는 세계의 주요 고산지대 등반과 큰 강 탐사 등을 비롯해 1마일을 5분에
주파 하기, 세익스피어 전집 읽기와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전권 읽기까지 포함돼 있다. 존 고다드
는 아 직도 남아 있는 19가지의 목표에 하나씩 표시를 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탐험할 장소
1. 이집트의 나일 강
2. 남미의 아마존 강
3. 아프리카 중부의 콩고 강
4. 미국 서부의 콜로라도 강
5. 중국 양자 강
6. 서아프리카 니제르 강
7. 베네주엘라의 오니노코 강
8. 니카라과의 리오코코 강
원시 문화 답사
9. 중앙 아프리카의 콩고
10. 뉴기니 섬
11. 브라질
12.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
13. 북아프리카 수단(존 고다드는 이곳에서 모래 폭풍을 만나 산 채로 매장당할 뻔했음) 14. 호
주 원주민들의 문화
15. 아프리카 케냐
16. 필리핀
17. 탕가니카(현재의 탄자니아)
18. 이디오피아
19. 서아프리카 나이지리아
20. 알라스카
등반할 산
21. 에베레스트 산(8, 8848미터)
22. 아르헨티나의 아곤카과 산(안데스 산맥 중의 최고봉) 23. 매킨리 봉(알라스카에 있는 북미
대륙 최고봉. 6, 194m) 24. 페루의 후아스카란 봉
25. 킬리만자로 산(탄자니아에 있는 아프리카 최고봉) 26. 터키의 아라라트 산(노아의 방주가
닿은 곳이라고 알려진, 이란과 러시아 국경 부근에 있는 화산)
27. 케냐 산(동아프리카에 있는 산)
28. 뉴질랜드의 쿠크 산
29. 멕시코의 포포카테페틀 산
30. 마터호른 산(알프스의 고산)
31. 라이너 산
32. 일본의 후지 산
33. 베수비오스 산(이탈리아 나폴리 만 동쪽의 활화산) 34. 자바 섬의 브로모 산
35. 그랜드 테튼 산
36. 캘리포니아의 볼디 마운틴
배워야 할 것들
37. 의료 활동과 탐험 분야에서 많은 경력을 쌓을 것(현재까지 원시 부족들 사이에 전해져
오 는 다양한 치료 요법과 약품을 배웠음)
38. 나바호족과 호피족 인디언에 대해 배울 것
39. 비행기 조종술 배우기
40. 로즈 퍼레이드(캘리포니아에서 해마다 5월에 열리는 장미 축제 행렬)에서 말타기
사진 촬영
41. 브라질 이과수 폭포
42. 로데시아의 빅토리아 폭포(이 과정에서 존 고다드는 아프리카 흑멧돼지에게 쫓김을 당
했음)
43. 뉴질랜드의 서덜랜드 폭포
44. 미국 서부 요세미티 폭포
45. 나이아가라 폭포
46. 마르코 폴로와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길 되짚어 가기
수중 탐험
47. 미국 남부 플로리다의 산호 암초 지대
48. 호주의 그레이트 배리어 대암초 지대)이 곳에서 존은 135킬로그램의 대합조개 촬영에 성공
했음)
49. 홍해
50. 피지 군도
51. 오케페노키 늪지대와 에버글레이즈(플로리다 주 남부 습지대)탐험
여행할 장소
53. 북극과 남극
54. 중국 만리장성
55.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
56. 이스터 섬(거석문명의 섬)
57. 바티칸 시(이때 존 고다드는 교황을 만났음)
58. 갈라파고스 군도(태평양상의 적도 바로 아래의 화산섬) 59. 인도의 타지마할 묘
60. 피사의 사탑
61. 프랑스의 에펠탑
62. 블루 그로토
63. 런던 탑
64. 호주의 아이어 암벽 등반
65. 멕시코 치첸이차의 성스런 우물
66. 요르단 강을 따라 갈릴리 해에서 사해로 건너가기
수영해 볼 장소
67. 중미의 니카라과 호수
68. 빅토리아 호수(중부 아프리카에 있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 69. 슈피리어 호수(북미
오대호의 하나)
70. 탕카니카 호수(아프리카 중동부)
71. 남미의 티티카카 호수
해낼 일
72. 독수리 스카우트 단원 되기
73. 잠수함 타기
74. 항공모함에서 비행기를 조종해서 이착륙하기
75.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을 한 번씩 방문할 것(현재 30개 나라가 남았음) 76. 소형 비행선, 열
기구, 글라이더 타기
77. 코끼리, 낙타, 타조, 야생말 타기
78. 4.5킬로그램의 바닷가재와 25센티미터의 전복 채취하기 79. 스킨 다이빙으로 12미터 해저로
내려가서 2분 30초 동안 호흡을 참고 있기 80. 1분에 50자 타자하기
81. 플륫과 바이올린 연주
82. 낙하산 타고 뛰어 내리기
83. 스키와 수상 스키 배우기
84. 복음 전도 사업 참여
85. 탐험가 존 뮤어의 탐험길을 따라 여행할 것
86. 원시 부족의 의약품을 공부해 유용한 것들 가져오기 87. 코끼리, 사자, 코뿔소, 케이프 버팔
로(남아프리카 들소), 고래를 촬영할 것 88. 검도 배우기
89. 동양의 지압술 배우기
90. 대학교에서 강의하기
91. 해저 세계 탐험하기
92. 타잔 영화에 출연하기(이것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소년 시절의 꿈이 되었다) 93. 말, 침팬
지, 치타, 오셀롯(표범 비숫한 시라소니), 코요테를 키워 볼 것(아직 침팬지와 치타 가 남았음)
94. 발리 섬의 장례 의식 참관
95. 아마츄어 햄 무선국의 회원이 될 것
96. 자기 소유의 천체 망원경 세우기
97. 저서 한 권 갖기(나일 강 여행에 관한 책을 출판했음) 98. 내쇼날 지오그라픽 지에 기사 싣
기
99. 몸무게 80킬로그램 유지(현재까지 잘 유지하고 있음) 100. 윗몸일으키기 200회, 턱걸이 20회
유지
101. 프랑스어, 스페인어, 그리고 아랍어를 배울 것 102. 코모도 섬에 가서 날아다니는 도마뱀의
생태를 연구할 것(섬에 접근하다가 20마일 해상에 서 보트가 뒤집히는 바람에 실패했음)
103. 높이뛰기 1미터 50센티
104. 넓이뛰기 4미터 50센티
105. 1마일을 5분에 주파하기
106. 덴마크에 있는 소렌슨 외할아버지의 출생지 방문 107. 영국에 있는 고다드 할아버지의 출
생지 방문
108. 선원 자격으로 화물선에 승선할 것
109.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권 읽기(현재까지 각 권의 대부분을 읽었음) 110. 성경을 앞장에서
뒷장까지 통독하기
111. 셰익스피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찰스 디킨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에드가 알렌 포
우, 루소, 베이컨, 헤밍웨이, 마크 트웨인, 버로우즈, 조셉 콘라드, 탈메이지, 톨스토이, 롱펠로우,
존 키 이츠, 휘트먼, 에머슨 등의 작품 읽기(각 사람의 전작은 아니더라도) 112. 바하, 베토벤, 드
뷔시, 이베르, 멘델스존, 랄로, 림스키코르사코프, 레스피기, 리스트, 라흐마 니노프, 스트라빈스키,
토흐, 차이코프스키, 베르디의 음악 작품들과 친숙해지기 113. 비행기, 오토바이, 트랙터, 윈드서
핑, 권총, 엽총, 카누, 현미경, 축구, 농구, 활쏘기, 부메랑 등을 다루는 데 있어서 우수한 실력을
갖출 것
114. 음악 작곡
115. 피아노로 베토벤의 월광곡 연주
116. 불 위로 걷는 것 구경하기(발리 섬과 남미의 수리남에서 구경했음) 117. 독사에게서 독 빼
내기(이 과정에서 사진을 찍다가 등에 마름모 무늬가 있는 뱀에게 물렸 음)
118. 영화 스튜디오 구경
119. 폴로 경기하는 법 배우기
120. 22구경 권총으로 성냥불 켜기
121. 쿠푸(기제의 대피라밋을 세운 이집트 제4왕조의 왕)의 피라밋 오르기 122. 탐험가 클럽과
모험가 클럽의 회원으로 가입
123. 걷거나 배를 타고 그랜드 캐년 일주
124. 배를 타고 지구를 일주할 것(현재까지 네 차례의 일주를 마쳤음) 125. 달 여행("신의 뜻
이라면 언젠가는!")
126. 결혼해서 아이들을 가질 것(존 고다드는 현재까지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음) 127. 21세기
에 살아 볼 것(그때가 되면 존 고다드는 일흔 다섯 살이 될 것이다) 존 고다드
'난 할 수 없어'의 장례식
여교사 도나 선생님이 맡은 초등학교 4학년 교실은 내가 과거에 봐 온 다른 교실들과 다를 바
가 없었다. 학생들은 여섯 명씩 다섯 줄로 앉아 있었으며, 학생들 맨 앞에는 교탁이 놓여 있었
다.
그리고 교실 뒷벽엔 학생들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전형적인 초등학
교 교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처음 그 교실에 들어갔을 때 뭔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교실 전체에서
어 떤 흥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도나 선생님은 정년 퇴직이 두 해밖에 남지 않은 미시간 시골 학교의 베테랑 교사였다. 또
한 선생님은 내가 만들어 후원하는 전국 교직원 연수 프로그램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었
다. 이 프로그램의 주목적은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고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도록 교사들
에게 새로 운 교육 방법을 일깨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도나 선생님은 연수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해서 교사들이 프로그램의 개념을 잘 이해하도록 돕
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내가 맡은 일은 연수에 참가한 교사들의 교실을 직접 방문해 교육 현
장 에서 그것이 제대로 실천되도록 격려하는 일이었다.
도나 선생님의 교실로 들어간 나는 교실 뒤켠의 빈 의자에 앉아 말없이 수업을 지켜보았다.
학 생들 모두 무슨 일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노트를 한 장 찢어서 그 위에다
원가 자신의 생각을 적어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옆에 앉아 있는 열한 살짜리 여학생의 책상을 넘겨다 보니'난 할 수 없어'라는 제목의 글로
종이를 메워 가고 있었다.
"난 축구공을 멀리까지 찰 수 없어."
"난 세 자리 숫자 이상은 나눗셈을 할 수 없어."
"난 데비가 날 좋아하도록 만들 수가 없어."
그 여학생은 그런 식으로 벌써 절반을 써내려갔으며, 그만 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학생은
아주 진지하게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난 천천히 책상들 사이를 지나가며 다른 학생들의 종이를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자신
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한 줄씩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난 팔굽혀펴기를 열 번 이상 할 수 없어."
"난 좌익수 담장 너머로 홈런을 날릴 수 없어."
"난 아무리 해도 쿠키를 하나만 먹을 수가 없어." 학생들이 이런 작문을 하고 있는 것에 나
는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교사인 도나 선생님 은 뭘 하고 있나 살펴보기로 했다. 교탁으
로 다가갔더니 선생님 역시 부지런히 종이 위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난 방해하지 않는 게 좋
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난 존의 엄마를 교사와의 면담 시간에 참석하도록 만들 수가 없어." "난 아무리 해도 내
딸이 차에 기름을 채워 놓도록 만들 수가 없어." "난 알란이 주먹 대신 말을 사용하도록 할 수
가 없어." 도대체 왜 교사와 학생들이 '난 할 수 있어'라는 더 긍정적인 문장 대신 그렇게 부
정적인 문 장들에 매달려 있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나는 잠자코 내 자리로 돌아가 관찰을 계속
했다. 학생들 은 10분 정도를 더 써내려갔다. 대부분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웠으며, 뒷장까지 쓰
기 시작한 학생 도 있었다.
이윽고 도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자, 지금 쓰고 있는 문장을 끝마치고 새로운 건 시작하지 말아요."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종
이를 반으로 접어 앞으로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학생들은 한 명씩 앞으로 걸어나가 자신들이
쓴 '난 할 수 없어'목록을 교탁 위에 놓인 빈 신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학생들이 모두 용지를 제출하자 도나 선생님은 자신의 것도 그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상자
뚜 껑을 닫은 다음 그것을 팔에 끼고서 교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학생들이 교사를 따라 복도로
나갔 다. 나도 학생들 뒤를 따라갔다.
복도 중간쯤 갔을 때 행렬이 멈췄다. 선생님은 관리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삽 하나를 들고 나
왔 다. 한 손에는 삽, 다른 한 손에는 신발 상자를 들고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 맨 구석으로 걸
어갔 다. 거기서 그들은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난 할 수 없어'를 땅 속에 파묻으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땅을 다 파는
데 는 30분이 넘게 걸렸다. 학생들 모두가 돌아가며 한 삽씩 팠기 때문이었다. 구멍이 일 미터
깊이 쯤 됐을 때 삽질이 끝났다. 마침내 '난 할 수 없어'의 상자가 구멍 밑바닥에 놓이고 서
둘러 흙 에 덮였다.
열한 살에서 열두 살 사이의 서른한 명의 학생 전부가 새로 만든 무덤 주위에 모였다. 이제
각 자가 적어도 한 페이지에 걸쳐 쓴 '난 할 수 없어'를 한꺼번에 신발 상자 안에 넣고 1미터
깊 이의 땅 속에 파묻어 버린 것이다. 그들의 담임 교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 도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다 같이 손을 잡고 고개를 숙입시다."
학생들이 따라했다. 다들 무덤 주위에 둥근 원을 그리고 서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고
개를 숙이고서 기다렸다. 선생님이 장례식 때처럼 조문을 읽어 내려갔다.
"친구들이여, 오늘 우리는'난 할 수 없어'를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가 지
상에서 우리와 함께 있을 때, 그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보다 더 많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의 이름은 모든 공공 장소에서 자주
입 에 올려졌습니다. 학교와 시청에서, 주정부 건물 안에서, 심지어 백악관에서조차 곧잘 그의
이름 이 거론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난 할 수 없어'에게 마지막 안식처를 제공했으며, 비석까지 세울 것입니다. 그
는 떠나갔지만, 그의 형제자매인 '난 할 수 있어'와 '난 해낼 거야', 그리고 '난 당장 할거
야'는 우리 곁에 살아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아직은 그 친구만큼 강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들도 언젠가는 세상에 더 큰 발자취를 남기
게 될 것입니다.
'난 할 수 없어'여, 편안히 잠드소서.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가 없는 멋진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아멘." 도나 선생님의 장례기도를 들으면서
나는 이 학생들이 평생토록 이 날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작은 행사는 인생
에 대한 대단히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학 생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새겨져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경험이었다.
학생들은 '난 할 수 없어'의 목록을 쓰고, 그것을 땅 속에 파묻은 뒤, 담임 교사의 조사를 들
었다. 그것만으로도 교사는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도나 선생님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
다.
장례식을 마친 뒤 선생님은 학생들을 데리고 교실로 돌아갔다.
그들은'난 할 수 없어'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과자와 팝콘과 과일 주스를 나누며 조촐한
축하 행사를 벌였다. 축하 의식 도중에 선생님은 두꺼운 모조지를 오려 커다란 비석을 만들었다.
비석 맨 위에'난 할 수 없어'라고 쓰고, 그 밑에 '여기 편히 잠들다'라고 썼다. 그리고 맨 아
래에다 그날의 날짜를 적었다.
그 해가 끝날 때까지 모조지로 만든 그 비석이 도나 선생님의 교실에 항상 걸려 있었다. 한
학 생이 깜박 잊고"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할 때마다 선생님은 말없이 '여기 편히 잠들다
'를 가리켜 보였다. 그러면 그 학생은 '난 할 수 없어'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이
한 말 을 정정했다.
난 도나 선생님의 학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결코 잊을 수 없는 교
훈 을 배웠다.
여러 해가 지난 지금, 누군가 "난 할 수 없어."하고 말할 때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
의 그 장례식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날 이후로 '난 할
수 없어'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치크 무어맨
당신은 비판을 이길 만큼 강한가
중요한건 비판이 아니다.
누가 어떻게 비틀거렸으며 어디서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지적하는 사람이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인생의 경기장에 뛰어들어
먼지와 땀과 피로 얼굴이 상처 입은 사람
용감하게 재도전하고
연거푸 실수하고 모자랐다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일에 정열을 다 쏟는 사람
또한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목적에 인생을 바치는 사람이다 그는 성공과 결실을 거두었든
아니면 과감히 도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든
자신이 결코 승리도 패배도 모르는
소심하고 무감각한 영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테오도르 루즈벨트
가슴이 원하는 삶
내게는 몬티 로버츠라는 친구가 있다. 샌 위시로드에 큰 규모의 말 목장을 갖고 있는 친구이다.
나는 매번 목장 안에 있는 그의 집을 빌려 불우한 환경의 청소년을 위한 기금 마련행사를 가져
왔다.
지난 번 행사가 열렸을 때 몬티 로버츠는 참석자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말했다.
"제가 왜 잭 캔필드 씨에게 이 집을 사용하게 하는지 그 이유를 여러분은 잘 모르실 겁니
다.
오늘은 그 이야길 들려 드리고 싶군요. 이야기는 스무 해 전의 한 어린 소년에게로 거슬러 올
라 갑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마굿간에서 마굿간으로, 경마장에서 경마장으로, 목장에서 목장으
로 말 을 훈련시키며 돌아다니는 떠돌이 말 조련사 였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고등학교 시절에
끊임없이 학교를 옮겨 가야 했습니다.
졸업반이 되었을때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훗날 어른이 되면 어떤 인물이 되고 무슨일을 하
기를 원하는지 써내라는 숙제를 주었습니다.
그날 밤 소년은, 언젠가는 자신이 거대한 말 목장의 주인이 되겠다는 인생 목표를 일곱장의
종 이에 걸쳐 깨알같이 적어 내려 갔습니다. 소년은 아주 상세히 자신의 꿈을 적었습니다. 건물
들과 마구간과 트랙의 위치를 보여 주는, 25만 평에 달하는 목장의 상세도까지 자세히 그렸습
니다. 그 리고 그 25만평의 꿈의 목장안에 지을 1백 평의 집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도를 맨 끝에
첨부했습 니다.
소년은 그 꿈의 설계에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것을 선생님
께 제출했지요.
이틀 뒤 소년은 숙제를 되돌려 받았습니다. 겉장에는 커다랗게 붉은 글씨로 F학점이 적혀 있
고, '수업이 끝난 후에 나를 만날 것!'이란 쪽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꿈을 가진 소년은 수업이 끝난 뒤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왜 제가 F학점을 받아야 하죠?'
선생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이것은 너 같은 환경의 아이한테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꿈이다. 넌 돈이 한푼도 없다. 너의 가
정은 여러 도시를 떠돌아 다니는 형편이다. 넌 자본을 끌어댈수도 없지 않느냐. 말 목장을 가지려
면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넌 땅도 사야 한다. 말들도 사야 하고, 종마 값도 치러야 한다. 너한테
는 이 모든걸 감당할 능력이 없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덧붙이셨습니다
'네가 좀더 현실적인 목표를 세워 숙제를 다시 제출한다면 점수를 제고해 보겠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 그점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의견을 구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이것에 대해서만은 너만이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정이 너의 인생에 매우 중요
한 것이 되리라고 난 생각한다'
일주일 동안 심사숙고한 소년은 전에 냈던 숙제를 하나도 수정하지 않고 다시 제출했습니다.
'선생님께선 F학점을 주세요. 전 제꿈을 간직할 테니까요' 소년은 담임선생님에게 그렇게 말
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몬티 로버츠는 잠시 참석자들을 둘러 보았다.
"제가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들려 주는 것은, 여러분들이 지금 25만평의 목장 안에 세워
진 100평의 집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전 아직도 그 당시 제가 작성했던 숙제를 액자에
넣어 벽난로 위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몬티 로버츠는 이어서 말했다.
"이 이야기의 더 놀라운 부분은, 두 해 전 여름에 바로 그 선생님께서 30명의 학생들을 데
리 고 저의 목장에 와서 일주일간 야영대회를 하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떠나면서 선생님과 제
게 말 씀하셨습니다.
'이보게, 몬티. 난 이제 자네에게 말해야겠네. 내가 자네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을때 난 꿈
을 훔치는 도둑이었지. 그 시절에 난 참으로 많은 아이들의 꿈을 훔쳤어. 다행이도 자네는 굳센
의지 가 있어서 자네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지.'
선생님은 제 어깨를 두들겨 주시고서 이곳을 떠나셨습니다. 이상으로 제 이야기를 마칩니다. 여
러분 모두 즐거운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누구도 당신의 꿈을 훔쳐 가게 하지 마라. 그 꿈이 무엇이든지 당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을
따 르라.
잭 캔필드
소망 그림책
1977년에 나는 혼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세 딸을 데리고 집세와 자동차 할부금을 부어 가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내겐 꿈과 희만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한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어떤 사람이 '상상력 * 생동감 = 현실'이
라 는 원리를 설명하는 걸 들었다. 강사는 우리가 생각을 할 때 문자가 아닌 영상으로 생각한
다는 덤을 강조했다.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의 화면에 생생한 그림으로 떠올릴 수 있
으면 그 것이 곧 현실로 나타난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 세미나 내용이 내 안에 있던 창조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성경의 시편에 나오는 대
로 신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가슴이 원하는 것'을 준다는 사실을 난 믿고 있었다. 또
한 잠 언 23장 7절의 말씀대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생각하는 바대로 된다'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난 잘 알고 있었다.
집에서 돌아온 나는 곧바로 내 자신의 소망 목록을 작성해 그것을 그림으로 만들어 보기로 마
음먹었다. 그래서 낡은 잡지들을 꺼내다 놓고 '내 가슴이 원하는 것'을 잘 묘사해 주는 그림
들 을 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그림들을 멋진 사진 앨범 속에 정리해 놓고는 기대를 갖고 어떤 결과가 일어나길 기다
렸다.
내가 선정한 그림들은 내기 소망한 것들을 잘 표현해 주는 아주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거기엔 다음의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 잘생긴 남자
2.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턱시도를 입은 남자
3. 꽃으로 만든 부케(난 낭만적인 성격이다.)
4.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보석
5. 카리브 해의 파란색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6.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가정
7. 새로 산 가구
8. 최근에 큰 회사의 이사가 된 여성(난 그 당시 여성 간부라고는 한 명도 없는 회사에서 근
무 하고 있었다. 난 그 회사의 첫 번쩨 여성 이사가 되고 싶었다.)
그로부터 두 달쯤 지났을 때, 아침 열시 반에 약속이 있어서 나는 차를 몰고 캘리포니아 프
리 웨이를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멋진게 생긴 빨간색과 흰색 바탕의 캐딜락이 내
차 옆을 추월해 갔다. 너무 세련된 차였기 때문에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흘끗 그 차를 바라보게
되었 다.
그 차의 운전사도 나를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나도 무의식중에 미소를 지었다. 난 언제나
미소를 잘 짓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미소 때문에 그만 큰 문제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 남자가 계속해서 날 따라오기
시 작한 것이다. 당신도 그럴 경우를 당한 적이 있을지 모른다. 무심코 미소를 지은 건데 상대
방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난 그 차의 운전사를 쳐다보지 않는 척 하느라고 애를 썼다. 그리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날 어떤 여자로 보는거야? 난 당신 같은 사람에겐 아무 관심도 없다구' 난 앞만 바라보려고
노력하며 열심히 차를 몰았다. 그 남자는 그 이후 25킬로미터를 내 차를 쫓아왔다. 난 겁이 나
서 죽을 것만 같았다. 몇 킬로미터를 더 달렸다. 그 역시 몇 킬로미터를 더 쫓아왔다. 내가 내
차를 세우자 그도 차를 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남자와 나는 결혼하고 말 았다.
우리가 첫번째 데이트를 하고 난 날, 그 사람은 내게 장미 열송이를 보냈다. 그리고 그가 특별
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취미는 특이하게도 다이아몬드를 수집하는 것
이 었다. 그것도 큰 것들을! 게다가 그는 그 다이아몬드들로 장식해 줄 그 누군가를 찾고 있었
다. 물 론 내가 지원하고 나섰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2년 동안 연애를 했으며,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줄기가 긴 붉
은 색 장미와 사랑의 쪽지를 받았다.
우리가 결혼하기 석달 전쯤 그사람이 내게 제안했다.
"우리의 신혼 여행 장소로 어울릴 만한 완벽한 장소를 발견했소. 카리브해의 세인트 존스
섬 으로 가면 어떻겠소?"
난 함박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에요!"
그 사람과 결혼한지 일 년이 지나도록 난 내 소망 그림책의 비밍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다 그
무렵 우리는 멋진 새 집으로 이사를 했으며, 내가 그림책에 오려 두었던 것들과 똑같은 우 아
한 가구들로 집 안을 장식했다. 우연히도 남편은 동부 스타일의 품위 있는 가구들을 서부 지역
에 판매하는 큰 가구 도매상을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의 결혼식은 미국 서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도시로 알려진 라구나 비치에서 열렸
으며, 웨딩 드레스와 턱시도 역시 현실로 나타났다. 그리고 내 자신의 소망그림책을 만든 지 여덟
달 만에 나는 내가 근무하던 인간 능력 연구소의 이사직에 취임했다.
어떻게 들으면 내 이야기가 동화 속의 일처럼 여겨지겠지만, 어쨌든 이 모두가 사실이다. 결혼
한 이후 지금까지 남편과 나는 많은 '소망 그림책'을 만들어 오고 있다. 신은 이 강력한 믿
음 의 원리를 우리의 삶 속에 그대로 실현시켜 주셨다.
당신의 삶에서 현재 자신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 결정하라. 그것을 마치 현실처럼 상상하라. 그
런 다음 그것을 소망 그림책으로 구체화시켜 보라. 이 간단한 연습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 속
에 있는 생각들을 현실로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을 기억하라. 신은 우리 모두에게 '우
리의 가슴이 원하는 것'을 주겠노라고 약속했다는 사실을.
글레나 셀스버리
러브 맨
아무런 준비 없이 기회를 맞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준비는 되었지만 아직 기회가 찾아오
지 않는 편이 더 낫다.
휘트니 영 2세
레스 브라운과 쌍둥이 남동생은 미국 마이애미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에 두 아이
는 남의 집 파출부와 식당 주방일을 해서 먹고 사는 마미 브라운에게 입양되었다.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활동 과다 증세와 끝없이 떠들어대는 성격 때문에 레스 브라
운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장애자를 위한 특수 학급에서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학교를 졸업한 레스 브라운은 마이애미 해변의 시청 청소과 직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
러 나 그의 꿈은 라디오 방송의 디제이가 되는 것이었다.
밤마다 레스 브라운은 잠들 때까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틀어 놓고 음악 프로그램 디제이들의
방송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찢어진 비닐 장판이 깔린 자신의 좁은 방을 방송 스튜디오라고
생 각했으며, 헤어 브러쉬가 마이크를 대신했다. 레스 브라운은 그것에 대고 보이지 않는 상상
속의 청취자들을 향해 끝없이 이야기를 떠들었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둔 레스 브라운의 어머니와 남동생은 레스에게 그만 좀 입을 다물고 잠이나
자라며 고함을 지르곤 했다.하지만 레스 브라운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기만의 세계에
파묻혀 꿈을 먹고 살았다.
어느 날 레스 브라운은 시청에서 잔디 깎는 일을 하다가 말고 점심 시간을 틈타 그 지역의 라
디오 방송국을 찾아갔다.용기를 내어 방송국 매니저 사무실로 찾아간 그는 디스크 자키가 되
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말했다.
매니저는 작업족 바지에 밀짚 모자를 쓴 이 봉두난발의 청년을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그러
고 는 레스에게 물었다.
"자네는 방송 일과 관련된 어떤 경험이나 공부를 해 본 적이 있는가?" 레스 브라운이 대답했
다
"아뇨, 선생님. 그런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매니저가 말했다.
"젊은 친구, 미안하지만 여기엔 자네가 할 만한 일이 전혀 없는 것 같네." 레스 브라운은 공
손한 태도로 감사하다고 말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방송국 매니저는 그것으로 이 젊은 친구를 다시는 만나지 않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것 은 레스 브라운의 굳센 의지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사실 레스 브라운은 단순히 방송국 디
제이 가 되는 것 이상의 소중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를 친자식처럼 사랑해 주는 양
어머니 에게 멋진 집을 사 주는 일이었다. 디제이라는 직업은 단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첫
단계에 불 과할 뿐이었다.
양어머니 마미 브라운은 늘 레스 브라운에게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레스
는 방송국 매니저가 뭐라고 말하든 자신이 그 방송국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리라는 걸 조금도 의
심하 지 않았다.
레스 브라운은 그날부터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 방송국을 찾아가 허드레 일자리가 없
는가를 물었다. 마침내 두 손을 든 방송국 매니저는 레스에게 심부름하는 일자리를 주었다. 월급
은 아예 없었다.
처음에는 레스 브라운은 커피 심부름을 하거나, 스튜디오를 떠날 수 없는 디제이들을 위해
점 심과 저녁을 배달해 주는 일을 맡았다. 차츰 일에 대한 열성을 인정받은 그에게 디제이들은
캐디 락을 몰고 가서 음악 그룹 템프테이션이나 슈프림, 다이아나 로스 같은 유명인들을 태워
오는 일 을 맡겼다. 그들 중 아무도 레스에게 운전면허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레스 브라운은 방송국에서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했다. 사실 그 이상을 했다. 디제이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어깨 너머로 기재 작동하는 법을 익혔다. 그들이 나가라고 내쫓을 때까지 방
송 실에 남아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걸 배웠다. 밤이 되어 자기 방으로 돌아오면 레스는 낮에
배운 것을 연습하면서 언젠가 다가올 기회에 대비해 준비를 해 나갔다.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레스 브라운이 아직 방송실에서 기웃거리고 있는데 락이라는 이름의
디 제이가 생방송 중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시각에 방송국에 남아 있는 사람은 레스뿐이었다.
레 스는 락이 저런 식으로 계속해서 술을 마시다간 방송을 진행하기 힘들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 서 레스는 그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지켜보았다.
락의 방송실 유리창 앞에서 왔다갔다하면서 레스 브라운은 안을 기웃거렸다. 그러고는 혼자
서 외쳤다.
'좋아, 락. 계속 술을 마시라구!'
레스는 오랫동안 이 기회를 기다려 왔으며, 이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만일 락이 술을 더 사 오
라고 시켰다면 당장에 거리로 달려나가서 더 사왔을 것이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레스는 재빨
리 뛰어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방송국 매니저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레스, 나 클라인이야."
레스 브라운이 대답했다.
"네, 알고 있어요"
매니저가 걱정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레스, 내 생각엔 락이 이 프로를 끝내지 못할 것 같네." 레스가 말했다.
"네, 선생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매니저가 지시했다.
"다른 디제이에게 연락해서 상항을 설명하고 빨리 와서 방송을 대신 맡으라고 말해 주겠나?"
"네, 선생님. 그렇게 할게요."
그러나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레스는 스스로에게 외쳤다.
'자,기회가 왔다! 매니저는 아마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레스 브라운은 전화기의 다이
얼을 돌렸다. 다른 디제이들에게 거는 전화가 아니었다. 레스는 먼 저 양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그 다음엔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두들 라디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이 방송을 이 방송을 들으세요. 내가 곧 방송에 출
연 하니까요."
15분쯤 기다렸다가 레스 브라운은 방송국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클라인 씨, 아무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러자 클라인 씨가 말했다.
"젊은 친구, 자네 혹시 스튜디오 안의 방송기기들을 작동하는 법을 알고 있나?" 레스 얼른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선생님."
레스 브라운은 방송실 안으로 돌진하듯이 뛰어들어갔다. 그러고는 술에 취한 락을 살며시 끌
어 낸 다음에 전축판 앞에 앉았다. 그는 이제 준비가 되었다. 사실 너무 오랫동안 굶주려 왔었
다.
레스 브라운은 마이크의 스위치를 가볍게 올렸다. 그런 다음 첫 방송을 시작했다.
"여기를 보세요! 여기에 내가 왔습니다. 이름하여 엘비(LB), 즉 여러분의 매력적인 친구 레스
브라운입니다. 나를 능가할 디제이는 어제도 없었고, 내일도 없을 것이며,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나는 오직 한 사람뿐이구요. 젊고, 독신이고, 사람과 사귀기를 좋아하는 남자. 틀
림없이, 확실히 여러분을 만족시켜 드릴 행동파 디제이! 여기를 보세요. 나는 여러분의 사랑하
는 친구 러어어어어브 맨입니다.!"
자신의 소개와 함께 레스 브라운은 일사천리로 진행해 나갔다. 그리하여 청취자들과 방송국
매 니저를 단숨에 사로 잡았다. 이 운명적인 시작과 더불어 레스 브라운은 라디오 방송, 정치,
대중 강연, 텔레비전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 나가기 시작했다.
잭 캔필드
위험한 일
웃음을 웃는 건 바보스럽게 보일 위험이 있다.
눈물을 흘리는 건 감상적인 사람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건 남의 일에 휘말릴 위험이 있다.
감정을 드러내는 건 자신의 참모습을 들킬 위험이 있다.
대중 앞에서 자신의 기획과 꿈을 발표하는 건
그것들을 잃을 위험이 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되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있고 산다는 건 죽을지도 모를 위험이 있다.
희망을 갖는 건 절망에 빠질 위험이 있으며, 시도를 하는 건 실패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위험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아무런 위험에도 뛰어들지 않으려는 것이니까.
아무런 위험에도 뛰어들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으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는 고통과 슬픔을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배울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달라질 수 없으며, 성장할 수 없다.
살고,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의 두려움에 갇힌 그는 노예와 다를 바 없다.
그의 자유는 갇힌 자유이다.
위험에 뛰어드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롭다.
작자 미상
대가를 지불할 준비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그린스 포인트 쇼핑 센터에서 내가 아내 마리안느와 함께 미용실을 운
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날마다 한 베트남인이 우리에게 찹쌀 도너츠를 팔러 왔다. 그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지만 언제나 미소 지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짓과 미소를 통해 우리는 서로
를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레 반 부였다.
레 반 부는 낮엔 제과점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아내와 함께 회화테이프를 들으며 영어를 배웠
다. 나중에 나는 그들 부부가 제과점 뒷방에서 톱밥이 가득 든 자루들을 바닥에 깔아 놓고 잠
을 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트남에 살 때 반 부 가문은 동남아시아에서 손꼽힐 정도의 부자였다. 그들은 북부 베트남
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 공장들과 부동산도 갖고
있었 다. 그러나 부친이 월맹군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된 다음에는 레 반 부는 모친과 함께 남
부 베트 남으로 이주해서 학교를 다녔으며, 마침내 변호사가 되었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레 반 부 역시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는 남부 베트남에 미국인들의 숫자
가 점점 늘어나는 걸 보고는 그들의 위한 주택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는 베트남에
서 가 장 성공적인 건축가가 되었다.
그러나 레 반 부는 북부 지역을 여행하던 도중에 월맹군에게 체포되어 3년이라는 긴 기간 동
안 감옥 생활을 했다. 그 후 그는 다섯 명의 군인을 죽이고 탈출해 남부 베트남으로 왔으나 그
곳 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이번에는 월남 정부가 그를 월맹군의 첩자로 간주했던 것이다.
수감 생활을 마치고 다시 사회로 나온 레 반 부는 어업 회사를 시작했다. 몇 년 뒤에 그는
베 트남에서 가장 큰 통조림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미군과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철수한다는 소식을 들은 레 반 부는 인생을 바꾸기로 결정을 내
렸다. 그는 숨겨 갖고 있던 금을 꺼내 작은 어선에 싣고 아내와 함께 항구에 정박해 있는 미
국 함정으로 다가갔다. 그는 자기의 전재산을 내주고 필리핀까지 안전하게 수송해 준다는 약속
을 받 아 냈다. 필리핀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바로 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필리핀 대통령과 만나는 행운을 얻은 레 반 부는 대통령을 설득해 어선 한 척을 얻었다. 그
는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2년 뒤 필리핀을 떠나 미국으로 갈 때까지 레 반 부는 필리핀 전
역에서 성공적인 수산 공장을 건설했다. 미국으로 간 것은 그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였기 때문
이다.
그러나 미국으로 가던 도중에 레 반 부는 아무것도 없이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실의와 좌절에 빠졌다. 그가 모든 걸 포기하고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내리기 직전에 그
의 아내가 그를 발견했다.
"레!"
아내가 그에게 소리쳤다.
"당신이 바다로 뛰어내리면 난 어떻게 되죠? 우린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고, 많은 일을 함
께 겪었어요. 그러니 죽는 것도 함께 죽는 것도 함께 죽어요." 그 말이 레 반 부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72년에 레 반 부가 아내와 함께 미국 휴스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주머니에 한푼도 없었
고, 영어도 할 줄 몰랐다.동양인들은 친척끼리 돕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레 반 부와 아내는
사촌이 경영하는 그린스 포인트 쇼핑센터의 제과점 뒷방에서 미국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우
리 부부의 미용실은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들이 말하듯이,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제부터이다.
레 반 부의 사촌은 두 사람에게 제과점의 일자리를 주었다. 레 반 부는 일주일에 175달러, 아내
는 125달러를 받았다. 다시 말해 그들의 한 해 수입은 모두 합해 15,600달러였다. 나아가 그의
사 촌은 그들이 3만 달러의 계약금만 지불할 수 있다면 제과점을 그들에게 팔겠다고 제의했다.
나머 지 9만달러는 사촌이 빌려 주기로 했다.
레 반 부와 그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했다.
두 사람의 수입이 일주일에 3백 달러였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제과점 뒷방에서 살기로 결정했
다. 그들은 두 해 동안 쇼핑센터의 화장실에서 스폰지로 목욕을 했다. 그 두 해 동안 그들은 제과
점의 빵만으로 식사를 했다. 그리고 두 해 동안 그들은 전부 합해 일 년에 6백 달러(50만 원
정 도)의 생활비를 썼으며, 마침내 계약금으로 낼 3만 달러를 저축했다.
레 반 부는 말했다.
"우리가 일주일에 3백 달러를 번다고 해도 아파트에서 생활하려면 월세를 내야만 했다. 그
리 고 물론 가구도 있어야 했다. 그 다음엔 아파트에서 직장까지 오갈 교통수단이 필요했는데,
물론 차를 한 대 사야 했을 것이다. 자동차에 따른 보험금뿐만 아니라 기름값도 있어야 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린 자동차를 끌고 여기저기 놀러 가고 싶었을 것이고, 그러려면 옷과 화장품
도 필요했 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아파트에서 살면서 결코 3만 달러를 모을 수 없으리
라는 걸 알았 다."
이제 당신은 레 반 부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직 더 남아 있다. 두 사
람이 3만 달러를 저축해서 제과점을 산 뒤에 레 반 부는 다시금 아내와 마주 앉아 진지한 토론을
했다. 그들은 아직 사촌에게 9만 달러의 빚이 있었다. 그래서 지난 두 해 동안 힘들긴 했지만 다
시 한 해 더 제과점의 뒷방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나의 친구이자 스승인 레 반 부는 제과점에서 나온 이익금을 그야말로 땡전 한푼까지 모은 끝
에 일 년 만에 사촌에게 진 빚 9만 달러를 갚았다. 그리고 3년 뒤에는 매우 수익성 높은 다른
사 업을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때가 되어서야, 레 반 부 부부는 첫 아파트를 얻었다. 오늘까지도
그 들은 수입의 극히 적은 액수로만 생활하면서 저축을 계속하고 있으며, 물건을 살 때는 항상
현금 으로만 산다.
그래서 당신은 레 반 부가 오늘날 백만장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백만장자보다 수십 배가 넘는 부자가 되었다.
존맥코막
빈민가 소년의 꿈
1957년에 캘리포니아에 사는 열 살의 소년이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 무렵 미식 축구의
가 장 뛰어난 러닝백 선수는 단연코 짐 브라운이었다. 키가 크고 홀쭉한 이 소년은 짐 브라운
의 싸 인을 받는 것이 꿈이었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소년은 몇 가지 장애물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소년은 빈민가에서 성장했으며, 배가 부를 때까지 먹어 본 기억이 없었다. 소년은 오래지 않아
영양실조에 걸렸으며, 게다가 구루병까지 겹쳐 활처럼 휘어진 앙상한 다리를 쇠로 만든 부목으
로 지탱해야만 했다.
게다가 소년은 경기장에 들어갈 티켓 살 돈조차 없었다. 그래서 소년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끈 기있게 선수 대기실 근처에서 기다렸다. 마침내 짐 브라운이 나타나자 소년은 공손하게 싸
인을 부탁했다.
짐 브라운이 싸인을 해서 건네 주자, 소년이 말했다.
"미스터 브라운, 전 제 방 벽에 당신의 사진을 걸어 놓았어요. 전 당신이 모든 최고 기록을 갖
고 있다는 걸 알아요. 당신은 제 우상이에요."
짐 브라운은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소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년은 선언했다.
"미스터 브라운, 언젠가는 제가 당신이 가진 모든 기록을 깨고야 말 거예요!" 깊은 인상을 받
은 짐 브라운이 물었다.
"꼬마야, 네 이름이 뭐니?"
소년이 대답했다.
"오렌탈 제임스예요. 친구들은 오 제이라고 부르죠." 그 후 부상으로 미식 축구를 그만 둘
때까지 오 제이 심슨은 짐 브라운이 갖고 있던 세 가지 기록을 모두 깼다. 목표를 세우는 것
이야말로 인생에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된다. 목표를 세우라.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라.
댄 클라크
시도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나는 아내 린다와 함께 미국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에 살고 있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우 리가 '작은 도토리'프로그램을 막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이 새로운 프로그램은 어린이들
에게 마약이나 성적 희롱 등 여러 파괴적인 유혹들에 대해 '노!'라고 말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 이었다.
이 무렵 우리는 캘리포니아 주의 샌디에고에서 열릴 계획인 어떤 교육 세미나의 안내 팜플렛을
다 일고 나서 우리 부부는 이 분야의 중요한 인물들이 모두 세미나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았
다.
그리고 우리 역시 반드시 그곳에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그때 막 상담 프로그램을 시작한 단계였고, 따로 사무실도 없이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사업 초기에 각자 갖고 있던 돈도 이미 다 써 버린 뒤였다. 따라서 우리에
겐 샌디에고까지 갈 비행기표 살 돈과 그밖의 다는 비용에 필요한 돈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나 와 아내는 세미나에 꼭 참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우린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우선 샌디에고의 세미나 주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에게 우리가 왜 그곳에
참 가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한 다음, 세미나 참가증 두 장을 우리에게 무료로 제공해 줄 수
없는 가 물었다. 우리의 경제적인 사정과 우리가 하고 있는 작업, 또 우리가 그 세미나에 꼭 참
가해야 만 하는 이유등을 듣고 난 세미나 주최자는 그 자리에서 내 부탁을 들어 주었다. 그래서
우린 두 장의 참가증을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었다.
나는 린다에게 우리가 참가증을 얻었으니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린다가 말했다.
"정말 잘 됐네요! 하지만 우린 마이애미에 있는데 세미나는 샌디에고에서 열리잖아요. 이젠 어
떻게 하면 되죠?
내가 말했다.
"그곳까지 갈 교통수단을 찾아야지."
난 언제나 괜찮은 항공사라고 생각해 온 노스웨스트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 람은 우연히도 항공사 회장의 여비서였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설명 했다.
여비서는 내 전화를 곧바로 스티브 퀸토 회장에게 연결시켜 주었다. 나는 퀸토 회장에게 방
금 샌디에고의 세미나 주최자와 통화를 해서 무료 참가증 두 장을 얻었는데 그곳까지 갈일이 막
막하 다는 사정을 설명하고, 우리 부부에게 마이애미에서 샌디에고까지 왕복 비행기표 두 장을
기부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퀸토 회장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물론 그렇게 해 드려야죠."
너무나 대답이 쉽게 나와서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퀸토 회장의 다음 말이 나를 더욱 당황시켰
다.
"내게 이런 부탁을 해 줘서 고맙소."
내가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죠?"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내게 부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난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할 기회가 많지 않소.
내 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내 자신을 헌신적으로 바치는 일인데, 당신이 바로 그런 부탁을
내게 해 줬소. 나로선 아주 멋진 기회이고, 그 기회를 내게 준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
소." 나는 완전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내 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보, 방금 비행기표 두 장을 구했어."
아내가 기뻐서 소리쳤다.
"와우! 정말 대단해요! 그런데 세미나에 참가하는 며칠 동안 어디서 잠을 자죠?" 다음으로
나는 마이애미 시에 있는 홀리데이 인 호텔에 전화를 걸어 호텔 본점의 연락처를 물 었다. 그들
은 본점이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난 곧바로 멤피스로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의 연결 끝에 마침내 담당자와 통화를 할 수 있
게 되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었으며, 그가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모든 홀리데이인 호
텔을 관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세미나 참가를 설명하고 방금 비행기표 두 장을 구했는데
사흘 동 안 우리가 묵을 숙소를 무료로 제공할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그는 샌디에고 시내에 새로 지은 홀리데이 인 호텔이 있는데 그곳이라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물론입니다. 괜찮고말고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잠깐만요. 우리 호텔에서 세미나가 열리는 대학 캠퍼스까지는 6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거
리 입니다. 따라서 세미나 장소까지 오갈 교통수단을 따로 마련하셔야 할 겁니다." 내가 말했
다.
"정 필요하다면 말이라도 한 마리 구하겠습니다." 난 그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다음 린다에게 말했다.
"여보, 우린 참가증과 비행기표와 숙소까지 구했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호텔에서 캠퍼스
까지 하루에 두 번 왕복할 교통수단이야."
나는 곧이어 내쇼날 렌트카 회사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한 다음에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없겠는가를 물었다. 렌트가 회사의 담당자가 말했다.
"신형 올즈 88도 괜찮으시겠소?"
난 물론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하루 만에 우리 부부는 모든 필요한 것을 구하게 되었다.
먹는 문제는 그럭저럭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세미나가 끝나 갈 무렵 나는 자리에
서 일어나 참석자들에게 이 기적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들 중에서 오늘 우리 부부에게 점심 식사를 사 주실분이 계시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
다."
그러자 쉰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앞다퉈 손을 들었다. 그날 우리가 멋진 식사 대접을 받았음
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세미나에 참석한 우리는 멋진 시간을 보냈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우리
작 업의 고문 역할을 해 주고 있는 잭 캔필드 같은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다.
세미나에서 돌아온 우리는 곧 우리의 프로그램에 착수했으며, 해마다 2,250번째의 가족이 우리
의 작은 도토리'교육 과정을 졸업했다.
우리는 또한 '어린이들을 위해 안전한 세상 만들기'라고 이름 붙인 교육 세미나를 두 차례에
걸쳐 주최했다. 그 세미나에 우리는 전세계 사람들을 초대했다. 수천 명이 넘는 교육담당자들이
모여 인간성 회복에 대한 생각들을 주고받았다.
최근에 우리가 주최한 세미나에는 81개 나라의 교육자들이 참석했다. 17개 나라에선 교육부
장 관을 포함한 정부 대표자들까지 파견했다.
그 결과 우리 부부가 만든 교육 프로그램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비엘로러시아, 겔라루트, 카자
흐스탄, 몽골리아, 대만, 쿠크아일랜드, 뉴질랜드 등에서까지 관심을 갖고 도입하게 되었다.
당신이 올바른 사람에게 부탁하기만 하면 당신은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부탁하지
않 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릭 겔리나스
모두에게는 꿈이 있다
몇 해 전 나는 남부의 한 도시에서 정부의 생활 보조금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 는 빈민층 사람
들을 대상으로 여러차례에 걸친 공개 강좌를 열 기회가 있었다.
난 참석자들 모두에게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인생을 살아갈 능력을 갖고 있으 며, 우리가 할
일은 그 능력을 되살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줄 계획이었다.
나는 시 관계자에게 생활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가능하면 다양 한 인종과
다양한 가정 환경을 가진 사람들을 뽑아 달라고 부탁했다.
공개 강좌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와 일일이 악수를 나눈 뒤 내가 첫 번째로 던 진 말은 이것이
었다.
"난 먼저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인생의 꿈이 뭔가를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참석자 대부분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들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꿈이라구요? 우린 그런 거 없어요."
내가 말했다.
"그럼 여러분들이 어렸을 땐 어떠했습니까? 어렸을 때 장차 이루고 싶었던 꿈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한 여성이 말했다.
"당신이 꿈으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쥐들이 우리 애들을 갉 아먹는 판국에
말예요."
내가 말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매우 끔찍한 일이군요. 부인께선 쥐들과 애들 걱정 때문에 잠이 안 오시
겠군요. 어떻게 하면 그 쥐들을 퇴치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말했다.
"방충망에 구멍이 나서 쥐들이 들락거리니까 새 방충망을 달면 해결되겠죠.
"
내가 모두에게 물었다.
"그럼 여러분들 중에 방충망을 새로 달 줄 아는 사람이 누구 없습니까?" 한 남자가 일어나
말했다.
"아주 오래 전에 내가 그런 일들을 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허리가 몹시 약 해져서 꼼짝할
수가 없답니다. 그래도 시도는 해 보겠어요." 나는 그 남자에게 내가 약간의 돈을 줄 테니 철물
점으로 가서 재료를 사다가 그 부인의 방충망을 갈아 주라고 부탁했다. 내가 재차 물었다.
"정말로 이 일을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물론이오. 한번 해 보겠소."
그 다음 주에 다시 모였을 때 내가 그 여성에게 물었다.
"부인 댁의 방충망은 잘 손질됐습니까?"
그녀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아주 훌륭하게 수리됐어요."
내가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가 다시 꿈을 갖기 시작해도 되겠군요. 안그런가요?" 그녀는 내게 미소를 보
냈다. 나는 방충망을 수리한 그 남자에게 물었다.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니까 기분이 어떠신가요?" 그가 말했다.
"네, 아주 좋습니다. 이상하게도 전보다 허리가 더 좋아진 느낌이군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참석자 전원이 하나씩 인생의 꿈을 갖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엔 아주 사고한 성취 같지만, 이
일을 계기로 꿈을 갖는다는 것이 미친 짓 이 아님을 모두가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작은 첫걸음
덕분에 사람들은 어떤 일 이든지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참석자들에게 한 사람씩 일어나 자신들이 가진 꿈을 말하게 했다. 한 여성 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꿈이 회사의 비서직을 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내가 물었다.
"그런데 무엇이 당신의 길을 가로막고 있죠?"
이것은 내가 사람들에게 언제나 던지곤 하는 질문이다. 그녀가 대답했다.
"전 애가 여섯 명이에요. 제가 직장을 나가면 그 애들을 돌봐 줄 사람이 아 무도 없어요. 그
러니 제가 가진 꿈을 이루기엔 틀린 셈이죠." 내가 말했다.
"그럼 그 애들을 돌봐 줄 사람을 한번 찾아봅시다." 나는 다시 모두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 모인 분들 중에서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 이 부인의 여섯 아이들 을 돌봐 줄 분이
혹시 안 계십니까? 그렇게 하면 이 부인이 교양대학에 다니며 비서직에 관련된 교육을 받을 수
가 있을 겁니다."
한 여성이 손을 들고 말했다.
"내게도 애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내가 잘 할 수 있어요." 내가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곧바로 이 계획은 실천에 옮겨졌고, 그 부인은 비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 었다.
모두가 뭔가를 발견했다. 방충망을 수리해 주었던 그 남자는 실내 인테리어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아이들을 돌봐 주겠다고 나선 여성은 보모 자격증까지 갖춘 간병인이 되었다. 석달
만에 나는 세미나 참가자 전부를 생활 보조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로 만들었다.
난 이런 일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 다. 지금까지 수없이 해왔다.
버지니아 스테어
추수감사절에 찾아온 손님
우리 식구가 돈과 먹을 것이 떨어진 어느 추수감사절 날, 누군가 찾아와서 우 리 집 문을 두
드렸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문을 열어 보니 한 남자가 음식 바구 니와 커다란 칠면조, 그리고
심지어 그것들을 요리할 냄비까지 든 커다란 상자 를 안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버지가 그 남자에게 물으셨다.
"당신은 누구요? 어디서 왔소?"
그 낮선 사람이 말했다.
"저는 당신 친구가 보내서 왔습니다. 당신에게 도움이 필요하지만 당신이 어 떤 도움도 거절
하리라는 걸 알고 저를 대신 보낸 겁니다. 즐거운 추수감사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안 됩니다. 난 이런 걸 받을 수 없소."
하지만 그 낮선 사람은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에겐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전 다만 심부름꾼일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총총
이 사라져 버렸다.
그 일은 내 삶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언젠가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똑같은 일을 하겠다고 스스로 결심했다.
열아홉 살이 되어 내 힘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나만의 추수감사 절 의식을 시작
했다. 그날이 되면 우선 수퍼마켓으로 가서 한 집이나 두 집이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음
식을 샀다. 그런 다음 배달부 차림을 하고 근처의 가난한 이웃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상자 안에다 나는 음식과 함께 내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추수감사절의 일을 설명하는 쪽지
를 넣어 두었다. 그리고 쪽지의 맨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내가 이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바라는 것은, 당신들도 언젠가 형편이 나아 지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똑같은 일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해마다 실천하는 이 추수감사절 의식을 통해
나는 그 동안 내가 벌어들인 어 떤 경제적인 금액보다 많은 것을 얻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
다.
몇 해 전 일이다. 나는 사업 관계로 집을 떠나 아내와 함께 뉴욕에서 추수감 사절을 맞이하
게 되었다. 아내는 온 식구들과 함께 있지 못하게 된 것을 무척 마음에 걸려 했다. 추수감사
절이 되면 아내는 늘 집에서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데 그날은 단둘이서 호텔방에 갇힌 신 세가 된 것이다.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오늘은 죽은 나무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매다는 것보다 살아 있는 생 명들에게 장식
을 하는 것이 어때?"
아내는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는 처음으로 아내 에게 내가 매년
추수감사절마다 해 온 일을 고백했다. 아내는 무척 놀라는 표정 이었다.
내가 말했다.
"우리 할렘가로 갑시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걸 느끼고, 또 한 우리가 무얼
나눠 줄 수 있는가 알아봅시다."
나는 마침 우리와 함께 추수감사절 파티에 참석한 사업 동료들에게도 같은 제 안을 했다.
그러나 그들 부부들은 내 제안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한 사람씩 떼
밀며 말했다.
"자 어서 갑시다. 할렘가로 가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몇명을 도와 줍시다.
우리는 도움을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잘못하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우리는 그저 배달 온 사람이 되면 되는 겁니 다. 예닐곱 가구가 한 달 동안
먹을 충분한 음식을 삽시다. 우린 많이 가졌지 안 습니까. 자, 어서 가서 그렇게 합시다! 추수감
사절의 의미가 그런 것 아니겠어 요? 칠면조나 먹는 게 아니라, 우리의 감사를 주위에 나누는
일이지요. 어서 갑 시다."
나는 그 전에 라디오 인터뷰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업 동료들에게 봉 고차를 한 대 구
해 놓으라고 부탁했다.
내가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오자 그들이 말했다.
"우린 그 일을 할 수 없게 됐소. 뉴욕 어디에도 봉고차가 없고. 렌트카 회사 마다 모두 전화
를 해 봤는데 봉고차가 다 떨어졌다는 거요. 아무리 해도 구할 수가 없었소."
내가 말했다.
"우리가 어떤 걸 진정으로 원하면 우린 그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어요. 우 리에게 필요한
건 망설임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에요. 뉴욕에는 봉고차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아요. 단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을 뿐이에요. 나가서 한 대 구합시다."
그들이 주장했다.
"우리가 사방에 다 확인해 봤소. 봉고차를 가진 곳이 한 군데도 없다니까요.
"
내가 말했다.
"이리 와서 거리를 내려다봐요. 저길 봐요. 저 봉고차들이 안 보입니까?" 그들은 보인다고 대
답했다. 내가 말했다.
"그런 내려가서 한 대 붙잡읍시다!"
나는 호텔 밖으로 나가서 지나가는 봉고차를 세우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날 나는 뉴욕 운
전자들에 대해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가로막으 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속력
을 더 냈다.
그래서 우리는 신호등에 막혀 정지해 있는 차들에게 시도했다. 우리가 다가가 서 유리창을
두두리자 운전자들은 유리문을 내리면서 수상쩍은 눈초리로 우릴 쳐다보았다.
내가 말했다.
"안녕하시오! 오늘이 추수감사절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려고 하는데,
우릴 할렘가까지 좀 태워다 주시겠소?" 할렘가라는 소릴 듣자마자 운전자들은 재빨리 외면을 하
고는 황급히 유리창을 닫고 달아나 버렸다. 그들은 한마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는 더 솜씨 있게 부탁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다. 운전자들이 유리문을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린 부드럽게 말했다.
"알다시피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래서 혜택을 받지 못한 몇몇 가정들 을 도와 주고자
하는데,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뉴욕 시의 한 빈민 지역까지 우리는 태워다 주시지 않으시
겠습니까?"
약간 효과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릴 태워다 주면 백
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것은 훨씬 더 효과가 있었다. 하지 만 그래도 할렘가까지 태워다 달
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당장 거절하며 차를 몰고 달아 났다.
그렇게 스무 대가 넘는 봉고차에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였다. 내 사업 동료 들은 이제 계획
을 포기할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말했다.
"확률의 법칙이라는 게 있는 법이에요. 누군가는 우리의 부탁을 들어 줄 겁 니다."
그때 우리가 바라는 완벽한 봉고차 한 대가 우리 앞에 와서 멈췄다. 다른 차 들보다 훨씬 커
서 우리 모두를 소송할 수 있는 믿음직한 차였다. 우리는 다가가 서 유리문을 두드리고 운전자
에게 말했다.
"우리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까지 태워다 주겠소? 그렇게만 해 주면 백 달러를 드리
겠소."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한테 돈을 줄 필요는 없소. 당신들을 태워다 주게 되어 나도 기쁘오. 좋 소. 내가 당신들
을 이 도시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로 데려다 주리다." 그는 우리가 차에 올라탈 수 있도록 운전
석 옆좌석에 벗어 놓았던 모자를 집 어들었다. 그가 그것을 머리에 쓰는 순간 나는 그 모자에
'구세군'이라고 적 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존 론던이었으며, 그는 사우스 브
롱스 지역의 구세군 대장이었다.
우리는 다들 흥분해서 함성을 지르며 봉고차에 올라탔다. 그가 말했다.
"당신들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지역으로 데려다 주겠소. 그런데 말 해 보시오. 당신
들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소?"
나는 그에게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 주며, 뭔가를 되돌려줌으로써 내 가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고 싶은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론던 대장은 할렘가의 비벌리 힐즈라고 할 만한 사우스 브롱스 지역의 빈민가 로 우리를 안내
했다. 우리는 먼저 수퍼마켓으로 가서 많은 양의 음식과 바구니 들을 샀다. 일곱 가구가 30일
동안 먹을 충분한 양의 음식이었다. 우리는 그것들 을 하나씩 포장했다. 그런 다음 그것을 사람들
에게 배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방문한 어떤 건물에는 여섯 명의 사람들이 한 방에서 생활하고 있었 다. 그들은 이
혹한의 계절에 무단 거주자들처럼 전기도 없고 난방시설도 없이 쥐와 바퀴벌레와 오줌 냄새에
뒤섞인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런 환 경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
지만, 우리가 하는 작은 일에서 오 는 기쁨 또한 큰 것이었다.
당신이 어떤 것을 진정으로 원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긴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 든지 일어나게
할 수 있다. 기적은 이와 같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 '봉고차가 한 대도 없는' 뉴욕과 같은
도시에서도
앤소니 로빈스
333 이야기
그 당시 나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있는 토론토 북부의 사슴 농원에서 주말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다. 금요일 밤, 우리가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간 지 점에 있는 배리라는 마을을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수백만 달러의 재산
피해가 났다.
일요일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배리에서 잠시 차를 멈췄다.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운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 전체가 말 그대로 쑥밭이 되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온 사방
이 폐허로 변해 버렸다. 집들은 풍지박산나고, 자동 차들이 뒤집힌 채로 여기저기 뒹굴었다.
바로 그날 밤 보브 템플턴도 차를 몰고 같은 고속도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도 나처럼 차를
멈추고 서서 그 재난을 구경했다. 단지 그는 나와는 다른 생각 을 했다.
보브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와 퀘벡 주에서 방송되는 텔레미디어 라디오 방송 국의 이사였다.
그는 자신이 소속된 라디오 방송을 이용해 이 마을 사람들을 위 해 틀림없이 뭔가를 할 수 있으
리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나는 토론토에서 다른 세미나를 이끌고 있었다. 세미나가 진행되는 동안 보브 템
플턴과 텔레미디어 사의 또 다른 이사인 보브 존슨이 세미나장에 들어와 뒤켠에 서 있었다.
그들은 배리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자신들이 뭔가를 해 야만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세미나가 끝난 뒤 우리는 보브의 사무실로 갔다. 그는 회오리바람에 희생된 사람들을 돕는
일에만 온통 정신이 몰두해 있었다. 그는 오직 그 애기뿐이었다.
그 다음 주 금요일에 그는 텔레미디어 방송국의 모든 간부들을 자신의 사무실 로 소집했다. 그
는 차트를 세워 놓고 맨 위에 글씨로 3자 세 개를 썼다. 그러고 나서 간부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3시간짜리 방송으로 지금부터 3일 만에 3백만 달러를 모금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
서 그 돈을 배리 마을 주민들에게 주는 겁니다." 갑작스런 제안에 실내엔 침묵만이 감돌 뿐 아
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누군가 말했다.
"템플턴 씨, 당신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요. 그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요." 보브 템플턴이 말
했다.
"잠깐만요. 난 여러분에게 그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묻고 있는 게 아닙 니다. 또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난 다만 여러분에 게 그렇게 하고 싶은가 아닌가를
물었을 뿐입니다." 사람들 모두가 말했다.
"그거야 물론 하고는 싶죠."
그러자 보브 템플턴은 333이라고 쓰여진 글자 밑에 크게 T자로 금을 그었다.
한쪽에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
다른 한쪽에는 이렇게 썼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
그런 다음 그는 모두에게 말했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칸에는 크게 가위표를 하겠습니다. 우린 왜 이 일 이 불가능한가
를 놓고 토론할 만큼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그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 칸에 모든 아이디 어를 적어 나갑시다. 좋은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우린 이 방을 나갈 수가 없습 니다."
다시금 침묵이 감돌았다.
마침내 누군가 말했다.
"캐나다 전지역에 라디오 생방송을 하는 겁니다." 보브 템플턴이 말했다.
"매우 좋은 생각입니다."
그는 그것을 차트에 적었다. 그러나 그가 문장을 채 다 적기도 전에 누군가 말했다.
"캐나다 전역에 라디오 생방송을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우리 방송국은 캐나 다 전역에 중계
국을 갖고 있지도 않아요."
그건 대단한 설득력 있는 반대였다. 그들은 온타리오 주의 퀘벡 주에만 중계 국을 갖고 있었
다.
템플턴이 말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얘긴 나중에 합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라디오 방송국들끼리는 언제나 경쟁이
심하기 때문이었다. 방송국들이 서로 협조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며,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할 때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시제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캐나다 방송계에서 가장 명성을 얻고 있는 하비 커 크와 로이드 로
버트슨에게 이 방송의 진행을 맡기는 겁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
은 전국적인 텔레비전 방송의 앵커를 맡고 있었으며, 라디오에는 절대 출연하지 않는 것으로 유
명했다.
그때가 금요일이었다. 그 다음 주 화요일, 그들은 '라디오 마라톤'을 시작했 다. 캐나다 전역
에서 50개가 넘는 방송국들이 이 방송에 참여했다. 배리 마을 주 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한,
누가 이 방송을 주도하는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비 커크와 로이드 로버트슨이 생방
송 진행을 맡았으면, 그렇게 해서 그들은 실제로 3시간의 방송을 통해 3일 만에 3백만 달러를
모금하는 데 성공했 다.
당신 역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왜 할 수 없는가보다 어떻게 그것을 해낼 것인가에 초점
을 맞춘다면 말이다.
보브 프록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세일즈 우먼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세일즈 우먼은 아직 처녀라고 부르기에는 어린 나이의 소녀이
다. 마르키타 앤드류스는 여덟살 이후 지금까지 8만 달러어치의 걸스카우트 쿠키를 판매했다.
방과후 집집마다 돌면서, 마르키타는 보통 이상으로 수줍음을 타던 자신을 자 선 기금 쿠키
판매의 여왕으로 변신시켰다. 그것은 열네 살 때 세일즈의 비결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선 마르키타는 강한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뜨거 운 바람이었다.
마르키타의 아버지는 그녀가 여덟 살 때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 래서 마르키타
의 엄마는 뉴욕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 하고 있었다. 두 모녀의 꿈은
세계 일주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하루는 마르키타에게 말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널 대학까지 보내 주마. 네가 대학을 졸업한 뒤 돈을 많이 벌면 엄
마와 함께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나자꾸나. 알겠니?" 열네 살 때 마르키타는 걸스카우트 잡지를
읽다가 자선 기금용 쿠키를 가장 많이 판매하는 대원에게는 두 사람이 세계 일주를 할 수 있는
모든 비용이 상금 으로 수여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사를 읽고 마르키타는 자신의 능력을 다해
서 걸스카우트 쿠키를 팔기로 결심했다. 세상의 어떤 걸스카우트 대원보다도 더 많 은 숫자의
쿠키를.
하지만 강렬한 바람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계획이 필요하
다는 걸 마르키타는 알았다.
마르키타의 이모가 마르키타에게 충고했다.
"항상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전문가다운 복장을 하거라. 사업을 할 때는 사 업가답게 옷을
입어야만 해. 따라서 넌 쿠키를 팔러 갈 때면 항상 걸스카우트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 그리고
오후 4시 반이나 6시 반, 특히 금요일 오후엔 고 객들에게 많은 양의 쿠키를 사도록 권해도 좋
다. 항상 미소 짓는 얼굴을 할 것 이며, 사람들이 네 쿠키를 사 주든 사 주지 않든 언제나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 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네 쿠키를 사 달라고 부탁하진 말아라. 그 대신 투자
를 하라고 부탁해라."
다른 많은 스카우트 대원들 역시 세계 일주 기회를 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다른 많은 스카우트 대원들 역시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 키타만이 학교
가 파하면 걸스카우트 복장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꿈에 투자할 것을 부
탁했다. 그리고 마르키타는 부탁하는 자세를 포기하 지 않는다.
마르키타는 초인종을 누른 뒤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안녕하세요. 제겐 꿈이 한 가지 있어요. 걸스카우트 쿠키를 팔아서 엄마와 함께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나는 거예요. 쿠키 열 상자나 스무 상자만큼만 투자하 지 않으시겠어요?"
그 해에 마르키타는 3,256박스의 걸스카우트 쿠키를 팔았으며, 세계 일주 여행 을 따냈다. 그
이후 마르키타는 현재까지 4만 2천 박스가 넘는 걸스카우트 쿠키 를 판매했으며, 미국 전역에서
열리는 세일즈 맨 세미나의 연사로 초청받았다.
마르키타의 모험적인 인생은 디즈니 사에서 영화화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마르키타 자신
이 직접 주연을 맡았다. 또한 마르키타는 '더 많은 쿠키와 콘도 미니엄과 자동차와 컴퓨터와
세상의 모든 것들을 판매하는 법'이란 책을 공동 저술해서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마르키타는 어린이든 어른이든 꿈을 갖고 있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보다 더 머 리가 뛰어나거나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차이가 있다면 마르키타 는 판매의 비결을 발견했다는 것
뿐이다. 즉 포기하지 않고 찾아다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시작조차도 하기도 전에 실패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 도전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판매하고자 하든 간에, 거부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
문에 우리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기회를 붙잡기 훨 씬 전에 스스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꿈을 포
기해 버린다.
자신이 원하는 걸 위해 도전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 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두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걸 뜻한다. 그리 고 마르키타가 발견한 것처럼,
더 많이 도전할수록 그것을 얻는 게 더 쉽고 더 성취감이 생긴다.
한번은 텔레비전 생방송에서 연출자가 마르키타에게 매우 어려운 제안을 했 다. 토크쇼에
나온 다른 출연자에게 걸스카우트 쿠키를 판매해 보라고 요청한 것이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마르키타가 그 출연자에게 말했다.
"걸스카우트 쿠키 열 상자나 스무 상자에 투자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러자 그 출연자가 말했
다.
"걸스카우트 쿠키라고?! 난 걸스카우트 쿠키 따윈 사지 않아. 내 직업이 뭔지 아니? 연방 교
도소 간수라구. 매일 밤마다 2천 명의 죄수들에게 이 쿠키를 몇 개씩 갖다 주는 것도 좋은 아
이디어가 아닐까요?"
마르키타의 말을 듣고, 간수는 그 자리에서 수표에 싸인을 했다.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토미의 자동차 스티커
내가 다니는 캘리포니아의 헌팅턴 비치 교회 앞에서 하루는 한 남자 아이가 날 기다리고 있
었다. 내가 어린이 은행에 대해 설명하는 애기를 들었다는 것이 다. 아이는 내게 악수를 청하고
나서 말했다.
"제 이름은 토미 타이예요. 일곱 살이구요, 아저씨의 어린이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싶어요.
"
내가 말했다.
"토미, 그게 바로 내가 하는 일이란다. 아이들에게 돈을 빌려 주는 것 말이 다. 그리고 지금
까지 모든 아이들이 빌렸던 돈을 갚았지. 넌 그 돈으로 뭘 하고 싶어서 그러니?"
토미가 말했다.
"전 여섯 살 때부터 제가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왔어요. 그
래서 '아이들을 위해서 평화를!'아라는 자동차 스티커를 만들고 싶어요. 스티커 밑에는 제 싸
인을 할 거예요."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후원을 해 주마."
토미는 1천 장의 자동차 스티커를 제작하기 위해 454달러가 필요했다. '마크 빅터 한센 어
린이 자유 기업 기금'에서 인쇄비를 지불했다.
토미의 아버지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돈을 갚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우리 애의 자전거를 저당 잡으실 건가요? "
내가 말했다.
"아닙니다. 모든 아이들은 정직성과 도덕성과 윤리관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 이 제 신조입니
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다른 교육이지요. 저는 토미가 돈을 갚 으라고 믿습니다."
만일 당신에게 열 살이 넘은 자녀가 있다면 타인을 상대로 정직하고 도덕적인 금전 관계를 갖
는 경험을 갖도록 해 보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은 일 찍부터 그 원리를 체득할 것이
다.
나는 토미에게 내 강의 테이프를 전부 복사해서 주었으며, 토미는 그것들을 스물한 번씩
되풀이 듣고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중에는 이런 내용 이 있었다.
"판매를 할 때는 항상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부터 시작하라." 토미는 아빠를 설득해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집으로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경비원이 나왔다. 토미는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전략으로 2분간에 걸쳐 자신이 만든 자동차 스티커를 설명했다. 마침내 경비원이 호
주머니에서 1달러 50센트를 꺼내 토미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자, 이건 내가 사는 거다. 그리고 잠깐 기다려라. 내가 가서 전 대통령을 모 셔 오마."
나중에 내가 토미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냈니?"
토미가 말했다.
"아저씨가 강의 테이프에서 상대가 누구든지 판매를 시도하라고 말씀하셨잖 아요."
나는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맞다, 맞아. 내 책임이야."
토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도 스티커를 보내면서 미화 1달러 50센트짜리 계산서를 동봉
했다. 고르바초프는 토미에게 곧바로 1달러 50센트를 우송하면서 자신의 사진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 보냈다.
"토미 군, 평화를 위해 계속 노력하길 바랍니다." 그 밑에는'러시아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
프'라고 자필서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유명 인사들의 싸인을 수집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미에게 말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싸인을 내게 팔면 5백 달러를 주마." 토미는 말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마크 아저씨."
내가 말했다.
"토미, 난 몇 개의 회사를 소유하고 있단다. 네가 나이를 더 먹으면 널 우리 회사에서 일하
게 하고 싶구나."
그러자` 토미가 말했다.
"농담하시는 거예요? 제가 나이를 더 먹으면 아저씨를 제 회사에서 일하게 할 거예요."
얼마 후에 오렌지 카운티 지역 신문 일요판에 토미의 스토리와 내가 만든 어 린이 자유 기업
은행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신문기자 마티 쇼가 장장 여섯 시 간에 걸쳐 토미를 인터뷰한 끝
에 화제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마티가 토미에게 자신의 행동이 세계의 평화에 과연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질문
했다.
토미가 대답했다.
"큰 일을 하기엔 전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해요. 세상의 모든 전쟁을 멈 출 수 있으려면
적어도 열 살이나 열한 살은 되어야 하겠지요." 마티가 물었다.
"네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토미가 말했다.
"우리 아빠와 월리 조이너, 마크 빅터 한센 씨예요." 토미는 역시 사람 볼 줄 아는 눈이 있
다.
사흘 뒤, 나는 유명한 카드 회사인 홀마크 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신문에 난 기사를 읽었는
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홀마크 카드 사 지점장 연수회에 토 미를 강사로 초청하고 싶다
는 것이었다. 기사를 통해 그들은 토미가 다음과 같 은 아홉 단계의 목표를 세웠다는 사실을 알
고 있었다.
1. 비용을 따져 본다.
2. 돈을 빌릴 계획을 세운다.
3. 자동차 스티커를 인쇄한다.
4.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은가를 배운다.
5. 사회 각층의 유명한 사람들의 주소를 알아낸다.
6. 각 나라의 대통령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무료로 스티커 한 장씩을 보낸다.
7.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평화에 대한 이야기한다.
8. 신문 가판대를 찾아가서 내 사업에 대해 이야기한다.
9. 학교에서도 대화를 나눈다.
홀마크 사에선 나더러 토미의 강연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기간이 너무 촉박해
강연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나와 토미에게는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 었다.
유명한 앵커 조안 리버스가 토미에게 자신의 텔레비전 쇼에 출연해 달라고 요 청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토미의 인터뷰 기사를 복사해 보냈던 것이다.
조안이 토미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토미, 난 조안 리버스인데, 널 내가 진행하는 텔레비전 토크쇼에 출연시키고 싶구나. 수백만
명이 이 프로를 지켜볼 거야."
토미가 말했다.
"그래요? 좋아요."
토미는 사실 조안 리버스가 누군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조안이 말했다.
"네게 출연료로 3백 달러를 주마."
토미가 말했다.
"그것도 좋아요."
내 강의 테이프를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에 토미는 조안에게도 세일즈를 시작 했다.
"전 이제 아홉 살밖에 안 됐고, 혼자선 먼 여행을 할 수가 없어요. 저의 엄마 와 함께 가야만
하는데, 엄마의 여행 비용도 대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조안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토미가 말했다.
"그리고 방금 텔레비전에서 <부자와 유명 인사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란 프 로를 봤는데, 뉴
욕에 가면 트럼프 플라자 호텔에서 자야 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해 주실 수 있겠죠?"
조안이 대답했다.
"물론 그렇게 해 주마."
"또 뉴욕에 가면 반드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자유의 여신상을 구경하 라고 하는데, 엄
마와 저를 위해 입장 티켓을 준비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렇게 할게..."
"좋아요. 그런데 저의 엄마가 운전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던가 요? 우리가 뉴
욕에 있는 동안 아줌마의 리무진을 며칠 써도 될까요?" 조안이 말했다.
"그래,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마."
토미는 마침내 조안 리버스 토크쇼에 출연해 조안과 카메라맨들과 생방송을 지켜보는 청중
모두를 매료시켰다. 그만큼 토미는 미남에다 유머가 있었으며, 솔 직하고, 어린 나이에도 자신감
에 차 있었다. 설득력 있고 흥미 있는 이야기에 이 끌린 청중들은 그 자리에서 돈을 내고 토미의
자동차 스티커를 샀다.
토크쇼가 끝날 무렵에 가서 조안이 토미에게 물었다.
"토미, 넌 정말로 네가 만든 스티커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주리라고 믿고 있니?"
토미는 반짝이는 눈으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한 지 2년밖에 안 됐는데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어요.
그만하면 잘 해낸 거 아닌가요?"
마크 빅터 한센
엄마를 구한 용기 있는 행동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든, 당신의 생각은 옳다.
헨리 포드
뉴욕 제트 팀의 수비수로 활약하는 미식 축구 선수 마티 리온스에게는 로키 리온스라는 일
곱 살 난 아들이 있었다. 어느날 저녁, 로키는 픽업 트럭의 앞좌석 에서 엄마 무릎에 다리를 올려
놓고 잠이 들었다.
로키의 엄마 켈리 리온스는 구불거리는 2차선 시골길을 조심스럽게 운전해 내 려갔다. 앞쪽에
좁은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로 진입하는 순간 차바퀴가 길에 패 인 구덩이에 부딪치는 바람에
트럭이 도로에서 미끄러졌다. 그러면서 오른쪽 앞 바퀴가 절벽 난간에 걸쳐졌다.
트럭이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켈리 리온스는 차를 도로 위로 올 라서게 하려고
급히 악셀을 밟으면서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려고 시도했다. 그런 데 로키의 발이 그녀의 다리와
핸들 사이에 끼는 바람에 그녀는 차를 어떻게도 통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트럭은 6미터 아래 절벽으로 공중제비를 돌며 추락했다. 차가 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로키는 잠에서 깨났다.
로키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엄마? 왜 핸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지?" 켈리는 피로 범벅이 되었다. 자동차 기
어가 튀어오르면서 얼굴을 강타해 입술 에서 이마까지 찢겨져 나갔다. 잇몸이 찢어지고, 뺨은
가루처럼 부서졌으며, 어 깨뼈도 으스러졌다. 부러진 뼈 하나는 겨드랑이를 뚫고 튀어나왔다. 게
다가 그녀는 짓뭉개진 차 문짝 안에 꼼짝없이 갇혀 버렸다.
로키가 소리쳤다.
"내가 꺼내 줄게, 엄마!"
로키는 기적적으로 다친 곳이 없었다. 엄마 밑에서 빠져나온 로키는 열린 창 문으로 미끄러
져 나가 엄마를 밖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나 켈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켈리는 반쯤 무의식 상태에서 중얼거렸다.
"날 자게 내버려 둬라, 로키야."
로키는 소리쳤다.
"안 돼. 엄마! 잠들면 안 돼!"
로키는 다시 트럭 안으로 기어들어가 켈리를 부서진 차 밖으로 밀어내는데 성 공했다. 그런 다
음 로키는
자기가 도로 위로 올라가서 지나가는 차를 세워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켈리에게 말했다.
켈리는 무의식 중에도 자동차들이 어두운 도로에 서 있는 아들을 발견하지 못 하고 그냥 달려
들까 봐 로키혼자서는 도로 위로 올라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가파른 제방을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로키는 뒤에서 20킬로그램의
연약한 몸으로 50킬로그램의 엄마를 밀어올렸다. 그들은 한 번에 한 발짝씩 온 힘을 다해 전
진했다. 고통이 너무 심해 켈리는 포기하고 싶어했지 만 로키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로키는 엄마에게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 동화책에 나오는 작은 기관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작은 기관차가 큰 기관차를 끌고 가파른 산을 올라가는 내용이 었다.
엄마에게 그 얘기를 들려 주면서 로키는 엄마에게 계속 소리쳤다.
"우린 할 수 있어. 우린 할 수 있어, 엄마."
마침내 두 사람이 도로 위까지 기어올라왔을 때, 로키는 처음으로 엄마의 찢 겨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때 트럭이 한 대 달려왔다. 로키는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며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우리 엄마를 병원에 데려다 주세요!"
켈리 리온스의 얼굴을 복원하는데 8시간 동안 344바늘이나 꿰매는 대수술이 진행되었다. 그
녀는 현재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켈리는 말한다.
"전에는 길고 똑바른 코에다 가는 입술, 높은 광대뼈를 가진 얼굴이었지요.
이제 저는 들창코에 평범한 뺨, 그리고 훨씬 두꺼운 입술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얼굴의 흉터
는 제거되었고, 부상으로부터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로키의 영웅적인 행동은 큰 뉴스가 되었다. 그러나 이 용감한 아이는 자기가 특별한 일을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로키는 다만 다른 아이들도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라
고 말할 뿐이다.
로키의 엄마는 말한다.
"만일 로키가 아니었다면 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생명을 잃었을 거예요." 미첼 보르바 제공
멋진 여행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의 모험에 대해 진정으로 긍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이다.
조셉 캠벨
삶이 하나의 여행이며 그 여행엔 종착역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너 무 늙었다고 해
서 결코 그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플로렌스 브룩스는 64세에 평화 봉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글래디스 클래피스는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82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오와 대 학의 기숙사에
들어갔다. 또한 에드 스티트는 87세에 뉴저지에 있는 교양 대학 에서 학사과정을 밟았다. 에드
는 그것이 노인병을 예방해 주고, 두뇌에 활력을 준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워싱턴 주의 타코마에 사는 월트 존스만큼 여러 해 동안 내게 깊 은 인상을 준 인
물도 아마 없을 것이다.
월트 존스는 세 번째 아내와 결혼해서 52년 동안 함께 살았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누군가 월트 존스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 지낸 친 구를 잃어서 얼
마나 가슴 아프냐고 물었다. 그러자 월트는 대답했다.
"물론 가슴 아프고말고. 하지만 그것 역시 최선의 결과가 아니겠소?" 질문한 사람이 의아해
서 물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죠?"
월트가 설명했다.
"난 이제 와서 내 아내의 훌륭한 성격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부정적인 얘기 를 하려는 건 결
코 아니오. 하지만 아내는 지난 10년동안 날 집 안에만 갇혀 지 내게 했소."
무슨 사연인가를 묻자 월터가 말했다.
"그 여자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소. 언제나 집 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으려고
했단 말이오. 10년 전에 내가 94세가 되었을 때, 난 아내에게 불 평을 했소. 우리가 보는 것이라
곤 맨날 아름다운 북태평양 해변뿐이라고.
그랬더니 아내는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물었소. 난 솔직히 말했 지. 홈카(주방시
설과 침대가 갖추어진 레저용 차)를 한 대 사서 미국 48개 주를 돌아 다녔으면 하는 생각이라
고. 그러면서 난,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소. 아내가 한마디로 잘라서 말
하더군.
"당신 정신 나갔어요, 월트?"
내가 물었지.
"왜 그런 말을 하지?"
아내는 말했소.
"그러다가 강도라도 만나면 어쩔려구요? 우린 장의사도 없는 곳에서 죽고 말 거예요."
아내는 또 "운전은 누가 하구요?" 하고 묻더군. 그래서 내가 말했지.
"물론 내가 하지, 램비."
그랬더니 아내가 뭐라고 소리쳤는지 아시오?
"당신은 우리 두 사람 다 몰살시킬 작정이군요."
자, 이제 왜 내가 집 안에만 갇혀 지낼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겠소?" 월트 존스는 이어서
말했다.
"나는 무대에서 퇴장을 하기 전에 시간의 모래밭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싶 소. 엉덩이를
깔고 앉아만 있으면 시간의 모래밭 위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지 않겠소? 당신이 모래밭 위에
엉덩이 자국만을 남길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오."
누군가 월트 존스에게 또 물었다.
"이제 그런 아내가 세상을 떠났으니, 당신은 앞으로 뭘 할 계획입니까?" 월트가 말했다.
"내가 무얼 할 계획이냐구? 난 그 늙은 소녀를 땅 속에 묻은 뒤에 곧바로 홈 카를 한 대 샀
소. 올해가 1976년이니까 미국 독립전쟁 2백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이제부터 48개주를 여행할
계획이오."
월트 존스는 그 해에 골동품과 기념품 판매를 하며 미국 43개 주를 여행했다.
여행도중에 길에서 차를 태워 달라는 사람은 없었느냐고 묻자 그는 말했다.
"절대로 태워 주지 않았지. 많은 친구들이 겨우 몇푼 뜯어 내자고 곤봉으로 뒷머리를 후려
치거든. 또 사고라도 나면 치료비를 물어 내라고 소송을 걸어 괴 롭히거든."
홈카를 사기 몇 달 전, 그러니까 아내를 땅에 묻고 나서 여섯달 쯤 되었을 때, 하루는 월트 존
스가 매력적으로 생긴 62세의 여성을 옆자리에 태우고 차를 몰고 지나가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누군가 그에게 말했다.
"월트씨?"
"왜 그러쇼?"
"옆자리에 태우고 가던 그 영성은 누굽니까? 당신의 새 여자 친구인가요?" 그 말에 월트 존
스가 대답했다.
"그렇소. 그런 여자요."
"그런 여자라니요?"
"새로 생긴 내 여자 친구란 말이오."
"여자 친구라구요? 월트, 당신은 세 번이나 결혼을 했고, 이제 나이가 104세 나 되었어요. 그
여자는 당신보다 마흔 살이나 젊어요." 월트 존스가 말했다.
"난 최근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소. 홈카에서 남자 혼자 생활할 수 없다는 것이오."
"물론 그 점은 충분히 이해해요. 월트.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곁에 동반자 가 있어 왔으니
누군가 이야기라도 나눌 상대가 그립겠지요." 그러자 월트 존스는 주저없이 말했다.
"난 거시기도 그립단 말이오."
"거시기라니요? 남녀간의 그것에 대해 말하는 건가요?" 월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요."
"월트."
"왜 그러쇼?"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시점에선 그것이 자연적으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거 아닐까요?"
월트 존스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섹스에 대해서 말하는 거요?"
"그래요."
월트는 다시 물었다.
"그건 왜 그렇소?"
상대방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런 종류의 육체적인 기운 소모는 나이 든 사람의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 으니까요."
월트 존스는 그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여자가 죽으면 죽으라지 뭐. 난들 어쩌겠소?" 1978년에 두 자리 숫자의 인플레가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월트는 콘도미니엄 개발에 거액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안전한 은행에 넣어 두
었던 돈을 꺼내 콘도 개발에 투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월트는 대답했다.
"당신은 듣지 못했소? 지금은 인플레 시기예요. 이럴 때는 부동산에 돈을 투 자해야만 이득
을 얻을 수 있고, 몇 년 지나 정말로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것이오."
1980년에 그는 워싱턴 주의 피어스 카운티에 있는 많은 부동산을 팔았다. 많 은 이들은 월트
가 드디어 죽을 때가 가까워 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월트는 친구 들을 불러 자기가 죽을 때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금이 필요해 부동산을 되판 것이 라고 설명했다.
"난 어떤 사업에 투자하기로 했는데 30년 계약을 맺었소. 앞으로 나는 138세 가 될 때까지
매달 4천달러의 배당금을 받게 될 것이오." 얼트 존스는 110세의 생일에 텔레비젼의 자니 카슨
쇼에 출연했다. 월트는 흰 수염에 검은 모자를 쓴 멋진 차림으로 무대 위로 걸어나왔다. 마치
얼마 전에 작고한 육군 대령 샌더스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자니 카슨이 말했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서 기쁨니다. 월트 씨."
월트 존스가 대답했다.
"110세가 되면 어디에 있으나 기쁘지요, 자니 씨." 자니 카슨이 놀라서 되물었다.
"110세라구료?"
"그렇소. 백하고도 열 살이오."
"1백10세라구요?"
그러자 월트 존스가 말했다.
"아니 왜 그러시오, 자니 씨? 그 나이에 벌써 귀가 먹은 거요? 그게 내 나이 란 말이오. 그게
뭐 놀랄 일이라고 그러시오?"
자니 카슨이 말했다.
"놀랄 일은 당시 나이가 내 나이의 두 배에서 꼭 사흘이 모자란다는 것입니 다."
그것은 정말 놀랄 만한 일이다. 백 살에다 열 살을 더 살았는데 아직도 푸른 젊음을 유지하
고 있고, 인간으로서 성장해 가고 있다면 말이다. 월트 존스는 시 청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자니 카슨을 향해 말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기의 생일을 잊어먹는 경향이 있소. 또한 해 마다 달력을 넘
기면서 한숨 짓곤 하지요. 달력의 날짜 때문에 절망에 빠지는 사 람들을 보시오. 그들은 이렇게
말하잖소. 오 하느님, 내가 벌써 서른 살이라니요! 청춘이 다 지나갔으니 난 정말 슬퍼요. 오 세
상에, 내가 벌써 마흔 살이라니! 직 장에선 벌써부터 날 밀어 내려고 관을 주문했어. 아, 난 이
제 쉰 살이 되었구나.
반 세기를 살았어. 사람들이 벌써 내게 거미줄 친 조화를 보내려고 하고 있어." 월트 존스는 자
니 카슨에게 말했다.
"자니 씨, 누가 당신더러 65세가 되면 죽는다고 말합니까? 75세가 넘었는데 도 젊었을 때보
다 훨씬 즐겁게 사는 친구들을 난 많이 알고 있소. 난 몇 해 전 콘도 개발에 약간 투자를 한
덕분에 105세가 되었을 때 젊었던 시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소. 내가 절망에 대한 정의
를 말해도 되겠소, 자니 씨?" "어서 말 해보세요, 월트 씨."
월트 존스가 말했다.
"자기의 생일을 잊어버리는 것이오."
월트 존스의 이 이야기가 우리 삶에 많은 성장과 깨우침을 주리라고 나는 믿 는다.
때로는 다른 시도를
다음 이야기를 처음으로 읽었을 무렵, 우리는 사람들에게 한두 해 안에 백만 달러 수준까지
수입을 극대화하는 노하우를 가르치기 위해 '백만 달러 토론 광 장' 세미나를 막 시작한 직후
였다.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우리는 참석자들이 성 공을 위해선 부드러운 시도보다는 강력히 밀
고 나가야 한다는 판에 박힌 생각에 걸려 있음을 알았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성공이 항상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 우리는 한 차원 높은 성
공을 위해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가 갖고 있는 관념의 틀, 상
투성의 감옥, 편리한 방식을 깰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캐나다 토론토애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밀크로프 호텔
의 한적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7월 하순, 정오가 막 지나서였다.
나는 몇 발짝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필사적인 생과 사의 소음을 듣고 있었다.
작은 파리 한 마리가 유리창 밖으로 나가기 위해 마지막 남은 기운을 맹렬히 유리창에 머리
를 부딪치고 있었다. 파리는 그것이 헛된 시도라는 걸 모르고 있 었다. 윙윙대는 날갯짓 소리는
파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식, 즉 더 열심히 밀 고 나가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말
해주고 있었다.
아무리 시도해도 파리는 유리창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맹렬한 노력은 파 리에게 생존의
희망을 전혀 안겨 주지 못했다. 오히려 정반대로, 노력하면 할수 록 파리는 더 깊은 덫에 걸려
들었다. 파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유리창을 뚫고 밖으로 나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약한 곤충은 목표 지점으로 나아가기 위해 목숨을 건 필사적인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파리는 날갯짓이 약해졌다. 파리는 얼마 안 가서 창틀에 떨어져 죽을 게 뻔했다.
그런데 열 발짝도 안 떨어진 곳에는 방문이 열려 있었다. 불과 10초만 날아가 도 이 작은 곤
충은 자신이 원하는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지금 하고 잇 는 헛된 노력의 일부분만 갖
고도 파리는 스스로 만든 덫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바로 곁에 있었다. 그것은 그토록 쉬운 일이었다.
왜 파리는 잠시 노력을 멈추고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지 않았을 까? 왜 반대편 방향을 한번이
라도 바라보지 않았을 까?
파리는 어떤 이유로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는 그 방식과 노력만이 성공을 보 장해 준다고 그
토록 단단히 믿게 되었을 까?
무슨 논리로 파리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런 방식을 고수하려고 하는 걸까? 말할 필요도 없
이 그런 방식은 파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불행하게도 그 것은 파리를 파멸로 몰아가는 생
각에 불과할 뿐이다.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반드시 성공의 열쇠는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이 삶에서
얻기 원하는 진정한 것들을 가져다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실 때로는 그 일방적인 것들을
가져다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실 때로는 그 일방 적인 노력 자체가 문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
기도 한다.
만일 당신이 전보다 더 열심히 분발해서 유리창을 깨고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희망에 집착한
다면 당신은 성공의 진정한 기회들을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프라이스 프리체트
어떤 답장
한 남자가 휴가를 떠나기로 한 미국 중서부 도시의 작은 호텔에 편지를 보냈 다.
저는 이번 휴가 때 저희집 개는 훈련이 잘 되었고, 절대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제가
밤에 그 개를 호텔방 안에서 데리고 갈수 있도록 부디 허락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호텔 주인으로부터 금방 답장이 왔다. 답장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 었다.
나는 이 호텔을 수년 동안 운영해 왔소. 그 동안 나는 수건이나 잠옷, 가운, 컵이나 심지어
벽에 걸린 그림까지 훔쳐가는 개를 한번도 본적이 없소.
한밤중에 술이 취해서 행패를 부리는 개를 쫓아내야 했던 적도 없소. 또 숙박 비를 내지 않고
몰래 달아나는 개를 본 적도 없소.
아무 걱정 하지 마시오. 당신의 개는 언제든지 우리 호텔에 대환영이오. 그리 고 당신의 개가
당신의 인품을 보증한다면, 당신 역시 우리 호텔에 환영이오.
칼 알브레히트 / 론 젠케
2. 어려움을 이겨내는 수프
장애물이란 당신이 목표 지점에서 눈을 돌릴 때 나타나는 것이다. 당신이 목 표에 눈을 고정
시키고 있다면 장애물이란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
장애물
유태인 집단 수용소에서 갇혀 있던 우리들 모두는 몇몇 사람들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들은 그 부자유 속에서도
수용소 막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위로하고, 자신들에게 배급된 마지막 빵 한 조각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놓았다.
그들은 숫자적으로는 많지 않았지만, 인간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을 순 있어도
한 가지만은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충분한 증거였다.
즉 인간의 마지막 자유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의 태도를 선택하는 것,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그것이다.
빅터 E. 프랭<인간의 의미 추구>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 미국의 유명한 영화배우 프레드 아스테어는 1933년에 첫번째 카메라 테스트 를 마친 뒤
MGM 영화사의 심사위원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심사평이 적힌 메 모지를 전달받았다. "연기
력이 형편없음! 게다가 약간 대머리임! 춤 솜씨도 수 준이하임!" 하지만 그 뒤 아스테어는 최
고의 명배우가 될 수 있었다. 아스테어 는 지금도 비벌리 힐즈에 있는 자기 집 벽난로 위에 그
메모지를 액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 한 축구 경기의 전문가가 축구 선수 빈스 롬바르디를 이렇게 평했다. "축 구에 대한 최소
한의 지식조차 없음. 한마디로 열의 부족." 하지만 빈스 롬바르 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
선수로 발돋움했다.
*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이런 판결을 받았다. "이자는 젊은 이들을 도덕적
으로 타락시키는 죄인이다." 그러나 오늘날 소크라테스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철학자로 평
가받고 있다.
* 피터 다니엘이 4학년이었을 때 담임교사인 미세스 필립스는 그에게 항상 말 했다. "넌 형편
없는 아이야. 넌 썩은 사과 같은 존재야. 넌 결코 어느 자리에도 오르지 못할 거야." 피터는
스물여섯 살이 될 때까지 글을 읽지도 못했고 쓰지 도 못했다. 어느날 한 친구가 그에게 밤을
꼬박 새우며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 가 되라(Think Grow Rich)> 라는 제목의 책을 읽어 주었
다. 그 결과 오늘날 피 터 다니엘은 그가 어렸을 때 불량배들과 싸움을 벌이곤 하던 길 모퉁이
의 모든 건물들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책을 썼다. <미세스 필립
스 당신이 틀렸소!>
* 루이사 메이 올코드는 한 때 집안 식구들로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든지 바느질 품팔이
를 하라고 종용받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작가의 길을 걸었으며, <작은 아씨
들(Little Women)>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 베토벤은 바이올린을 다루는 데 매우 서툴렀으며, 자신의 연주 기술을 개선 하기보다는 스
스로 작곡을 해서 연주하기를 더 좋아했다. 베토벤을 지도하던 음 악 선생은 그가 연주하는 것
을 듣고는 훌륭한 작곡가가 될 소질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 엔리코 카루소의 부모는 그에게 엔지니어가 되라고 강요했다. 또 그의 담임 선생은 그가
목소리가 안 좋기 때문에 노래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하 지만 엔리코 카루소는 얼마
안가서 전설적인 성악가의 위치에 올랐다.
*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은 의사가 되기를 포기했을 때 아버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
다. "넌 사냥이나 다니고 개와 쥐들을 쫓아다니는 일에나 쓸모 가 있는 녀석이다." 다윈은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버지뿐 아니라 나를 가르친 모든 교사들로부터 지능
이 보통 수준 이하인 평범한 소년으 로 평가받았다."
* 월트 디즈니는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신문사 편집장에게 해고를 당 했다. 또한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랜드를 세우기 전에 여러 차례 파산을 경험했 다.
* 토마스 에디슨의 선생들은 그가 너무 지능이 모자라서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다섯 살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으며, 여덟 살이 될 때 까지 글을 읽지
못했다. 그의 교사는 그를 "정신 발달이 늦고, 남들과 잘 어울 리지도 못하며, 어리석은 몽상
속에서 언제까지나 해매다닌다."라고 표현했다.
그는 마침내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으며 쮜리히 과학 기술 전문학교에 입학을 시 도했으나 거부당
했다.
* 루이 파스퇴르는 대학에서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으며, 특히 화학 과목에 선 22명중에서
15등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세계 최고의 화학자이며 세균학자 로 명성을 떨쳤다.
* 아이작 뉴톤은 초등학교 시절에 성적이 매우 형편없는 학생이었다.
* 조각가 로댕의 아버지는 언제나 "나는 바보천치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 곤 했다. 학교에
서는 가장 열등한 아이로 지목된 로댕은 미술학교에 입학하는데 세 번이나 실패했다. 로댕의
삼촌은 로댕을 교육시키는 일이 완전히 불가능하다 고 말하기 까지 했다.
* <전쟁과 평화>의 작가 레오 톨스토이는 대학생 시절에 성적 불량으로 퇴학 을 당했다. 그는
교수들로부터 "배울만한 실력도 없을 뿐더러 배우려는 의지조 차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 테네시 윌리암스는 워싱턴 대학의 연극제에서 자신의 희곡작품인 <나,바샤 (Me, Vasha)>가
뽑히지 않자 무척 화가 났다. 당시 그의 담당 교수였던 사람의 회상에 따르면, 윌리암스는 심
사위원들의 잘못된 심사와 무능력을 공공연히 비 난하고 다녔다. 그는 훗날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과 <뜨거운 양철지붕위의 고 양이> 등을 써서 미국 최고의 희곡 작가가 되었다.
* 울워스는 의류가게에서 일할 때 고용주로부터 고객에 대한 감각이 아주 형 편없다는 평을
듣곤 했다. 하지만 얼마 후에 그는 미국 의류업계의 제왕이 되었 다.
*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다섯 번이나 실패하고 파산한 끝에 마침내 성공을 이 룰 수 있었다.
* 야구왕 베이브 루스는 가장 위대한 운동 선수이자 홈런최다 기록을 세운 것 으로 유명하다.
반면에 그가 삼진아웃을 가장 많이 당한 세계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
지 않다.
* 윈스턴 처칠은 6학년 때 낙제를 했다. 그는 평생에 걸친 좌절과 패배를 경 험한 끝에 예순
두 살이 되어서 비로소 영국수상에 선출되었다. 그는 시니어 시 티즌(예순다섯 살 이상의 연금
생활자. 서양에서 흔히 노인을 가르킬 때 사용되 는 표현)이 되어서야 세상에 가장 중요한 공헌
들을 하기 시작했다.
* 높이 나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에 대한 리차드 바크의 대표작 <갈매기의 꿈>
은 열여덟 군데의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한 뒤 1970년에 맥밀란 출 판사에서 발간되었다. 1975년까
지 그 책은 미국에서만 7백만 부가 팔렸다.
* 리차드 후커는 7년의 세월이 걸려 소설 <매쉬(MASH)>를 완성했으나 스물 한 군데의 출판
사로부터 거절을 당한 뒤 간신히 모로우 사에서 출판할 수 있었 다. 그 작품은 인기 절정의 베
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영화로 제작되어 흥행에 대 성공을 거두었고, 텔레비전 시리즈물로도 방영
되어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올렸 다.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의 편지
존 코코란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글자만 보면 조롱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문 장 속의 글자들
은 그의 눈에만 들어오면 제 멋대로 자리 바꿈을 하고, 모음들은 그의 귓속을 통과하는 순간
소리의 의미를 상실했다.
때문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존 코코란은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완전히 다르다 는 걸 느끼면서
멍청히 앉아 있어야만 했다. 만일 누군가 그 어린 소년의 옆자 리에 앉아 어깨에 팡을 얹으면
서 "내가 도와 줄 테니 걱정하지 마."하고 말하 기만 했더라도 그의 인생이 크게 달라졌을 것
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실독증(글을 읽지 못하는 병)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 다. 실독증이란
문자나 숫자 등의 상징물들을 논리적으로 배열하는 기능을 가진 왼쪽 두뇌에 이상이 생겼을 때
찾아오는 병이다. 이 경우에는 아무리 문장을 읽 으려고 해도 실패로 끝나고 만다. 어린 존으로
선 이런 병을 남에게 설명할 능력 조차 없었다.
그 결과, 이학년이 되었을 때 존 코코란은 '벙어리 줄'에 앉아야만 했다.
삼학년이 되었을 때는 수녀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에게 대나무 자를 주고, 존 이 책 읽기와
글자 쓰기를 거부할 때마다 종아리를 때리도록 했다.
사학년이 되자 담임 선생님은 존 코코란에게 책읽기를 시키고는 1분이 넘도록 가만히 기다리
곤 했다. 그럴 때마다 존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쨌든 그는 그런 식으로다도 한 학년씩 진급을 했다. 존 코코란은 평생 동안 한 번도 낙제
를 한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될 무렵, 존 코코란은 학교 농구 팀에서 두각을 나타내 졸 업생 대표로 선
발되기까지 했다. 졸업식장에서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존에 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대학이라고? 대학에 간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존 코코란은
엘 파소에 있는 텍사스 대학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그 대학의 농 구 팀에서 활동할 계획이었
다. 존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적진을 향해 돌파했다.
대학 캠퍼스에서 존 코코란은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 묻곤 했다. 어느 교수가 논술 시험을
많이 내는가? 어느 교수가 사지선다형 시험을 내는가? 수업이 끝나 고 강의실 밖으로 나오면 존
은 다른 학생이 노트를 빌려 달라고 할까 봐 무의미 하게 휘갈겨 쓴 자신의 강의 토트를 그 자리
에서 찢어 버리곤 했다.
저녁에는 기숙사로 돌아와 룸메이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일부터 두꺼운 대학 교재를 펼쳐 들
고 오랫동안 앉아 있기도 했다. 밤에 지쳐서 잠자리에 누워도 존 코코란은 머릿속을 괴롭히는
생각들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만일 하나 님께서 학점을 얻도록 해 주신다면 30일 동
안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미사에 참 석하겠노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어쨌든 존 코코란은 학위를 따냈다. 그리고 약속대로 30일간 새벽 미사에 참 가했다. 이젠 뭘
할 것인가? 어쩌면 그는 이제 철저히 중독이 됐는지도 모를 일 이었다. 그가 마음 속으로 가장
불안하게 여기면서 또한 가장 원하는 것은 남에 게 인정받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
에 존은 1961년에 교사가 되었는 지도 모른다.
존 코코란은 캘리포니아에서 교편을 잡았다. 날마다 수업시간에 그는 학생들 에게 교과서를
읽도록 시켰다. 시험 문제도 구멍 뚫린 답안지 하나를 얹어 놓고 채점을 할 수 있도록 사지선
다형 문제만 냈다. 주말 아침이면 존 코코란 교사는 비참한 기분이 되어 몇 시간씩 침대에 누
워 있곤 했다.
그 무렵 존은 운명처럼 캐시를 만났다. A학점을 받는 학생이자 간호사였다.
물론 존처럼 나뭇잎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바위 같은 여자였다. 그녀와 결혼하 기 전인 1975년
의 어느 날 밤에 존은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고백할 것이 있소, 캐시. 난 글을 읽을 수가 없소." 그 말을 듣고 캐시는 믿으려
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학교 선생인데...'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마 글을 빨리 읽지 못한다
는 뜻이리라고 생각했다.
여러 해가 지나 존 코코란이 18개월 된 딸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지 못하 는 걸 보고서 캐
시는 비로소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캐시는 존에게 서 류들과 편지들을 읽어 주고 대
필을 해 주었다. 왜 자기한테 읽고 쓰는 법을 가 르쳐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는지 캐시는 이해
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존은 누군 가 자기를 가르칠 수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존은 스물여덟 살이 되자 2천5백 달러를 빌려 집을 한 채 더 샀다. 그러고는 그 집을 수리
해서 세를 놓았다. 그런 식으로 존은 여러 채의 집을 사서 세를 놓 았다. 사업이 점차 확장되어
마침내 비서와 변호사와 동업자까지 두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계사는 그에게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완벽했 다. 백만장자가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유리문에 적힌 '미시오'와 '당기시오 '를 구분하지 못해 매번 엉뚱
한 문에 부딪치고, 화장실에서는 어느 쪽이 신사 용인지 몰라 다른 사람이 들어가거나 나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누가 눈치챌 것인가?
1982년에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집들은 빈 채로 남아 있게 되었고, 투자 자들은 자금을
회수해 갔다. 배달된 서류봉투들 속에선 저당물을 경매에 부치거 나 소송을 걸겠다는 협박이 쏟
아져 나왔다.
매일 아침 눈만 뜨면 존 코코란은 대출금 납부 기한을 연기해 달라고 은행 직 원들에게 통사정
을 해야 했다. 건물에 세든 사람들에겐 떠나지 말고 좀더 있어 달라고 애원하고, 건물의 주주
들에게도 납득이 가도록 설명해야만 했다. 머지않 아 그들 모두가 자신을 심판대에 세워 놓고서
검은 옷을 입은 판사가 이렇게 선 언할 것만 같았다.
"진실을 말하시오. 존 코코란. 당신은 글을 읽을 수 없지 않소?" 마침내 1986년 가을. 마흔여
덟 살이 된 존 코코란은 자신이 지금까지 하지 않 은 두 가지 일을 결심했다.
그는 자기 집을 담보로 해서 건축에 필요한 마지막 융자를 얻었다. 그리고 그 는 칼스바드 시
립 도서관에 찾아가서 개인 교습 프로그램 담당을 맡은 여성에게 말했다.
"난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그러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존 코코란에게는 엘리노어 콘디트라는 예순다섯 살의 할머니가 소개되었다.
그녀는 무한한 참을성을 갖고 한 글자씩 발음을 하면서 존을 가르쳤다. 14개월 만에 그의 부
동산 개발회사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존 코코란은 이 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
다.
그 다음 단계는 고백을 하는 일이었다. 존 코코란은 샌디에고에 모인 2백 명 의 쟁쟁한 사업
가들 앞에서 자신이 글을 읽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고백했 다. 그 후 그는 <샌디에고 문
맹 퇴치 위원회>의 이사로 선출되어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존 코코란은 청중들에게 말하곤 했다.
"문맹은 노예 상태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면서 언제까지나 시간을 낭비할
순 없습니다. 글자를 아는 사람들에게 매달려 끝까지 배워야만 합니다."
존 코코란은 손에 잡히는 모든 책과 잡지들을 읽었다. 그리고 길을 지나가면 서도 간판에 적
힌 글들을 소리 내어 읽었다. 아내 캐시가 시끄럽다고 소리 지를 때까지.
그것은 노래하듯이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존 코코란은 편안히 잠을 이 룰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존 코코란은 마음 속에 떠오른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가 마지 막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남아 있었다. 그렇다. 그의 사무실에 있는 먼지 묻은 상 자 속에는 리본에 묶인 편지 한
묶음이 보관되어 있었다. 25년 전, 사랑하는 연 인 캐시로부터 받은 편지들이었다. 존 코코란은
이제 그 편지들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파멜라 트루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당신은 지금까지 수없이 실패해 왔다.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당신은 걸음마를 배울 때 수없이 넘어졌다.
처음으로 수영을 배울 때는 물을 너무 많이 먹어 익사할 뻔한 적도 있었다.
처음으로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을 때 공을 맞힐 수나 있었는가? 홈런을 가장 많이 친 사람들은
삼진 아웃을 가장 많이 당한 사람들이기도 하 다.
미국 최대의 쇼핑 센터 체인점 사장 R. H. 메이시는 뉴욕에서 가게가 성공할 때까지 일곱 번
이나 실패했다.
영국 소설가 존 크리시는 753번이나 출판 거절을 당한 끝에 564권의 책을 출 간했다.
야구왕 베이브 루스는 삼진 아웃을 1, 330번이나 당했지만 또한 714개의 홈런 을 쳤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시도해 보지도 않고 기회를 놓쳐 버리는 걸 두려워마라.
미국 유나이트 테크롤로지 회사가 <월 스트리트 저널>지에 발표한 메세지
링컨은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에게는 앞으로 나아갈 의무가 있다. 우리 모두는 노력할 의무가 있 으며, 나는 그
의무가 부르는 소리를 늘 듣곤 했다.
에이브라함 링컨
포기하지 않는 삶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마도 에이브라함 링컨일 것이다.
당신이 중단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굳이 다른 인물을 찾을 필요 가 없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링컨은 평생에 걸쳐 실패와 마주쳐야만 했다. 그는 무려 여덟 번
이나 선거에서 패배했으며, 두 번이나 사업에 실패했고, 신경쇠약증 으로 고통받았다.
링컨은 수없이 중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 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링컨은 승리자였으며,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링컨이 백악관에 도착할 때까지 걸어야 했던 험
난한 길을 여기에 간단히 소개한다.
1816년 그의 가족이 집을 잃고 길거리로 쫓겨났다. 그는 혼자 힘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만
했다.
1818년 그의 어머니 사망.
1831년 사업에 실패.
1832년 주 의회에 진출하려 했으나 선거에서 낙선.
1832년 직장을 잃고서 법률 학교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1833년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나, 연말에 완전히 파산. 이때 진 빚을 갚기
위해 17년 동안이나 일을 해야 했다.
1834년 다시 주 의회에 진출을 시도해 성공했다.
1834년 결혼을 하기로 했으나 약혼자가 갑자기 사망했다.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음.
1836년 극도의 신경쇠약증에 걸려 병원에 6개월 간 입원.
1838년 주 의회 대변인 선거에 출마했으나 패배.
1840년 정부통령 선거위원에 출마했으나 패배.
1843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패배.
1846년 또다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이번에는 성공했다. 워싱턴으로 간 그 는 좋은 일자리
를 구했다.
1848년 하원의원 재선거에 출마했으나 패배.
1849년 고향으로 돌아가 국유지 관리인이 되고자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 다.
1854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 패배.
1856년 소속 정당의 대의원 총회에서 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했으나 100표 차로 패배.
1858년 다시 상원의원에 출마, 또 패배.
1860년 미국 대통령에 선출되다.
내가 걷는 길은 험하고 미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미끄러져 길바닥 위 에 넘어지곤 했
다. 그러나 나는 곧 기운을 차리고는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길이 약간 미끄럽긴 해도 낭떠러지는 아니야."
에이브라함 링컨(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아들에게서 배운 교훈
내 아들 다니엘은 열네 살이 되면서부터 서핑(파도타기)에 미치기 시작했다.
학교가 시작되기 전이나 방과후면 다니엘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파도
타기 경계선 너머까지 헤엄쳐 가서는 키가 1미터에서 1미터 80센 티미터 안팎인 파도타기 친구
들과 도전을 벌이곤 했다 파도타기에 대한 다니엘 의 그런 열정은 어느 운명적인 오후에 시험을
당하게 되었다.
"댁의 아들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수상 구조원이 내 남편 마이크에게 전화를 걸어 알려 왔다.
남편이 놀라서 물었다.
"많이 다쳤습니까?"
구조원이 말했다, "많이 다쳤습니다 파도 꼭대기로 올라가다가 서핑 보드 끄트머리에 눈을
얻 어맞은 겁니다."
남편은 다니엘을 싣고 황급히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다니엘은 곧바로 성형외과로 옮
겨져, 눈가에서 콧등까지 무려 스물여섯 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을 받았다.
다니엘이 수술을 받고 있는 동안 나는 강연 일정을 마치고 비행기를 타고 집 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성형외과에서 나오자마자 남편은 다니엘을 태우고 곧 바로 공항으로 달려왔다.대합실
에서 나를 맞이한 남편은 다니엘이 차 안에서 기 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다니엘이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아마도 그날의 바다가 파도를 별로 보내 주지 않은 모양 이라고 난 생각
했다.
그러자 남편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다니엘이 사고를 당했소.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일 때문에 집을
비우고 여행을 다니는 엄마의 악몽이 현 실로 일어난 것만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어찌나 빨리 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던지 하이힐의 뒷굽이 부러져 버렸다.
나는 차문을 왈칵 열었다. 눈에 붕대를 감은 내 막내아들이 나를 향해 두 팔 을 벌리면서 울
음을 터뜨렸다.
"엄마! 엄마가 집에 돌아와서 정말 기뻐요."
나 역시 아들의 팔에 안겨 흐느껴 울었다. 구조원이 전화를 했을 때 그 자리 에 내가 없었던
것이 그토록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들이 나를 달랬다.
"괜찮아요, 엄마. 어쨌든 엄마는 파도타기의 세계를 모르시잖아요." "뭐라구?"
나는 아들의 엉뚱한 논리에 놀랐다.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전 괜찮을 거예요. 의사 선생님은 제가 8일 뒤면 다시 물속에 들어갈 수 있 다고 하셨어요.
"
이 아이가 정신이 어떻게 된 걸까? 난 그 아이에게 앞으로 서른다섯 살이 될 때까지는 다시
는 물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라고 소리 치려고 했다. 하지만 애 써 참고서, 이번 사건을 계기
로 내 아들이 파도타기에 대한 것을 영원히 잊어 주기를 기도했다.
그 다음 일주일 동안 아이는 다시 파도타기를 하러 갈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끝없이 내게 압
력을 가해 왔다. 백 번이 넘도록 강력하게 안 된다고 말을 하고 난 어느 날, 다니엘은 나를 꼼
짝 못 하게 만들었다.
"엄마, 엄마는 늘 우리에게 우리가 가장 원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잖아
요."
그러더니 다니엘은 내게 뇌물을 내밀었다. 랭스턴 휴즈의 시가 담긴 작은 액 자였다. 다니엘
은 그것이 '엄마를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샀노라고 말했다.
엄마가 아들에게 주는 글
아들아, 난 너에게 말하고 싶다.
삶은 나에게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다는 걸.
그 계단에는 못도 떨어져 있었고
가시도 있었다.
그리고 판자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났지.
바닥에는 양탄자도 깔려 있지 않았어.
전부 맨바닥이었다.
그러나 난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그 계단을 걸어올라왔다.
층계참에도 도달하고
모퉁이도 돌고
때로는 전깃불도 없는 캄캄한 곳까지 올라갔다.
그러니 아들아, 넌 돌아서지 말아라.
계단 위에 주저앉지 말아라.
왜냐하면 넌 그것이 다만
약간 힘든 것일 뿐이라고 알게 될 테니까.
지금 무너져 내리면 안 된다.
왜냐하면 얘야. 난 아직도 그 계단을 올라가고 있으니까.
난 아직도 오르고 있다.
그리고 삶은 나에게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지.
나는 완전히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 당시 다니엘은 서핑에 미친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지금 다니엘은 자기 삶 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어른이 되어 있다. 전세계 파도타기 프로 선수들 중에서 다니엘은 상위 25위 안에 올
라 있다.
나는 먼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청중들에게 역설하던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내 자신의 집안에
서 시험당한 셈이 되었다 그 중요한 원리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정열을 바치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다니엘르 케네디
실패라고? 천만에. 잠깐 멈춘 것뿐이야.
씨앗 속에 담겨 있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천재의 눈이다.
노자
캘리포니아에 있는 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방 한켠에 복고풍의 아름다 운 스페인제 타
일에다 아홉 개의 가죽 의자를 갖춘 소다수 판매대를 구경하게 될 것이다. 옛날에 흔히 약국
에 설치되어 있던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사무실에 그런 것을 설치했으니 의아하게 여길 것이
다. 하지만 그 가죽 의자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내가 인생에서 희망을 잃고 완전히 포기했
던 그날의 일을 들려 줄 것이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불경기 시절이었다. 일자리를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내 남편 카우보이 보브는 남에게서 빌린 돈으로 소규모의 드라 이 크리닝 사업을 인수했다. 우
리에게는 귀여운 두 아이와 연립주택 한 채, 자동 차 한 대, 그리고 다달이 내야 하는 할부금들
이 있었다. 그런데 보브의 사업이 무너졌다. 우리는 다른 건 둘째치고 집세를 낼 돈마저 없었다.
나는 특별한 재능도 없었고, 기술을 배운 적도 없었으며 대학 졸업장도 없었 다. 내 자신에
대해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득 오래 전 내게 작은 능력이 있
음을 일깨워 준 어떤 사람이 생각났다.
그분은 내가 다닌 알함브라 고등학교의 영어 선생님이셨다. 그 여선생님은 내 게 신문 편집에
관한 일을 맡기면서 나를 학교 신문의 광고부와 특집부 부장으 로 임명하셨다. 그러면서 내게
말씀하셨다.
"넌 이 일에 충분한 재능을 갖고 있다 자신감을 가져도 돼 ." 그 일이 기억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우리 지역에서 발행되는 주간 신문의 광고난 기사 작성을 내가 맡는다 면 집세 정도는
벌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차도 없었고. 아이 봐 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다 낡은 유모차 에 아이를 둘씩
이나 태우고 집을 나섰다. 아이들 등받이엔 큰 베개를 대 주었다.
걸핏하면 유모차 바퀴가 빠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신발굽으로 쳐서 도로 집어넣 었다. 나는 내
아이들을 내가 어렸을 때 종종 그랬던 것처럼 집없는 아이들로 만들진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그러나 신문사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내게 줄 일자리가 없었다. 어디 나 불경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만일 신문의 광고난 전체를 내가 도매 가격
으로 사서 다시 광고주들에게 소매 가격으로 팔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나는 생각해 냈다.
신문사측에선 그 자리에서 내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훗날 들은 얘기 지만, 그들은 마
음 속으로 내가 일주일도 못 가서 구닥다리 유모차를 끌고 힘들 게 시골길을 오가는 일을 포기
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들은 틀렸다.
신문 광고난 판매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집세를 낼 충분한 돈이 벌렸으며, 남 는 돈으로 카우
보이 보브가 골라 준 중고차도 한 대 구입했다. 그리고 오후 세 시에서 다섯시까지 아이들을
돌봐 줄 여고생도 한 명 구했다. 시계가 세시를 알 리면 나는 신문 견본을 움켜쥐고 약속 장소
로 부리나케 달려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날 오후, 신문을 펼쳐 든 나는 내가 계약해 놓은 광고들 이 하나도 실
려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광고주들이 일방적으로 신문사측에 해약을 해 버렸던 것이다. 이
유를 묻자 그들은 대답했다. 그 지역 상공회의소 회 장이며 렉솔 약국의 주인인 루벤 알만 씨가
내 광고난에 광고를 게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알만 씨의 약국은 그 도시에서 가장
사업이 잘 되는 곳이 었다. 그러니 다른 사업자들은 그의 판단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광고주들은 말했다.
"알만 회장이 당신의 광고난에 광고를 하지 않는 것은 그 광고난에 문제가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네 페이지의 광고가 우리집 집세와 관계가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한 번 더 알만 씨를 만나 얘기해 봐야지. 모두가 알만 씨를 좋아하고 존경 하니까 틀림없
이 내 청을 들어주실 거야.'
전에도 여러 번 그와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나를 만나 주려고 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 때마다 그는 항상 외출중이거나 전화를 받을 수 없 는 상태였다. 만일 그가 내 광고
난에 광고를 싣는다면 도시의 다른 상인들도 따 라서 싣게 되리라는 건 분명했다.
나는 이번에는 전화를 걸지 않고 직접 렉솔 약국으로 찾아갔다. 내가 약국 안 으로 들어갔을
때 루벤 알만 씨는 뒤켠의 조제실에서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었 다. 나는 최대한으로 멋진 미
소를 지으면서 내 아이들의 초록색 크레용으로 표 시한 소중한 나의 광고난을 펼쳐 들었다.
나는 알만 씨에게 말했다, "알만 회장님, 모두가 회장님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다른 상인들에
게 회장님 의 의견을 말해 줄 수 있도록 잠시 제가 하는 일에 대해 들어 주시겠어요?" 그 순간
그의 입술 양 끝이 아래로 일그러졌다. 그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강 력하게 고개를 저으며 매
우 부정적인 제스처로 거부 표시를 했다. 내 상처 입은 가슴이 또다시 철렁 하고 밑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아 마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갑자기 모든 의지가 내게서 빠져나갔다. 나는 가까스로 약국 옆에 있는 오래 된 소다수 판매
대 앞으로 걸어갔다. 도저히 집까지 차를 운전하고 갈 힘이 없었 다. 뭘 사 마시고 싶은 생각조
차 없었다. 하지만 공짜로 소다수 판대매 앞에 앉 아 있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가진 마지
막 10센트를 꺼내 체리 콜라를 주 문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절망적인 생각이 밀려왔다. 내가 어렸을 때 매번 그랬 던 것처럼 내
아이들도 이제 집 없는 아이들이 돼야만 하는가? 신문반 선생님의 판단이 틀리신 걸까? 어쩌면
그 여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착각이었는지 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어떤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가 앉아 있는 소다수 판매대 옆에서 말 을 건네 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떤 은발 머리의 노부인이 동정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
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 사정 이야기를 노부인에게 털어놓 았다 그런 다음 맨 마지막으
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존경하는 알만 씨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걸요."
그러자 노부인이 말했다.
"어디 나한테 그 광고난을 좀 보여 줘 봐요."
그녀는 표시가 된 신문 광고난을 손에 들고 세심하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 다. 다 읽고 난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약국 조제실을 향해 돌아서더니 길 저 편에서도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명령하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루벤 알만! 당신 이리 좀 와요?"
그 노부인이 바로 루벤 알만 씨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알만 씨가 다가오자 노부인은 당장 내 광고난에 광고를 게재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알만 씨의 입이 아까와는 반대 방향으로 올라가며 큰 미소를 지었다.
그 다음에 노부인은 나를 실망시킨 상인들 네 명의 이름을 물었다. 그녀는 직 접 전화기로
가서 그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나를 한 번 껴안아 주면서 그 사람들이 기다리
고 있으니 서둘러 가서 다시 광고 계약을 맺으라고 말했다.
루벤 알만 씨와 비비안 알만 노부부는 그 후 우리 가족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 으며, 물론 꾸준
한 광고 고객이 되어 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루벤 알만 씨는 누구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하는 호인이었다. 그래서 참다 못한 부인이 그 에게 더 이상 어떤 광고 계약도 하지 말라고
다짐을 받아 냈던 것이다. 알만 씨 가 그날 그런 식으로 나를 냉정하게 대한 것은 다만 아내
비비안 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만일 내가 그런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애초부터 알만 씨 부인과 대화 를 시도했을 것
이다. 소다수 판매대 앞에서의 그 만남은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내 광고 사업은 날로
번창해서 그 후 네 개의 사무실과 285명의 직원, 그리고 4천 군데가 넘는 광고주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훗날 알만 씨가 구식 약국을 현대식으로 바꾸고 소다수 판매대를 없앨 계획을 세웠을 때, 내
남편 보브가 그것을 샀다가 내 사무실 한켠에 멋지게 설치해 주 었다.
만일 당신이 이곳 캘리포니아에 온다면 나와 함께 그 소다수 판매대 의자에 앉아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체리 콜라를 대접하면서 결 코 포기하지 말 것을, 도움의
손길은 언제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말해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말할 것이다. 당신이 만일 중요한 인물과 대화할 수 없다면 더 많은 정보
를 찾으라고 그래서 다른 길을 시도해 보라고. 당신을 위해 대화를 시도해 줄 제삼자를 찾으라
고.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나는 당신에게 매리엇 호텔의 빌 매리엇이 말한 다음의 멋진 문장을 들
려 줄 것이다.
실패라고? 난 그런 걸 만난 적이 없다.
난 다만 잠간 멈췄던 것일 뿐이다.
도티 월터스
창조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기다린다 1. 뛰어난 영감
2. 주위 사람들의 허락
3. 누군가의 따뜻한 격려
4. 누군가 타다 주는 커피
5. 내 차례
6. 다른 사람이 잘 닦아 놓은 길
7. 몇 가지 규칙
8. 나를 변화시켜 줄 사람
9. 방해받지 않는 널찍한 길
10. 설욕의 기회
11. 뛰어넘기 쉬운 낮은 장해물
12. 더 많은 시간
13. 중요한 인간 관계의 개선, 또는 그 관계의 마무리, 또는 새로운 관계의 시 작
14. 내가 원하는 제대로 된 사람
15. 내게 새로운 기회를 안겨 줄 어떤 큰 천재지변
16. 적당한 시기
17. 나를 대신해 희생해 줄 사람
18. 자식들의 독립된 생활
19. 주가 지수 1500이상
20. 평화로운 분위기의 정착
21. 서로간의 동의
22. 더 나은 시기가 왔다는 판단
23. 점성학적으로 더 좋은 시점
24. 젊음의 회복
25. 사전 예측
26.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위치
27. 훌륭한 전직 대통령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기
28. 내 자유대로 행동할 수 있는 나이
29. 내일
30. 행운의 카드
31. 건강 종합 진단 결과
32. 좋은 친구들과의 만남
33. 더 튼튼한 방어벽
34. 다음 학기
35. 졸업 후
36. 소파를 갉아먹는 고양이의 버릇을 고치고 난 뒤 37. 위험 부담이 사라진 뒤
38. 옆집에서 짖어 대는 개가 동네를 떠나기만 하면 39. 삼촌이 군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40. 나를 발견하고 내 재능을 인정해 줄 사람
41. 더 적절한 대비책
42. 투자비의 하향 조정
43. 여러 쓸모없는 법 조항들의 철폐
44. 부모님이 돌아가시면(농담!)
45. 에이즈의 완전한 퇴치
46. 내가 이해할 수 없거나 인정할 수 없는 일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47. 전쟁의 완전한 종식
48. 옛 사랑과의 대화
49. 내 곁에서 나를 지켜봐 줄 사람
50. 분명한 지시 사항
51. 더 효과적인 산아 제한 방법
52. 남녀 평등 헌법 수정안의 통과
53. 가난, 불평등, 폭력, 사기, 무능력, 전염병, 범죄. 모욕적인 발언 등이 완전 히 사라질 때
54. 경쟁 상대의 특허권 취소
55. 어릴 적 애인이 돌아오기를
56. 부하 직원이 더 많은 경력을 쌓게 되었을 때
57. 내 아집이 좀더 사라지게 될 때
58. 기회가 무르익었다는 판단이 섰을 때
59. 새 신용카드의 발급
60. 피아노 조율
61. 이 만남이 끝난 뒤
62. 어음 결재
63. 실업 수당으로 받은 수표의 현금화
64. 봄
65. 세탁소에서 양복을 찾아오고 나서
66. 자신감 회복
67. 하늘로부터의 계시
68. 이혼한 아내와 자식들의 생활비를 더 이상 보내 줄 필요가 없게 될 때 69. 실패로 끝난 내
첫 번째 노력 속에 담긴 반짝이는 천재성을 누군가 인정 해 주고, 박수를 쳐 주고, 내가 안심하
고 두번째 시도를 할 수 있도록 든든히 보 상을 해 줄 때
70. 허리 통증과 위 아픈 곳이 사라질 때
71. 은행에서의 빠른 일처리
72. 바람이 선선해졌을 때
73. 내 아이들이 좀더 철이 들고, 부모 말에 복종하고, 스스로 제 할 일을 하 게 될 때
74. 다음 계절
75. 용기를 불어넣어 줄 어떤 사람
76. 논리적으로 합당하다는 판단
77. 다음 기회
78. 햇빛을 가리고 서 있는 사람이 비켜 줄 때
79. 내 배가 항구에 들어올 때
80. 더 마음에 드는 냄새 제거제
81. 학위 논문을 끝낸 뒤
82. 잘 써지는 펜
83. 외상값 지불
84. 가출한 아내의 귀가
85. 의사의 허락
86. 아버지의 승낙
87. 목사님의 축복
88. 법률 상담가가 오케이 싸인
89. 아침
90. 혼란스런 시기의 마감
91. 능숙한 장부 관리 기술
92.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93. 가격의 상승
94. 가격의 하락
95. 가격의 안정
96. 할아버지의 부동산 정리
97. 아들의 학교 졸업, 아들의 결혼, 아들의 첫 아이 출산 98. 어떤 암시
99. 당신이 먼저 시작할 때
창조적인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 는 사이에 어느
새 기회를 다 놓치고 늙어버리고 말았다.
데이빗 B. 캠벨
누구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과 전사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사도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의 도전으
로 받아들이지만, 평범한 사람은 모든 것을 행복이나 비극의 관점 에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돈 후앙(야키족 인디언 스승)
로저 크로포드는 테니스를 치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두 손 과 한쪽 다리는
제외하고는.
로저가 태어났을 때 부모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이는 오른쪽 손목 끝에서
곧바로 엄지손가락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었으며, 왼쪽 손목 끝에 도 엄지손가락과 또 하나의
손가락이 딱 들러붙은 채로 솟아나와 있었다.
아이는 손바닥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팔과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짧고, 안쪽으로 휘어진 오른발에는 발가락 이 세 개뿐이
었다. 왼쪽 다리마저 비정상적으로 가늘었다. 왼쪽 다리는 나중에 절단 수술을 해서 의족을 매
달게 되었다.
의사들에 따르면 로저 크로포드는 엑트로 닥틸리즘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있었 다. 미국에서 태
어나는 어린이 9만 명 중에서 한 명꼴로 나타나는 선천성 기형 이었다. 의사는 로저가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거나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최종 진단을 내렸다.
다행히 로저의 부모는 의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부모님은 언제나 가르쳤지요. 내가 생각하는 만큼만 난 장애자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로저 크로포드는 말한다.
"두 분은 내가 자신을 비관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장애자라 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셨지요. 한번은 내가 학 교 숙제를 매번 늦게 내는 것 때
문에 문제가 생겼던 적이 있습니다." 로저는 손바닥이 없었기 때문에 두 손목으로 연필을 잡
고 천천히 글씨를 쓸 수밖에 없었다.
"난 다른 학생들보다 이틀 정도만 숙제 제출 기간을 연장받을 수 있으면 하 고 바랐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부탁을 드려달라고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그러 자 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하시면
서, 오히려 선생님께 부탁드려 내가 다른 아이들 보다 이틀 먼저 숙제를 시작할 수 있게 하셨지
요."
로저의 아버지는 로저에게 항상 운동을 하도록 격려했다. 로저에게 배구공을 받고 던지는
법을 가르쳤으며, 방과후에는 동네에서 미식 축구를 하게 했다. 그 결과 열두 살에 로저는 학교
미식 축구 팀의 일원이 되었다.
경기가 시작될 때마다 로저는 자기가 터치 다운(미식 축구에서 자기 편으로부 터 받은 공을
자기 편 골 라인 바닥에 대는 것)을 해서 점수를 올리는 장면을 마음 속으로 상상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로저는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공이 자기의 두 팔 안으로 날아 오자, 로저는 의
족을 움직이며 있는 힘껏 골 라인을 향해 달려갔다. 감독과 팀 동료들은 열광적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10야드 라인을 앞두고 상대편 선 수가 달려들어 로저의 왼쪽 발목을 붙잡았다.
로저는 빠져나오기 위해 힘껏 의 족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빠져나오는 대신 의족이 다리에서 빠
져나가고 말았다.
"난 여전히 넘어지지 않고 서 있었지요."
로저는 그때를 회상하며 말한다.
"난 달리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에 그냥 한쪽 다리로 뜀뛰기를 해서 골 라 인을 향해 달려
갔습니다. 주심이 달려와서 하늘 높이 팔을 치켜들며 터치 다운 을 선언했지요. 내가 올린 6점
이라는 점수보다 더 보기 좋았던 것은 내 의족을 들고 황당해하며 서 있는 상대방 선수의 얼굴
표정이었습니다." 로저 크로포드는 스포츠에 대한 열의가 날이 갈수록 깊어졌으며, 자신감도 따
라서 커졌다. 그러나 의지력의 힘만으로 모든 장애물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점심 시간에 음식과 씨름을 하면서 밥을 먹는 모습을 다른 학생들에게 보이는 건 로저
에게 큰 고통이었다. 타자 수업 시간에 연거푸 실수 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로저는 말한다.
"난 타자 수업을 통해 매우 중요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습
니다. 따라서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에 정열을 쏟는 것 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난
배웠던 겁니다."
로저 크로포드가 할 수 있었던 한 가지는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힘껏 라켓을 휘두르면 손가락의 움켜쥐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그만 라켓 이 공중으로 날
아가곤 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로저는 운동구점에서 이상하게 생긴 테니스 라켓을 우연히 발
견했다. 그것은 두 겹으로 된 손잡이 사이에 손가 락을 끼워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라켓은 로저의 손에 딱 맞고 편안해서 스윙과 서브와 발리를 정상인처럼 할 수 있게 되었
다. 로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을 했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 아서 경기에 참가하기 시작했
다. 아니, 경기에 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저 크로포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경기에 경 기를 거듭했다.
왼쪽 손의 두 손가락을 수술해 특수 라켓을 더 잘 움켜쥘 수 있 게 되었고, 경기 내용도 크게
좋아졌다. 비록 그에게 모델이 되어 줄 만한 인물 은 없었지만 로저는 테니스에 열중했다. 그리
고 오래지 않아서 경기에 이기기 시작했다.
로저 크로포드는 대학 테니스 팀에서 활약해 경기 전적 22승 11패를 기록했 다. 훗날 그는
신체 장애자로선 최초로 미국 프로 테니스 협회에서 주는 테니스 교습 자격증을 수여받았다.
로저 크로포드는 현재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사람들에게 강연을 하고 있다.
강연 내용은 우리가 어떤 불리한 환경에 처해 있든 그 환경을 이겨 내는 길에 대한 것이다.
로저 크로포드는 말한다.
"당신과 나의 유일한 차이는 당신은 나의 장애를 볼 수 있지만 난 당신의 장 애를 볼 수 없다
는 것입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신체적이든 정신적 이든 어느 정도의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신체적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느냐고 불으면 나는 대답합니
다. 난 아무것도 극복한 것이 없다 고.
난 다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피아 노를 친다거나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일을 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내 온 마음과 영혼을
바쳤을 뿐입니다." 잭 캔필드
또 다른 인생
경험이란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다. 경험이란, 인간이 자신에 게 일어나는 일
을 갖고 무엇을 했는가를 의미한다.
올더스 헉슬리
만일 당신이 마흔여섯 살에 오토바이 사고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도 화 상을 입었으며,
다시 4년 뒤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면 어떻 게 하겠는가? 그런데도 당신은
백만장자가 되고, 유명한 연설가가 되고, 게다가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내고, 성공적인 사업가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신체를 갖 고 급류 뗏목타기를 하러 갈 수 있겠는가? 스카이 다이빙은?
정치 사무실 운영 은?
미첼은 이 모든 일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일까지 해낸 사람이다. 그는 두 차례 의 사고로 인해
누더기를 깁 듯이 얼굴에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으며, 손에는 손 가락이 없어졌고, 다리는 휄체어
에 묶인 채 가늘어져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 다.
신체의 65퍼센트 이상에 화상을 입은 오토바이 사고 때문에 포크도 사용할 수 없고, 전
화기의 다이얼도 돌릴 수가 없으며,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화장실도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해병대원이었던 미첼은 자신은 결코 어떤 상황에도 굴복하 지 않는다고 믿었다.
미첼은 말한다.
"나는 내가 조종하는 우주선의 선장이다. 우주선이 올라가도 내가 올라가는 것이고, 내려가
도 내가 내려가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하나의 좌절로 볼 수 도 있고, 하나의 전환점으로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 자신의 선택이 다."
여섯 달 뒤 미첼은 다시 경비행기를 타기 시작했다. 미첼은 콜로라도에 빅토 리아풍의 집과
약간의 토지, 경비행기 한 대와 스탠드바를 구입했다. 훗날 그는 두 명의 친구와 합작해 나무를
이용하는 난로 회사를 차려 버몬트에서 두 번째 로 큰 기업체로 발전시켰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지 4년이 지났을 때 미첼이 조종하던 경비행기가 이륙 도중에 추락했
다. 이 사고로 그는 갈비뼈 12개가 부러졌고, 하반신이 영구적으로 마비되었다.
"나는 도대체 나한테 왜 자꾸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어떤 악업을 쌓았길래 이러는 것인지 알고 싶기도 했다." 슬픔에 잠겨 있는 대신, 미첼은
가능한 한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밤낮으 로 노력했다. 그는 콜로라도 주의 크레스티드 뷰
트(뷰트는 평원의 고립된 산이나 언덕을 나태내는 지명)의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그곳의 아름다
움과 환경을 파괴 하려는 광산업자들로부터 도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미첼은 미 의회 진출을 시도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기이한 외모를 이 용해 다음과 같
은 선거 슬로건을 만들었다.
"예쁘장한 얼굴 또 뽑아 봐야 아무 소용 없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충격을 안겨 주는 얼굴 모습과 신체 조건을 갖추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미첼은 급류 뗏목타기를 시작했다. 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결 혼을 했고, 행정학과에서 학위를
땄으며, 경비행기 조종과 환경보호 운동과 대중 연설을 계속해 나갔다.
미첼의 이런 긍정적인 삶의 자세 때문에 그는 <투데이 쇼>와 <굿모닝 아메리 카>에 출연했으
며 <뉴욕 타임즈>, <타임>, <퍼레이드>지의 특집기사로 다루어 졌다.
"하반신 마비가 되기 전에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1만 가지였다." 미첼은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9천 가지가 있다. 나는 내가 잃어버린 1천 가지를 후
회하며 살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도 내게 가능한 9천 가지를 하 면서 살 수도 있다. 선택은 내
게 달려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인생에서 두 개의 큰 바윗돌을 만났다고 말하곤 한다.
그걸 핑계로 당신은 모든 걸 포기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평으
로 나아갈 수도 있다. 당신은 그 위에 올라가 더 멀리 바라보면서 '이것도 별것 아니군'하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을 잊지 마라.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당 신이 그것을 갖
고 무엇을 하는가이다.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세상에서 가장 오래 달리기
어린 나이였을 때 패티 월슨은 의사로부터 간질병 증세라는 진단을 받았다.
패티의 아버지 짐 윌슨은 아침마다 조깅을 했다. 하루는 치아 교정을 하느라 보 철 장치를 한
패티가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나도 날마다 아빠와 함께 달리기를 하고 싶어요. 하지만 달리기 도중 에 간질 발작이
일어날까 봐 겁이 나요."
패티의 아버지가 말했다.
"발작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조치를 취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달리기를 시작하자."
그래서 두 사람은 날마다 달리기를 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잊지 못할 아름다 운 경험이었으
며, 달리기 도중에 패티가 발작을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몇 주일이 지나서 패티가 아버지
에게 말했다.
"아빠,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여자 오래 달리기 세계 신기록을 세우는 일이에요."
패티의 아버지는 기네스북을 통해 여자가 가장 오래 달린 기록이 128킬로미터 라는 사실을 확
인했다. 당시 고등학교 신입생이던 패티는 이렇게 선언했다.
"난 오렌지 카운티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달리기를 할 거야."(약 640킬로미 터)
그녀는 또 말했다.
"2학년이 되면 오레곤 주의 포틀랜드까지 달리겠어."(2천4백킬로미터가 넘는 거리)
패티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 다음엔 세인트 루이스까지 달리기를 할 거야."(약 3천2백킬로미터) 패티의 계획은 더 커
졌다.
"그리고 졸업반이 되면 백악관까지 달리겠어."(4천8백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거리)
그녀가 가진 신체적 핸디켑을 생각할 때 패티는 열정도 컸고 욕심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간질병이라는 장애를 단순히 '불편한 것'을로 여겼다. 패티는 자신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 해에 패티는 '난 간질병이 좋아!'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샌프 란시스코까지
달렸으며,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 어머니와 간호사가 자동차를 타 고 뒤따랐다.
2학년 때는 패티의 같은 반 친구들이 뒤를 따랐다. 친구들은 '달려라, 패티, 달려!'라고 적
힌 큰 포스터를 들고 따라왔다(이 말은 그 후 그녀의 슬로건이 되었으며, 그녀가 쓴 책의 제
목이 되었다).
포트랜드로 향하는 이 두 번째 마라톤에서 패티는 한쪽 발목뼈가 부러지는 부 상을 입었다. 의
사는 그녀에게 달리기를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의사는 말했다.
"뼈에 치명적인 손상이 가지 않도록 네 발목을 기브스를 해야만 한다." 패티가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이해 못 하실 거예요. 이 달리기는 저의 일시적인 변덕이 아 니에요. 전 이
일에 인생의 전부를 걸고 있어요. 전 저 자신만을 위해 이 일응 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가둬 두고 있는 머릿속의 사슬을 끊어 버리기 위 해 하는 거예요. 제가 달리기를 계속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의사는 패티에게 한 가지 선택을 제안했다. 기브스를 하는 대신 발목
을 탄력 밴드로 단단히 감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참을 수 없을 정 도로
큰 고통을 안겨 줄것이라고 의사는 경고했다. 또한 발목이 부풀어오를 수 도 있다고 말했다.
패티는 의사에게 탄력 밴드를 요구했다.
패티는 마침내 포틀랜드까지의 달리기에 성공했다. 마지막 구간은 오레곤의 주지사가 함께
달렸다.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머릿기사가 실렸다.
'슈퍼 달리기 선수 패티 윌슨, 열여덟 번째 생일에 간질병 환자를 위한 마라 톤 완주!'
이듬해 넉 달 동안 미국 서부 해안에서 동부 해안으로 쉬지 않고 달린 패티 윌슨은 워싱톤
에 도착해서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눴다. 그녀는 대통령에게 말 했다.
"저의 희망은 사람들이 간질병 환자들도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정상적인 인 간이라는 사실을
알아 주기 바라는 것이에요."
나는 얼마 전 어떤 세미나에서 패티 윌슨의 이 일화를 참석자들에게 들려 준 적이 있다. 세
미나가 끝난 직후 한 남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다가왔다. 그는 큼지막한 손을 내밀어 악수
를 청하며 말했다.
"마크 씨, 내 이름은 짐 윌슨이오. 당신이 내 딸 패티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 군요."
그가 전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패티 월슨의 고귀한 노력의 결과로 간질병 환 자 센터 건립을
위해 미국 전역에서 1천9백만 달러의 기금이 모였다고 한다. 패 티 윌슨이 그토록 연약한 힘으
로 그토록 큰 일을 해냈는데, 완벽한 신체를 가진 당신이 무슨 일인들 못 하겠는가?
마크 빅터 한센
달리는 기쁨
작은 시골 학교가 있었다.
겨울철이면 그 학교는
항아리처럼 배가 불룩한 구식 석탄 난로에 불을 지펴 교실 난방을 해결했다.
날마다 한 어린 소년이 맨 먼저 등교해서
교사와 다른 학생들이 오기 전에 난로를 지펴
교실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아침, 교사와 학생들이 등교해서 보니
학교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불타는 교실 안에는
그 어린 소년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서둘러 소년을 밖으로 끌어냈다.
소년은 살아날 가망이 희박해 보였다.
하체 부위가 끔찍한 화상을 입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곧바로 소년을 근처의 시립 병원으로 옮겼다.
심한 화상을 입은 채 희미한 의식으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어린 소년은 의사가 엄마에게 하
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말했다.
불길이 소년의 하반신을 온통 망가뜨렸기 때문에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으 며, 어쩌면 이
상태에선 그것이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소년은 죽고 싶지 않았다.
꼭 살아나겠다고 소년은 굳게 마음을 먹었다.
아무튼 의사에게 큰 놀라움을 선사하며
소년은 죽지 않고 소생했다.
위험한 고비를 일단 넘겼을 때
소년은 또다시 의사가 엄마에게 하는 얘기를 들었다.
의사는 말했다.
하반신의 신경과 근육들이 화상으로 다 파괴되었기 때문에 소년을 위해선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나을 뻔했으며, 이제 하체 부위를 전혀 쓸 수 없으니
평생을 휠체어에서 불구자로 지내야만 한다고.
소년은 다시금 마음을 굳게 먹었다.
결코 불구자가 되지 않기로...
언젠가는 다시 정상적으로 걸으리라고 소년은 결심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허리 아래쪽에는
운동 신경이 하나도 살아남아 있지 않았다.
가느다란 두 다리가
힘없이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소년은 퇴원을 했다.
엄마가 날마다 소년의 다리에 마사지를 해 주었다.
아무 느낌, 아무 감각,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걷고야 말겠다는 소년의 의지는 전보다 더 강해졌다.
소년은 침대에 누워 있지 않으면
좁은 휄체어에 갇혀 지내야한 했다.
어느 햇빛이 맑은 날 아침, 엄마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해 주려고
소년을 휄체어에 태워 앞마당으로 나갔다.
소년은 엄마가 집 안으로 들어간 틈을 타 휄체어에서 몸을 던져 마당의 잔디 밭에 엎드렀다.
그러고는 다리를 잡아끌면서 두 팔의 힘으로 잔디밭을 가로질러 기어가기 시 작했다.
마당가에 세워진 흰색 담장까지 기어간 소년은
온 힘을 다해
담장의 말뚝을 붙들고 일어섰다.
그런 다음 말뚝에서 말뚝으로 담장을 따라
무감각한 다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꼭 다시 걷겠다는 소년의 강한 의지를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년은 날마다 그 일을 반복했다.
마침내는 담장 밑을 따라 잔디밭 위에 햐얀 길이 생겨날 정도였다.
자신의 두 다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만큼 중요한 것이 소년에게는 없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마사지와
소년의 강한 의지, 흔들림 없는 결심 덕분에
마침내 소년은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엔 더듬거리며 발을 옮겨 놓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은 다시 걸어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달려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소년은 달리는 것에서 오는 순수한 기쁨 때문에
끝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훗날 대학에 들어간 소년은 육상부에 소속되었다.
더 훗날, 한때는 살아날 가망성이 희박했으며
결코 걸을 수 없고
결코 뛰어다닐 희망이 없었던,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이 사람 글렌 커닝햄 박사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벌어진 1마일 달리기 경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달성하며 결승선을 통과
했다.
버트 더빈
긍정적인 생각의 힘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국의 대외 정책은 혼란에 빠졌다. 그 결과 전쟁 에 참가한 사람
들의 고통만 갈수록 커져 갔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제랄드 L.
커피 대위의 기적적인 일화가 꽃피어났다.
제랄드 대위는 전투기를 타고 가다가 1966년 2월 3일 중국 해 상공에서 총격 을 받고 추락했
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 후 7년 동안 그는 월맹군의 포로 가 되어 여러 곳의 포로 수용
소로 끌려 다녀야만 했다. 제랄드 대위뿐 아니라 다른 포로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운
동과 기도, 그리고 서로간의 끈질긴 대화의 힘 덕분이었다.
포로로 붙잡힌 뒤 제랄드 대위는 며칠 동안 베트남식의 모진 고문에 시달렸 다. 그리고 그
고문에 못 이겨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서명을 해 주고 말았다.
그런 다음 그는 홀로 감방에 내던져진 채 고통으로 몸부림 쳤다. 적에게 협조 했다는 죄책감
이 더욱더 그를 괴롭혔다. 이때까지도 그는 감옥의 다른 감방들 속에 미국인 죄수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6번 감방에 갇힌 팔 부러진 사람, 내 말 들리는가?" 목소리의 주인공은 로빈슨 리스너 대령
이었다. 그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말을 해도 안전하다. 하트 브레이크(고통) 호텔에 온 걸 환영한다." 제랄드 대위가 조심스럽
게 물었다.
"혹시 저의 조종사 보브 한센에 대해 무슨 소식이라도 들으셨나요?" 로빈슨 대령이 말했다.
"전혀 듣지 못했네, 대위. 그런데 자넨 벽을 두들겨서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만 하네. 그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믿을 만한 통신법이지." 로빈슨 대령은 '우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것은 그곳에 다른 사람들도 갇 혀 있다는 걸 의미하는 말이었다. 제랄드 대위는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제 전 다른 사람들 곁으로 돌아왔군요.' 로빈슨 대령이 물었다.
"저 자들이 자네를 고문하던가, 제랄드 대위?"
대위가 대답했다.
"네. 그리고 전 그들이 저한테서 뭔가를 알아냈을까 봐 무척 걱정이 됩니다.
"
로빈슨 대령이 말했다.
"잘 듣게. 일단 저들이 한 인간을 파괴시키려고 마음 먹으면 저들은 얼마든 지 그렇게 할
수 있네. 중요한 건 자네가 어떻게 하면 집으로 돌아가는가 하는 거야. 이곳의 계명을 따르도
록 하게. 자네의 능력을 다해서 최대한으로 저항하 게. 만일 저들이 자네를 파괴하려고 하면 파
괴되는 대로 그냥 내맡기고 있지 말 게. 입으로라도 자네의 상처를 핥고 다시 일어서는 거야.
알겠나?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게. 혼자 처져 있으면 안 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서 로가 서로를 돌봐 주는 일이지."
제랄드 대위는 사소한 규정 위반으로 여러 날씩 밧줄에 매달리는 고문을 당하 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옆방에 갇힌 친구가 벽을 두드려 그에게 '강하게 매달려 있으라.'고 말해 주고, 모두
가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노라고 전하곤 했다.
제랄드 대위는 말한다.
"그리고 그 친구가 고문을 당할 때는 내가 똑같은 위로의 메시지를 벽을 통 해 전했습니다.
"
마침내 제랄드 대위는 아내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사랑하는 제랄드
아름다운 봄이 왔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 모두는 당신이 그리워요. 아이들 은 잘 해내고 있
어요. 킴은 이제 호수 전체를 누비며 수상 스키를 타고 있구요.
사내아이들은 물 속으로 자맥질을 하고 있고, 어린 제랄드는 고무 튜브에 매달 려 물장구를 치
고 있어요.
제랄드 대위는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편지를 읽어 내려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아내의 편지를 접어 가슴에 대었다. 문득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린 제랄드라니? 제랄드가 누구지?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그가 포로로 붙잡히기 직전에 태어난 아이가 사내아이 였으며, 아내가
그 아이에게 제랄드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던 것이다. 아내로선 그 전에 보낸 편지들이 전혀 도
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새로 태어난 아들에 대해 당연한 듯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랄드 대위는 말한다.
"아내의 편지를 읽고서 난 많은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가족이 잘 지내고 있 음을 알고 안도
감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막내아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 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 니다."
아내의 편지는 이렇게 끝맺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리고 다른 더 많은 사람들도, 당신이 하루 빨리 무사히 돌아오 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몸조심하세요, 여보. 사랑해요.
수용소에 갇힌 포로들은 수많은 시간을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며 보냈다.
눈을 감으면 영화를 찍듯이 카메라가 집 안을 세세하게 비추었다. 그들은 그 카메라를 따라
자기 집의 방에서 방으로 돌아다니곤 했다. 병사들은 집으로 돌 아가면 어떤 기분일까를 수없
이 상상하곤 했다.
제랄드 대위가 견뎌 낼 수 있게 해 준 것은 그의 친구들과 그의 믿음이었다.
일요일이 되면 감방의 최고참이 벽을 두드려 신호를 보냈다. 일요 예배 시간을 알리는 것이었
다. 두 발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각자의 독방에서 일어나 함께 하는 모습으로 시편 23
장을 암송하곤 했다.
'주께서 내 적의 눈앞에서 내게 식탁을 준비해 주시고, 기름으로 내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제랄드 대위는 말한다.
"이 끔찍한 장소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잔이 넘치고 있음을 난 깨달 았습니다. 왜냐
하면 언제가 되든,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아름답고 자유로운 나 라로 돌아가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평화 협정이 조인되고, 1973년 2월 3일 포로가 된지 꼭 7년째 되는 날 에 제랄드 대위
는 두 명의 베트남 병사 앞으로 불려나갔다.
그들이 말했다.
"오늘 우리는 너의 소지품을 돌려 주겠다."
제랄드가 물었다.
"무슨 소지품을 말하는가?"
그들이 말했다.
"여기 있다."
제랄드는 침을 삼키며 그 베트남 병사가 엄지손가락과 집게 손가락 사이에 들 고 있는 걸 바라
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결혼 반지였다.
그렇다, 그것은 틀림없는 그의 것이었다. 제랄드는 그것을 자신의 손가락에 끼 었다. 조금 헐렁
해지긴 했지만, 의심할 바없이 자신의 반지였다. 제랄드는 그 반 지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다.
제랄드 대위는 말한다.
"내가 이 반지를 빼앗겼을 때 내 아이들은 열두 살과 열세 살이었습니다. 갑 자기 난 늙고
지친 내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7년 동안 나는 계속해서 중세의 토 굴 감옥에 갇혀 있었고, 내 팔
은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벌레들과 끊임 없이 씨름을 해야 했으며, 그밖의 것들은 신만
이 아십니다. 이제 나이를 먹고 많 이 변했을 내 아이들이 내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걸 반
길 것인가, 우리의 재결합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이 걱정스러웠습니다. 난 아내 베아트리체
에 대 해서도 생각 했습니다. 내가 아내에게 아무 이상이 없을까? 아내가 아직도 날 사랑할
까? 그녀가 이 긴 세월 동안 내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가를 그녀는 조 금이라도 알기나 할까?
하노이 공항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은 안개에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한 가 지만은 제랄드
대위에게 선명하게 보였다. 햇빛에 반짝이며 첫 번째 석방 포로 들을 싣고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C- 141 공군 수송기 꼬리에 그려진 미국 성조기였다.
수송기 옆에 서 있는 수십 명의 미군 병사들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
어 보였다. 그들이 두 줄로 늘어서자 베트남 병사가 그들의 이 름과 계급과 소속을 말했다.
"제랄드 L. 커피. 미 해군 중령."
포로로 갇혀 있는 동안 그는 두 계급 승진을 했던 것이다.
제랄드 중령은 앞으로 걸어가면서 빳빳하게 다린 파란색 공군 제복을 입은 미 국 대령을 쳐다
보았다.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보는 미군 군복이었다.
제랄드 중령은 대령에게 짧게 경례를 올렸다.
"중령 제랄드 L. 커피, 귀대를 보고합니다."
대령은 두 손을 내밀어 제랄드 중령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돌아온 걸 환영하네. 제랄드 중령."
탑승이 끝나자마자 조종사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비행기를 활주로 끝으로 몰고 갔다. 마
지막으로 엔진 점검이 끝난 뒤 마침내 비행기는 활주로를 향해 내 달렸다. 비행기가 이륙 하자
조종사의 목소리가 기내에 울려퍼졌다. 그것은 강하 고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신사 여러분, 탑승을 축하합니다. 우리는 이제 막 북부 베트남을 떠났습니 다."
그제야 포로들은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필리핀에 있는 클라크 공군 기지에 도착 했다. 군중들이
깃발을 흔들며 그들을 환영했다. 이 시간 미국인 전체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그들의 귀환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 자신은 알 턱이 없었다.
그들이 집으로 전화를 걸 수 있도록 특별 전화기가 설치되었다. 아내 베아트 리체와 아이들
이 기다리고 있는 플로리다의 샌포드로 전화기를 걸기 위해 기다 리는 몇 분 동안 제랄드 중령
은 자꾸만 입술이 탔다.
마침내 전화가 걸렸다.
"여보, 나야. 믿을 수 있겠어?"
아내가 대답했다.
"그럼요, 여보. 우리 모두 당신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 켜봤어요. 미국
인 전체가 당신을 봤을 거예요. 당신 정말 멋져 보였어요." "난 잘 모르겠어. 난 많이 말랐어.
하지만 병이 든 건 아니오. 다만 어서 빨 리 집에 가고 싶군."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제랄드는 아내와 아이들과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그 주 일요일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미사에 참석했다. 교구 신부의 환영 인사를 들은
뒤 제랄드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이 긍정주의자의 계 명에 대해 잘 요약해 준다고
난 생각한다.
"그 세월 동안 내 생존의 열쇠는 믿음이었습니다. 내 최선을 다해 의무를 마 치고 언젠가는
영광스럽게 집으로 돌아간다는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를 포함해 내 동료들에 대한 믿음, 때로는 절망에 차서 내가 의지하고
동시에 내게 의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 내 조국에 대한 믿음, 내 조국의 헌법에 대한 믿음,
우리의 국가적 목표에 대한 믿음... 그리고 물론 신 에 대한 믿음이 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끝없는 여 행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여행길을 걸으면서 모든 모퉁
이마다에서 배우고 성 장해야만 합니다. 때로는 장애물에 걸려 비틀거리지만, 항상 우리 안에 있
는 최 선의 것을 향해 걸어나가야 합니다."
데이빗 맥닐리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시
우리는 강한 종족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날 이 지구상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린 강한 종족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는 모든 사 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많은 것
들로 축복받았다.
뉴욕 시 이스트 34번가 400번지의 이스트 강 건너편에 있는 신체 장애자 회관 의 응접실 벽에
는 청동으로 된 명판에 적힌 글을 읽지 않았었다. 그곳에 적힌 글은 어느 무명의 병사가 쓴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마침내 휠체어를 돌려 세우고 그 글을 읽었다. 나는 그것 을 일고, 다시
한 번 읽었다. 두 번째로 읽기를 마쳤을 때 나는 눈물이 쏟아졌 다. 그것은 절망의 눈물이 아니
라, 나로 하여금 휠체어의 팔걸이를 꽉 움켜잡게 만드는 삶의 희망과 용기의 눈물이었다. 나는
그 글을 당신에게 들려 주고 싶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시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일에 성공할 수 있도 록.
그러나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허함을 배우도록.
나는 건강을 부탁했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허약함을 선물받았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는 부유함을 원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가난함을 받았다.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나는 힘을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열등함을 선물받았다. 신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모든 것을 갖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삶을 선물받았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들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받았다.
나는 하찮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로이 캄파넬라
나를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1989년 진도 8.2의 대지진이 아르메니아 지방을 덮쳐 불과 4분 만에 온 지역 을 폐허로 만들
고 3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극심한 파괴와 혼란의 와중에서, 아내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한 아버지는 아들이 공부하
고 있는 학교를 향해 달려갔다. 학교 건물은 샌드위치처럼 납작하 게 찌그러져 있었다.
그는 충격을 받아 실신할 것만 같았으나, 자기가 이전에 아들에게 한 약속이 생각났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아버지는 널 위해 달려갈 거야!' 그 약속을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졌
다. 폭삭 무너져 내린 학교 건물의 파편들 은 그에게 절망감만 안겨 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들과의 약속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침마다 아들을 데려다 주었던 교실의 위치를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 다. 분명 건물
뒤편의 오른쪽 모퉁이 지점이 아들이 배우는 교실이었다. 그는 그 곳으로 달려가 맨손으로 잡석
더미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가 정신없이 파편 조각들을 들어 내고 있을 때 슬픔에 젖은 다른 학부모들 이 도착했다. 그
들은 절망에 찬 목소리로 가슴을 치며 자식들의 이름을 불렀다.
이윽고 몇몇 부모들이 다가와 파편 더미로부터 그를 끌어 내며 말했다.
"너무 늦었어요!"
"아이들은 다 죽었다구요!"
"그래 봐야 아무 소용 없는 짓이에요!"
"어서 집으로 돌아갑시다!"
그들은 같은 처지에 놓인 그를 위로하려고 애를 썼다.
"자, 마음을 추스리고 상황을 받아들여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하다간 당신마저 다친다구요!"
그러나 그는 그 부모들에게 이 한 가지 부탁만 했다.
"나를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아들을 찾아 계속해서 돌들을 파내려 갔다. 소방대장이 달려와 그를
무너진 건물로부터 잡아 끌어내면서 소리쳤다.
"화재가 날지도 몰라요. 도처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러다간 당신까 지 위험해요. 우
리가 적절한 조치를 취할 테니 당신은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아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에 찬
이 아르메니아 아버지는 소방대장에게 부탁했 다.
"나를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경찰들이 몰려와서 말했다.
"당신의 마음이 괴로운 건 다 이해해요.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에요. 당신은 다른 사람들까
지도 위험에 몰아넣고 있어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우리가 대신 처리할 테니!"
그들에게도 그는 똑같은 부탁을 했다.
"나를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아무도 그를 도와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혼자서 작업을 계 속했다.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8시간 동안 그는 그렇게 혼자서 파편들을 파헤쳐 들어갔다. 12시간, 24시간, 36시간... 마침
내 28시간이 지나 그가 커다란 둥근 돌 하나를 들어 냈을 때 안에 서 아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
다. 그는 미친 듯이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망드!"
그러자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예요? 나 여기 있어요. 아빠! 내가 다른 아이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그 랬어요. 아빠가
살아 계시면 틀림없이 날 구하러 오실 것이고, 또 날 구하면 다 른 아이들도 구해 주실거라고
설명해 줬어요. 아빠가 나한테 약속했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아빠가 날 위해 달려올 거
라구요. 아빠는 정말 약속을 지켰어 요!"
아버지가 물었다.
"그 안에 누구누구가 있니? 다들 살았니?"
"33명 중에 14명만 살았어요. 아빠. 우린 무섭고, 배고프고, 목이 말라요. 아 빠가 와 주서
정말 고마워요. 건물벽이 서로 무너지면서 부딪쳤기 때문에 공간 이 생겨서 겨우 살아남은 거예
요."
"어서 이리 나와라, 얘야!"
"아니에요, 아빠! 다른 아이들부터 꺼내 줘요. 난 아빠가 날 꺼내 주리라는 걸 알고 있으
니까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아빠가 날 위해 달려오리라는 걸 난 알아요!"
마크 빅터 한센
219명의 생명을 구하다
베티 티스데일은 세계적인 영웅이다. 베트남 전쟁이 다시 가열되던 1975년 4 월, 베티는 거리
로 내쫓기게 될 4백 명의 고아들을 자기가 구해야만 한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미 전직
소아과 의사인 남편 패트릭 티스데일 대령과 함 께 다섯 명의 베트남 여아들을 입양한 상태였
다. 그녀와 재혼할 당시 남편에게 도 이미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 전인 1954년에 베트남에서 활약중인 미 해군 소속의 군의관 톰 둘리는 북 부 공산주의자들
로부터 난민들이 탈출하는것을 도왔다.
베티는 말한다.
"톰 둘리는 내게 살아 있는 성인으로 여겨졌지요. 그는 내 삶을 영원히 바꿔 놓았습니다."
톰 둘리의 저서를 읽은 베티는 휴가 때마다 14차례나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그 가 세운 병원과
고아원들을 방문하고 자원봉사를 했다. 사이공에 있는 동안 그 녀는 월남 여성 부티나이 부인이
운영하는 안락 고아원의 고아들과 사랑에 빠졌 다. 마담 부티 나이는 베트남이 공산 정권의 손
에 넘어가던 날 베티의 도움으로 탈출했으며, 훗날 조지아 주에 있는 베티의 집으로 와서 열
명의 자녀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안락 고아원의 고아 4백 명이 곤경에 처한 소식을 들은 베티는 즉각적인 행동 개시에 들어갔
다. 그녀는 나이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알겠어요! 내가 당장 가서 그 아이들을 전부 입양하겠어요." 그녀는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
능한가를 알고 있지 못했다. 다만 자기가 그렇 게 하리라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훗날 <안락의
아이들>이란 베트남 탈출 영화 에서는 셜리 존스가 베티역을 맡았다.
순식간에 베티 티스데일은 산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속도 위반 딱지까 지 받아 가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필요한 기금을 모았다. 그녀는 그저 그렇게 하 겠다고 결심했을 뿐이며, 또 그
렇게 했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그 아이들이 공산주의 치하가 아니라 좋은 가정에서 성장하기를 바랐 을 뿐이에요."
그것이 베티 티스데일을 움직인 동기였다. 그녀는 일요일에 미국 조지아 주의 포트 베닝을
떠나 화요일에 베트남의 사이공에 도착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모 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토요
일 아침 무렵 4백 명의 아이들을 사이공 밖으로 긴급 공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베트남 사회복지과 과장인 단 박사는 열 살 이하의 아 이들만 입양할
수 있으며, 그것도 아이들의 출생 증명서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못박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고아들이 출생 증명서를 갖고 있을 리 없다는 걸 베티 티스데일은 금방 직감했다.
베티는 당장에 병원의 소아과로 달려가 225장의 출생 증명서를 얻어 냈다. 그 리고 그 중 자
격이 있어 보이는 219명의 아이들에 대해 출생 날짜와 시간을 적 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한다.
"난 그 아이들이 언제 어느 장소에서 탈출시켜 자유로운 미래로 데려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이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이 아니면 영원히 불가능했다.
이제 베티 티스데일은 고아들을 탈출시킨 뒤에 임시로 묵게할 미국 내의 장소 가 필요했다. 조
지아 주 포트 베닝의 미군 부대는 난색을 표시했지만 베티는 포 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부대장과 전화 통화를 할 수 없었다. 마 침내 부대 참모관실로 연락했을 때 전화를 받
은 사람이 보 콜어웨이였다. 그는 아무리 긴박하고 중요한 구출 작전이라 해도 베티의 요청에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베티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까지 진행했는데 이제 와서 중단할 순 없는 일 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보 콜어웨이가 조지아 주 출신인 것을 알고는 그의 어머 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도와 달라고 매달렸다. 마침내 자정이 넘은 시각 에 그 참모관은 포트 베닝에 있는 한 학교를 안
락 고아원 고아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아이들을 베트남 밖으로 수송하는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다. 사이공에 도착했 을 때 베티는
그레이험 마틴 미국 대사를 찾아가서 아이들을 위한 수송 수단을 마련해 줄 것을 호소했다. 팬
암 항공사의 여객기를 전세내려고 시도했지만 런던 로이드 사에서 보험금을 올리는 바람에 현
재로선 협상이 불가능했다.
미국 대사는 베트남 정부에서 인정하는 서류들을 갖추기만 한다면 도움을 주 겠다고 동의했
다. 고아들이 두 대의 공군 비행기에 나눠서 올라타는 동안 베트 남 사회복지과 과장 단 박사
가 마지막 탑승자 명단에 서명을 했다.
고아들은 모두 영양실조 상태였으며 병에 걸려 있었다. 아이들 모두가 한 번 도 고아원 밖을
나와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잔뜩 겁을 먹었다. 베티는 병사 들과 ABC방송국 직원들을 소집
해 아이들을 치료하고, 수송하고, 음식을 먹이게 했다.
그 아름다운 토요일, 219명의 아이들이 자유를 향해 이송되는 순간 모든 자원 봉사자들의 가
슴에 감동이 물결쳤다. 봉사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자 유를 선물했다는 사실에 기쁨
의 눈물을 흘렸다.
필리핀에서 미국까지 가는 비행기 요금도 큰 문제였다. 유나이티드 항공사를 이용하는
데 2만 1천 달러가 들었다. 요금은 베티의 남편인 티스데일 박사가 댔다. 만일 시간이 더 있었
다면 베티는 고아들을 위한 무료 비행기표를 구했을 것이다. 그 러나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으
며,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아이들은 미국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모두 입양이 되었다. 특히 장애아들을 입양시키는 일
을 해 온 펜실베니아주 요크 시에 있는 트레슬러 루터 협회에서 아이들을 입양할 가정을 찾아
주었다.
베티 티스데일의 이 이야기는 당신이 삶에서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 안 된다'는 생
각을 버리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톰 둘리 박사가 말했듯이 '특별한 일을 하는 데는 평범한 사람이 필요한'것이 다.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단 한 번만 더
19세기에 쓰여진 어느 영국 소설의 웨일즈 지방의 작은 마을을 무대로 하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지난 5백 년 동안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매년 교회에 모 여 기도를 올려
왔다. 자정이 되기 직전에 그들은 촛불을 켜고 찬송가를 부르면 서 몇 킬로미터에 이르는 시골
마을길을 걸어 낡고 버려진 돌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을 재현했다. 구유까지 완벽하게 만든 뒤, 그들은 소
박하고 경건한 마음 속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들이 부 르는 찬송가가 차가운 12월의
공기를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걸을 수 있는 사람 이라면 모두가 매년 이 행사에 참여했다.
그 마을에는 하나의 신화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을 사 람 모두가 그곳
에 모여 완벽한 믿음으로 기도를 하면, 자정을 알리는 시각에 예 수의 재림이 이뤄진다는 전설
이었다. 단, 모두가 완벽한 믿음으로 기도를 해야만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난 5백 년 동안 그들은 한 해도 빠짐없이 그 황폐한 돌집으로 가서 기도를 올려 온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예수의 재림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한 주인공에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주님께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우리 마을에 오시리라는 걸 정말로 믿 습니까?"
그는 슬프게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난 믿지 않습니다."
"그럼 왜 당신은 해마다 그곳에 가십니까?"
그 주인공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만일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만 그곳에 없었던 유일한 사람이 되면 어 떻게 합니까?"
자, 그는 그 정도의 작은 믿음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믿음임에 는 틀림이 없다.
신약성서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겨자씨만한 믿음만 갖고 있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
특히 우리가 문제아들이나 방황하는 청소년, 알콜 중독자, 좌절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 천구나
배우자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일할 때는 더욱더 그런 작은 믿음 이 필요하다. 크리스마스 이브
에 그 사람을 해마다 빠짐없이 그 황폐한 돌무더 기로 다시 돌아가게 만든 작은 믿음 말이다.
그는 '이번 한 번만 더'하고 그곳으로 간 것이다. 이번에는 어쩌면 내가 해 낼지도 모른다
는 그 믿음을 그는 잃지 않았다.
때로 우리는 모두가 희망을 포기한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할때가 있다. 어쩌면 우리조차도 그
사람에 대해 아무런 변화나 성장의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 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우리가 아주 작은 희망의 조각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 놀라운
성과를 올릴 수 있다.
친구여, 이번 한 번만 다시 돌아가기 바란다.
하녹 맥카티
위대한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
세상에는 올림픽 우승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사실 모든 미 국인이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시도조차 해 보지 않는다.
내가 장대높이뛰기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그 몇 해 동안만 해도 미국에 서 약 5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나를 물리치고 우승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 한다. 최소한 5백만 명은 그것
이 가능했다. 그들은 나보다 강하고, 크고, 빠르니 까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들은 장대조차 잡아 보려고 하지 않았으며, 바를 넘기 위해 두 다리를 땅에서 들어 올리려는
작은 노력조차 한 적이 없다.
우리 주위 모든 곳에는 위대함이 있다.
당신이 위대한 인간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위대한 사람들이 기꺼이 당신 을 도울 테니까.
모임이나 세미나에 참석해 보라. 각 분야에서 대가가 된 사람들 이 나와서 자신들의 아이디어와
방법과 기술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갖기 위 해 정열을 쏟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만큼 아름
다운 일은 없다. 나는 가장 탁월 한 세일즈 맨들이 신참 세일즈 맨들을 앉혀 놓고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자신들 이 그런 위치에 오르게 되었는가를, 가슴을 열고 설명하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나는 세계 장대높이뛰기의 일인자 워머 담의 기록을 깨려고 노력하던 시절을 잊지 못한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가 가진 기록보다 약30센티미터 정도가 못 미쳤다. 그래서 어느날 나
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말했다.
"담, 날 좀 도와 줄 수 있겠나? 난 아무리 해도 안 돼. 더 높이 뛸 수가 없 어."
그러자 워머 담이 말했다.
"물론이지, 보브. 한번 시간을 내서 찾아오게. 내가 터득한 모든 기술을 자네 에게 가르쳐 주
겠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대높이뛰기 선수인 그 스승과 함께 나는 사흘을 보냈 다. 그 사흘 동
안 워머 담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게 전수했다. 내 자 세에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
었는데, 그가 그것들을 바로잡아 주었다. 결론만 이 야기한다면 나는 그의 도움으로 20센티미터
나 기록을 갱신할 수 있었다. 그 위 대한 친구는 정말로 자기가 가진 최고의 기술을 내게 가
르쳐 준 것이다. 모든 스포츠의 우승자들과 영웅들이 당신 또한 위대한 선수가 될 수 있도록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UCLA 대학의 농구 팀 코치인 존 우든은 날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돼 주겠 다는 철학을 갖
고 있다. 그것에 대한 보상이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그것은 그의 의무라는 것이다.
또 조지 알렌은 대학에서, 축구 경기의 수비 기술과 선수 스카우트에 대한 학 위 논문을 쓰면
서 미국 전역의 이름난 축구 코치들에게 30쪽에 달하는 설문서를 보냈다. 그 중 85퍼센트가 완
벽한 답변서를 보내 왔다.
위대한 사람들은 언제나 도울 자세가 되어 있다. 그 결과 조지 알렌은 세계에 서 가장 뛰어
난 축구 코치가 될 수 있었다. 위대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비결을 당신에게 말해 줄 것이다. 당
신이 그들을 찾으면 된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 가고, 그들의 주위에 머물면서, 그들과 대화
를 하라. 위대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당신 또한 위대해질 수 있다.
보브 리차드(올리픽 육상선수)
3. 지혜를 주는 스프
이 인생은 하나의 시험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시험일 뿐이다.
당신이 실제의 경험을 통해 더 많이 배웠더라면
당신을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더 많은 지시 사항을 받았을 것이다.
훌륭한 거래
열네 살이 되자 내 딸 마리타는 색 바랜 티셔츠에 너덜너덜한 청바지를 입고 다니기 시작했
다. 나는 미국의 경제 대공황기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옷가지를 살 돈이 없었지만,
그런 식의 형편없는 옷을 입은 적은 없었다.
하루는 마리타가 새로 산 청바지를 집 앞에 갖고 나가 돌멩이와 흙으로 문질 러 대고 있었
다. 방금 산 청바지가 망쳐지는 걸 보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딸아이에게로 달려가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쳤다. 내가 어린 시절에 얼마나 가난 하게 살았는가를 드라마 엮듯이 말하고 있
는데도 딸아이는 멈추지 않고 청바지 를 땅바닥에 문질렀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감동받을 줄
기대했건만 전혀 그 렇지 않았다.
왜 새로 산 바지를 망쳐 놓고 있느냐는 내 질문에 마리타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새 옷을 어떻게 입어요?"
난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왜 못 입는다는 거니?"
마리타가 말했다.
"어쨌든 입을 수가 없다구요. 그래서 낡은 옷처럼 보이게 하려고 더럽히고 있는 중이에요.
"
난 기가 막혔다.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새 옷을 망가뜨려서 입는 게 도대체 무슨 놈의 새로
운 스타일이란 말인가!
매일 아침 마리타가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설 때마다 나는 그 애를 처다보며 한숨 짓곤 했
다.
"내 딸이 저 모양이라니!"
마리타는 커다란 파란색 점과 줄무늬가 있는 제 아빠의 낡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청소부
에 어울리는 옷이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청바지라니! 너무 낮게 내려 입어서 숨을
깊이 들이쉬면 바지가 그냥 흘러내릴까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흘러내릴 염려는 없었다.
너무도 꽉 끼고 뻣뻣해서 벗기도 힘 든 바지였다. 땅바닥에 문질러 댄 덕분에 너덜너덜해진 바
지 끝은 걸을 때마다 실밥이 뒤에서 너덜거렸다.
하루는 마리타가 학교에 등교한 다음에 마치 어떤 계시처럼 이런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렸다.
"매일 아침 네가 마리타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넌 알고 있는가? ' 내 딸이 저 모
양이라니!' 날마다 넌 그렇게 말하고 있어. 네 딸아이가 학교에 가면 친구들과 모여서 언제나
잔소리만 늘어놓는 구식 엄마들에 대해 말하겠지.
그럼 네 딸아이도 너의 그 끊임없는 잔소리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을 거다. 중학 교에 다니는 다
른 아이들이 어떤 옷차림을 하고 있는지 넌 눈여겨본 적이 있는 가? 왜 한번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가?"
그날 오후 나는 차를 몰고 딸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다른 많은 여학생들이 더 형편없는 옷차
림을 하고 있는 걸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마리타에게 청바지를 망가뜨린 것에 대해 과 잉 반응을 보였
음을 사과했다. 난 한 가지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제부터 넌 네가 원하는 어떤 옷이든지 입고 학교에 가도 좋다. 난 그것에 대해선 앞으로
절대 잔소릴 하지 않겠다."
마리타가 말했다.
"무척 안심이 되는 말이군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나와 함께 교회에 가거나 엄마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 갈 때 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네 스스로 엄마가 원하는 방식대로 옷을 입어야 한다." 딸아이는 그 말에 대해 잠시 생
각하는 눈치였다. 내가 덧붙였다.
"이것은 95퍼센트는 네 방식대로 하고 단지 5퍼센트만 엄마 방식대로 하자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니?"
마리타는 눈을 반짝이더니 손을 내밀어 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좋아요, 엄마 훌륭한 타협안이에요."
그 다음부터 아침마다 나는 딸아이에게 행복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 다. 난 결코 그
애의 옷차림에 대해 잔소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함께 외출 할 때는 마리타는 군소리 없이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왔다. 훌륭한 거래가 이뤄 진 것이다!
플로렌스 니투아르
잠깐 멈춘 시간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장미꽃 향기를 맡아 보라'는 말을 듣는다. 그 러나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주 시간을 내어 우리 주위를 돌아보는
가? 너무나 바쁜 일정과 다음 약속들에 대한 생각.
그리고 교통 체증과 일상에 묶여서 살아가느라 우리는 가까이 있는 다른 사람들 조차 제대로 바
라볼 겨를이 없다.
세상을 이런 곳으로 만든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도 일 말의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캘리포니아의 복잡한 도로에서 차를 운전하고 갈 때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얼마 전 나는 내 자신이 주위의 더 큰 세상을 자각하지 못하고 나만의 작은 세계 속에
갇혀서 살아왔음을 일깨워 주는 한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사업상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가고 있던 중 이었다. 나는 평
소와 마찬가지로 마음 속으로 내가 해야 할 말들을 정리하고 있 었다. 내 차가 매우 복잡한 교
차로 지점에 이르렀을 때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 뀌었다.
나는 정지선에 차를 세우며 중얼거렸다.
'좋아. 다음 신호가 바뀌는 순간 다른 차들보다 먼저 출발해서 재빨리 추월 해 나가야지.'
내 마음과 차는 원격 조정 자동차처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잊지 못할 하나의 광경이 시야 속으로 들어와 내 집중력 을 흔들어 놓았
다.
둘 다 장님인 젊은 부부 가족이 손에 손을 잡고서 교차로 속으로 걸어 들어오 고 있었다. 그들
은 차들이 사방에서 붕붕거리고 있는 이 복잡한 교차로 속을 아 무것도 모른 채 더듬거리며 걸
어 들어왔다.
남자 장님은 어린 사내아이의 손을 붙잡고 있었고, 여자 장님은 멜빵에 멘 갓 난아기를 꽉 붙
들고 있었다. 둘 다 흰색 알루미늄 지팡이를 손에 들고서 교차로 를 가로지를 어떤 기준을 찾아
열심히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약간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누구나 가장 두려워하는, 앞 이 안 보이는 상
태를 잘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앞이 안 보인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하 고 말했다.
그 순간 그런 내 생각은 순식간에 공포로 바뀌었다. 맹인부부가 횡단보도를 벗어나 엉뚱한
대각선 방향으로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방향은 정확히 교차로 한복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차들이 맹렬하게 달려
오는 곳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다른 운전자들이 이런 상황을 모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겁에 질리지 않 을 수 없었다.
신호에 정지해 있는 차량들의 맨 앞줄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 일 어난 기적을 나
는 누구보다도 가장 잘 목격할 수 있었다. '모든 방향'에서 달 려오던 '모든 차'들이 일제
히 멈추었다. 브레이크를 급제동하는 소리나 빵빵 거리는 경적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어
서 저쪽으로 비켜!"하고 고함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 순간
에는 이 맹인 가족을 위해 시간이 완전히 정지해 버린 듯했다.
놀란 나는 다른 차에 타고 있는 운전자들도 모두 똑같은 광경을 보고 있는가 확인하려고 주
위를 둘러보았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 맹 인 부부에게 향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내 오른쪽에 있던 운전자가 반응을 보였다. 그는 차창 밖으로 몸을 내 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그러자 다른 운전자들도 다 같이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오른쪽!"
결코 허둥댐이 없이 맹인 부부는 운전자들의 코치를 받아 가며 방향을 수정했 다. 그들은 자신
들이 갖고 있는 흰색 지팡이와 여러 명의 세심한 시민들의 목소 리를 신뢰하며 무사히
건너편 도로에 도착했다. 그들이 인도에 올라서는 순간 또 다른 한 가지 사실이 내 마음을 쳤
다. 그때까지도 그 맹인 가족은 손에 손을 잡고 서로를 꼭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무감동한 표정이 오히려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었 다. 그러나 그 교차로에 정지
해 있던 모든 운전자들은 그들이 인도에 올라서는 순간에 일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내 오른쪽 자동차의 운전자가 말했다.
"휴유! 당신도 보았소?"
내 왼쪽에 있는 운전자도 말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군요!"
운전자들 모두가 방금 목격한 광경에 깊은 감동을 받은 표정이 역력했다. 어 려움에 처한 네
명의 인간들 돕기 위해 잠시 자신들의 세계 밖으로 걸어나온 아 름다운 인간 존재들이 그곳에는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나는 자주 그 광경을 떠올리곤 했으며, 그것으로부터 몇 가지 중요
한 교훈을 얻었다.
첫 번째 교훈을 이것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장미꽃 향기를 맡아 보라.'
그 일이 있기까지 나는 거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 잠시 시간을 내어 지금 이 순간
당신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정말로 바라보라. 그렇게 하면 당신은 오직 이 순간만이 존
재하는 것이고, 더 중요하게는 오직 이 순간 속에서 만 당신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얻은 두 번째 교훈은 이것이다.
아무리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일지라도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타인을 신뢰하 면 자신이 세운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맹인 부부의 목표는 단순히 도로 맞은편으로 안전하게 건너가는 일이었다.
그들의 장애물은 그들을 향해 질주해 오는 왕복 8차선상의 자동차들이었다. 하 지만 그들은 당
황하거나 의심함이 없이 목표 지점에 이를 때까지 앞을 향해 걸 어갔다.
우리 역시 우리의 목표 지점을 향해 앞으로 걸어갈 때 장님들처럼 우리 앞에 어떤 장애물이
놓여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직관을 신뢰하 고, 더 넓은 시야를 가진 타인
의 안내를 신뢰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정상적인 눈을 선물 받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나는 너무나 자주 그런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다. 만일 눈이 보이지 않 는다면 당신의
삶이 얼마나 다를지 상상해 봤는가? 잠시 상상해 보라.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복잡한 건
널목을 건너가는 자신의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자 주 우리가 삶에서 누리고 있는 기적 같은 선
물들의 고마움을 잊어버리는가.
그날 그 교차로를 통과하고 나서, 나는 그 교차로를 통과하기 이전보다 삶에 대해 더 많이
깨어 있게 되었고, 타인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나날의 생활에서
정말로 삶을 바라보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신이 내게 주신, 덜 행복한 사람들을 돕는 재
능을 더 많이 쓰기로 결심했다.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한번 이렇게 해 보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정으로 바 라보라. 잠시 시
간을 내어, 지금 이 순간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 는 일들을 바라보라. 당신은 아
름다운 어떤 것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 른다.
마이클 토마스
두 명의 수도승
두 수도승이 순례길을 가다가 강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이 강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성이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은 채 서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강을 건너자니 두렵기도 하고, 옷을 벗고 건널 수도 없어서 그 렇게 서성거리
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한 수도승이 그녀를 업고 건너편 강둑까지 데려다 주었 다.
강둑에 여성을 내려놓고 두 수도승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다
른 수도승이 비난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오. 그것은 계율을 어기 는 행동이오. 어
떻게 수도승의 몸으로 그런 불륜스런 행동을 할 수 있소?" 여성을 업어 강을 건너다 준 수도승
을 말없이 듣고 있다가 마침내 동료 수도 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난 그 여성을 한 시간 전에 강둑에 내려놓았소. 그런데 왜 형제는 아직도 그녀를 등에
업고 있소?"
엄가른트 쉴뢰글 <선승들의 지혜>에서
우리가 잊어버린 신의 모습
남동생이 태어나자 어린 딸아이는 갓난아기와 단둘이 있게 해 달라고 부모를 조르기 시작했
다. 부모는 다섯 살짜리 딸이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시샘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래서 딸아이가 갓난아기를 때리거나 꼬집을까 염려 스러워 딸아이의 부탁을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딸아이는 시샘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언제나 아기를 부드럽고 따뜻 하게 대해 주었
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동생과 단둘이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더 자주 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부모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서 딸아이의 청을 들어 주었다.
딸아이는 기쁨에 겨운 얼굴로 갓난아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부모는 호기심에 차서 문 틈으
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귀를 기울였다.
딸아이는 갓 태어난 남동생에게로 다가가더니 얼굴을 가까이 대고 조용히 묻 는 것이었다.
"아가야,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 주겠니? 난 벌써 잊어버렸거든." 당신은 혹시 신이 어
떻게 생겼는지, 어떤 느낌인지 기억하고 있는가? 아니면 벌써 잊어버렸는가?
딘 밀맨
돌고래의 설문
나는 수심 12미터가 넘는 바닷속에 혼자 들어가 있었다. 혼자서 그렇게 바닷 속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정도 실력이 있다고 자신 했기 때문에 한번 시도를 해
본 것이다.
물살의 흐름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물 속은 투명하고 따뜻했으며, 무엇보다 아름다운 바닷
속 풍경이 나를 매혹시켰다. 나는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이리저리 바다 밑을 탐색하고 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복부에 쥐가 나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 는가를 깨달았
다. 그렇다고 겁을 먹을 정도로 놀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복부의 심한 경련 때문에 몸을 똑바
로 펼 수가 없었다. 몸이 브이자처럼 완전히 굽혀졌 다.
일단 몸에 매단 무거운 잠수용 벨트를 벗어 버리려고 해 봤으나, 몸이 너무 심하게 굽혀져
서 그곳까지 손이 닿지도 않았다.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나는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차츰 두려움이 밀려
오기 시작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조금 후면 산소
탱크의 공기가 바닥나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배를 문질러 보려고 필사적으로 시도했다. 그러나 손을 뻗어 쥐가 난 복 부 근육을 문지
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잠수복을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는데도 마음대로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난 이렇게 죽을 수 없어! 난 아직 할 일이 많단 말야!" 이런 식으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처구니없이 생을 마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시 마음 곳으로 소리쳤다.
"누구든지, 혹은 무엇이든지 와서 날 좀 도와 줘요!" 내가 미처 어떤 준비도 갖추기 전이었
다. 갑자기 무엇인가 내 뒤쪽으로 다가 와 겨드랑이 사이를 푹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소리
쳤다.
"아, 안 돼! 상어가 왔어!"
나는 말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 다. 그것은 나를
해치는 대신에 강한 힘으로 내 겨드랑이를 떠받쳐 물 위쪽으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내 시야
속에는 커다란 눈동자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내가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는 가장 불가사의한
눈이었다.
단언하건대, 그때 그 눈은 분명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커다 란 돌고래의 한
쪽 눈이었다. 그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안전하다는 것을 직 감했다.
돌고래는 내 겨드랑이 사이에 자기의 등을 집어넣고서 나는 위쪽으로 힘껏 들 어올리기 시작했
다. 나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긴장을 풀고 한쪽 팔로 돌고래를 껴안았다. 그 동물이 나를 안전
하게 이동시켜 주고 있음이 느껴졌다.
돌고래는 그런 식을 물 위쪽으로 나를 데려다 주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나 를 치료해 주고
있었다. 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면을 향해 이동하는 동안 복부의 경련이 사라졌으며 몸
점체가 더없이 편안해졌다. 돌고래가 나를 치료한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다가왔다.
수면에 떠오르고 난 다음, 돌고래는 계속해서 나를 해안까지 데리고 갔다. 물 이 아주 얕은 곳
까지 왔기 때문에 나는 이러다가 돌고래가 해변 위로 올라가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부드럽게 돌고래를 떠다밀어 약간 깊은 곳 으로 가게 했다. 돌고래는 그곳에 멈춰 서서 나
는 쳐다보며 기다렸다. 내가 과연 안전한지 지켜보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다른 인생처럼 느껴졌다. 나는 얼른 해변에다 무게 벨트와 산소 탱 크를 벗어 놓
았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다시 바닷속 돌고래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너무나 가볍고, 자유롭고,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 모든 자유 속에서, 물 과 태양 속에서,
마음껏 뛰놀고 싶어졌다. 돌고래는 나를 다시 물 밖으로 밀어 내기도 하고 내 주위를 돌아다
니고도 하면서 나와 함께 장난을 쳤다. 그 순간 나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많은 돌고래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차렸 다.
얼마 후 돌고래는 다시금 나를 해변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너무 지쳐서 금 방이라도 넘어
질 것만 같았다. 돌고래는 내 안전을 위해 가장 얕은 물까지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런 다음 몸을
돌려 한쪽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런식으로 서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시간이 내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어쩌면 시간이 아예 사라져 버린 순간인지도 몰랐다. 그 순간에 는 내가 마치 다른 현실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아득히 먼 과거의 무수한 상 념들이 내 마음을 통해 밀려오는 것이었다.
이윽고 돌고래는 특유의 소리를 한 번 보내고는 다른 돌고래들에게로 돌아갔 다. 그리고 그들
모두 먼 바다로 사라져 갔다.
엘리자베스 가웨인
나 자신을 위한 그네 타기
내겐 어린 조카들이 있었다. 나는 가끔씩 그 애들을 데리고 놀이터로 가서 그 네를 태워 주곤
했다.
한번은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나 자신이 그네에 올라탄적이 있었다. 천천 히 그네를 구르
면서 난 약간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된 내가 애들처럼 그네를 타고 있다니!
하지만 몸에 반동을 실어 점점 더 높이 올라갈수록 짜릿한 흥분감이 느껴졌 다. 난 하늘 높
이 치솟아올랐다. 내 밑에서 땅바닥이 휙 하고 다가왔다가, 완벽 한 반원을 그리며 다시 공중으
로 치솟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소리가 질러졌다.
난 그네 위에 올라서서도 타 보았고, 거꾸로 매달려서도 타보았다. 공중으로의 비상이 가져다
주는 놀라운 환희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그네를 타기엔 너무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한 이래 꿈 속에서만 체험하던 그런 흥분감을 그날
나는 오랜만에 실제로 맛 볼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놀이터의 즐거움을 체험하기 위해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갈 필요가 없어졌다. 난
오랫동안 잊고 잇던, 나 자신을 위한 그네 타기를 새롭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바라 니콜스
배우기 위한 인내
한 청년이 어려서부터 보석 감정사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마침내 학교 를 졸업한 그는
유명한 보석 감정사를 찾아가 기술을 가르쳐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늙은 보석 감정사는 고개를 저었다. 보석 감정 기술을 배우는 데 가장 필수적인 것은
끈기와 인내심인데, 젊은 사람들에겐 그런 것이 부족하다는 것이 었다.
청년은 한 번만이라도 기회를 달라고 매달렸다. 어려서부터의 꿈이었기 때문 에 자신은 충분
한 소질과 열정을 갖고 있다고 보석 감정사를 설득했다.
마침내 보석 감정사는 청년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여기로 오게."
다음 날 아침 청년이 찾아가자 보석 감정사는 의자를 내주며 그곳에 앉으라고 말했다. 그러고
는 손바닥에 작은 보석 하나를 쥐어 주면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지시했다.
청년이 앉아 있는 동안 보석 감정사는 보석들의 무게를 달고 자르고 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계속했다. 청년은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가 다 흘러갔다.
다음 날 아침에도 보석 감정사는 청년의 손에 어제의 보석을 쥐어 주고는 의 자에 앉으라고
지시했다. 셋째 날도, 넷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뭔가 가르 쳐 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아침
에 출근을 하면 또다시 똑같은 지시를 내릴 뿐이 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청년은 보석을 손에 움켜쥐고 앉긴 했지만 더 이상 침묵 할 수만은 없었
다.
그래서 청년은 보석감정사에게 물었다.
"스승님, 전 언제부터 배우게 됩니까?"
보석 감정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곧 배우게 될 거야."
그러고는 더 이상의 말이 없이 자신의 일만 계속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열흘 이 지났을 때
청년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고용하기 싫으면 싫다고 할 일이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건 옳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날 아침 보석 감정사가 똑같은 보석을 쥐어 주면서 의자에 앉으라고 지시했을 때,
청년은 그것을 집어던지며 이렇게 외치려고 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날 골탕 먹일 셈인가요?'
그런데 청년은 보석을 집어던지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 다.
"이건 어제까지의 그 보석이 아니잖아요!"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이제야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군."
작자 미상
이 책을 만든 이들에 대해
<뉴욕 타임즈> 190주 연속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전세계 27개국 에서도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오른 '닭고기 수프' 시리즈를 엮은 잭 캔필드와 마크 빅터 한센은 미국을 대표
하는 카운셀러이고 세미나 강사이다.
'미국 경영자 협회','AT & T','선키스트 오렌지 회사' 등 미국의 유명 회사들을 상대
로 매년 정기 강연을 하고 있으며, <굿모닝 아메리카>,
로에도 고정 출연하고 있다.
'닭고기 수프' 시리즈를 계속 엮어 가고 있는 두 사람은 독자들도 이 아름 다운 일에 참여
하기를 바라고 있다. 한국의 독자에게도 이 아름다운 일에 참여 하기를 바라고 잇다. 한국의 독
자에게도 자신이 경험했거나 잡지와 회보 등에서 읽은 감동적인 일화와 시, 금언 등을 보내
줄 것을 그들은 정식으로 요청해 왔 다. 그 글들을 모아 아름다움과 희망으로 채워진 다음번
책을 그들은 최선을 다 해 만들 것이다. 한국의 독자들은 다음의 주소로 보내 주시면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의 두 저자에게 보내지게 될 것이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2가 4번지 아남 APT 101동 1305호 류시화
책을 번역하고 나서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쯤에 만들었던 책을
편집과 장정을 다시 꾸며 새로 내는 것입니다.
표지는 새롭게 디자인했고, 번역도 많은 부분을 다시 했습니다.
글의 순서와 주제별 묶음을 처음과 달리
원서에 더 충실히 따랐으며, 편집도 새로운 사람이 맡았습니다.
하지만 역자와 발행인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책을 소중하게 만들고자 하는 그 마음도
변하지 않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다시 만든 이 책이 당신에게
더 많은 성장과
여름날의 해바라기 같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의미를 주는 그런 책이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3년 전, 미국 여행중에 처음 이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은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 한 사람이 감동을 받은 책이라면
적어도 천 명의 독자는 비슷한 감동을 받을 것이다.' 그 천 명의 독자를 위해 이 책의 시리즈
들을
한 권씩 번역해 나갔습니다.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이 <내 영혼의 닭고기 수프>이고, 두 번째 책이 <마음을 열어 주는 101
가지 이야기>입니다.
천 명의 감동이 만 명으로 전파되고, 이제는 한국에서도 어느덧 백만 명이 넘는 독자가
이 시리즈의 책들을 읽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전 아직도 그 천 명의 독자를 소중히 여깁니다.
배움, 경험, 성장, 그리고 가슴 뛰는 삶을
우리는 추구하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하는가를
이 책은 부드럽게, 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갖고
우리 귀에 속삭입니다.
우리 모두는 유한한 존재이고
언젠가는 작별의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나야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이 책은 말합니다.
사랑을 표현하고, 삶을 경험하고, 상상 속의 고통보다는 현실 속의 고통을 더 많이 체험하라고.
또 하루에 최소한 한 번씩은 껴안으라고.
이 책을 두 팔에 껴안고 다니듯이
당신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두 팔로 껴안기를 바라며 새로 쓰는 옮긴이의 말을 마칩니다.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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