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0일 목요일

현대 한국의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



글쓴이 : 날짜 : 08-04-29 18:11 조회 : 677
현대 한국의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





"군인으로서 김영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최고의 군인이다." -존 코백 미 육군 예비역중령

25일 MBC 스페셜이 ‘영웅, 김영욱 대령’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한국계 미국인 전쟁영웅의 삶을 재조명해 관심을 모았다.

방송에 따르면 김영옥(86) 씨는 2차대전에서 이탈리아 최고십자무공훈장, 프랑스 최고훈장, 등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또한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해 불패의 신화를 쌓아 미국 은성, 동성 훈장을 받으며 전설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1919년 미국 이민 1세대의 아들로 태어난 김 씨는 1941년 군대에 입대했다. 당시 아시아인은 차별이 심해 미군에 입대할 수 없었지만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법이 바뀌어 군 입대가 허용됐다. 김 씨는 이듬해 아시아인으로 유일하게 장교 후보생이 됐다.

그는 초급 장교가 됐지만 인종 차별 때문에 전투에는 참전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바로 일본계 미국인들을 지휘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 것.

당시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은 자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소개해 수용소에 감금했다. 그들 중 일부 일본인들을 모아 442연대 100대대를 창설한 것이다. 김 씨는 100대대 2중대에 배치됐다.

기본적인 군사훈련조차 받지 않았던 일본인들을 모아 김 씨는 실전에 버금가는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다른 부대원들이 기본 교육에 치중했던 것과 달랐다. 그는 스스로 엄격하게 규정을 지키며 훈련에 임했고 다른 부대원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이 같은 훈련은 실전에 투입되면서 효력을 발휘했다. 1943년 김 씨가 이끄는 부대는 유럽에 투입됐고 이후 탁월한 작전능력을 보이며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작전참모가 됐다.

또한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이 로마 입성을 앞두고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그는 자원해 독일 진영에 침입 2명의 독일군을 납치했다. 이를 통해 독일군의 병력 배치 상황을 파악해 연합군은 손쉽게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다. 여기다 그가 속한 100연대가 독일 치하의 프랑스 브뤼에르나 비퐁텐 지역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이 지역에선 아직도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는 노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한국 전쟁에서도 김 씨의 전공은 눈부셨다. 2차 대전 후 잠시 군을 떠났던 그는 자신의 조국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입대했다. 그는 “한국을 위해 싸우고 싶었고 부분적으로 (전쟁에)미국의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며 입대 이유를 밝혔다.

참전 후 김 씨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최전방을 지원, 교착상태였던 전선을 돌파해 60㎞나 북진해 휴전선 형태가 북쪽으로 치솟은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데 기여했다. 그는 눈부신 활약으로 아시아계 최초로 백인들을 지휘하는 대대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공적에 마크 클락크 전 유엔군 총사령관은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에 최고의 군인이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김 씨는 한국 전쟁의 참상을 겪은 후 자신이 한국인임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이후 행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전쟁고아들을 후원하는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을 만들어 후원했고, 1963년에서 1965년까지 한국에서 미 군사 고문단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군의 현대화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2000년 노근리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미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정확한 진상을 알기 어렵지만 미군이 양민학살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며 미군의 치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제대 후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시민 봉사 단체들을 만들어 후원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이 할일을 묵묵히 해 냈다. 때문에 그의 공적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에 대해 한 한국인 이민 3세는 “자신이 한 일을 알리지 않고 댓가를 바라지도 않았다”며 “김영옥 대령의 삶과 업적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삶의 태도에 2차 대전 당시 그의 휘하에 있던 일본인 부대원들과 미국 내 백인주류사회 등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본보기이자 지도자로서 존경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소박했다. 그의 방은 꾸며지지 않았고 벽에 걸려 있는 한반도 지도가 유일한 장식품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현재 김 씨가 두 차례 암 수술을 받고 투병중이란 사실. 그는 다시 재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고 방송은 밝혔다.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김영옥 씨의 삶에 많은 시청자들은 “그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아이디가 ‘WHBEAN`이란 시청자는 “그 분이 한국인이란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다”며 “김영옥 대령의 고귀한 정신이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아이디가 ’JS4019`인 시청자는 “전쟁영웅이면 어딘지 모를 이데올로기적 완고함과 편협함이 느껴져야 하는데 김영옥 대령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며 “고귀한 양심, 이타적 리더쉽 등 민족을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를 화려한 수식어 없이 그는 행적으로 몸소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많은 시청자들이 그가 걸어온 삶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최근 국내에서는 김영옥 씨의 공적을 기려 무공훈장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서훈이 추진되고 있다. 뛰어난 업적과 미국 사회에서 엄청난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는 미국에서 두 번째 무공훈장을 받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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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종도뇌르 받은 김영옥 대령
프랑스 최고훈장 레종도뇌르

김제완 oniva@freechal.com


2차대전의 영웅인 재미동포 김영옥 미국 육군 예비역 대령(85)이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종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받게 됐다.
한국계 미국인으론 처음 수상


▲ 김영옥 예비역 대령
1월18일 LA 프랑스총영사관과 재미 일본계 미군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 주축이 된 ‘고 포 브로크재단(Go For Broke Foundation)’에 따르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김영옥 예비역 대령에게 레종 도뇌르 무공훈장을 수여한다는 공문에 서명했다.
그리고 오는 2월4일 LA 다운타운에서 기념식을 할 예정이다.
레종 도뇌르 훈장은 국민훈장 혹은 무공훈장으로 주어지기도 하는데 한국계 미국인이 이 훈장을 받는 것은 김 대령이 처음이다.

LA의 프랑스총영사관은 선정 이유를 밝히면서 “프랑스 정부와 국민은 2차대전때 피를 흘리며 조국을 구해준 김 대령에게 무한히 감사한다. 레종 도뇌르는 흔히 슈발리에급으로 주어지나 이번 김 대령의 경우는 공적을 감안, 한 등급 위인 오피시에급으로 수여된다”고 말했다.
김영옥 예비역 대령은 수상소식을 듣고 “나는 100% 미국인이면서 100% 한국인이다. 이 나이에 훈장 하나를 더 단들 개인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 그게 한국계 후배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나름대로 뜻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이민 2세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김 대령은 진정한 군인정신을 갖고 있는 신화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2차대전시의 혁혁한 활약으로 유럽 여러나라로부터 무공을 인정받아 큰 훈장을 받았고 한국전쟁에서도 참전했지만 정작 한국정부만은 이같은 사실을 가장 늦게 인정했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다. 지난 2003년 1월 한국정부가 김영옥대령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또 같은해에 KBS 해외동포상 시상식에서 ‘사회부문’ 수상자로 결정됐다.
프랑스 “김대령에게 무한히 감사”

지금은 72년 예편한 뒤 여성과 청소년을 위한 기관을 설립하는 등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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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위안부결의안의 숨은 주역 '김영옥'
[김동석의 뉴욕통신] 일본계 미국인 사로잡은 '위대한 영웅'
2007-03-06 19:03:35
초읽기에 들어간 미 하원에서의 '일본군위안부결의안' 통과는 미주동포의 평화 만들기를 위한 노력의 결정체이다.

필자는 2004년 9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케리 상원의원의 선거유세 지원차 뉴욕을 방문한 마이크 혼다 의원을 만났었다. 그는 필자에게 자신은 일본계이지만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영혼(Political Spritual)을 사로잡고 있는 사람은 ‘한국인’이라고 하면서 2차대전 당시 한국계 미군영웅인 고 김영옥 대령을 ‘아름다운 영웅’(Beautiful Hero)라고 소개했다. 김영옥 대령은 군인이었을 때보다도 퇴역 후 그가 미국의 아시안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온 것이 더 돋보인다고도 했다.

김영옥 대령, 일본계 미국인들의 '결의안' 지지 얻어내

혼다 의원은 필자에게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후 미국의 정치인들은 미국내 일본인들을 몰살시키려고 했었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당시 혼다 의원 본인은 갓 태어났었고, 그러한 이유로 6살 때까지 포로 같은 생활을 했다고 했다. 미국 정부는 그 후 40년이 훨씬 지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에 와서야 당시 일본인들 전체를 몰살하려고 했던 인종적 차별의 과오를 인정하고 재미 일본인 사회에 공식 사과했는데 이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한국인인 '김영옥 대령' 이었다고 하면서 필자가 한국인임을 추켜세워 주었다.

당시 필자는 미국생활 20년이 지나고 있음에도 김영옥을 단순하게 한국전쟁때 수많은 고아들을 구한 한국계 미국인 전쟁영웅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가 이같은 토로를 하는 혼다 의원 앞에서 당황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내 일본인 2세들은 자신들이 적국의 시민이 아니고 미국에 충성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했고, 태평양과 유럽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특수부대 지휘관으로 전설적인 전쟁 신화를 만들어 낸 김영옥 대령은 당시 아시안계의 유일한 지휘관이었고 일본계 참전군인들의 영웅으로 받들어졌다. 전쟁후에 김영옥 대령은 한국계지만 일본계사회의 가장 영향력이 큰 '일본계참전용사회'를 이끌었다. 로스엔젤레스 다운타운의 '일본계참전기념비'를 일본계 참전용사들은 김영옥 대령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대하여 건립했다.

1999년에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일본정부에게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이었던 마이크 혼다의원이 발의, 상정하여 통과시켰기 때문에 ‘혼다 결의안’이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계 3세인 혼다 의원이 이 결의안을 내놓자 미국내 일본인 사회가 요동쳤다. 영향력 있는 일본계 지도자들은 연일 혼다측에게 이를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하며 압력을 가했다. 어려움에 직면한 혼다 의원은 곧바로 한국계 전설적인 전쟁영웅인 김영옥 대령에게 도움을 청했다.

혼다 의원의 설명을 들은 김영옥 대령은 일본계 참전용사들의 '혼다결의안' 지지 서명을 받아서 혼다의원에게 전달했다. 혼다 의원에게 결의안 철회를 종용하던 재미일본인사회 지도자들은 2차대전 일본계 참전용사회의 지지서명을 확인하고는 결의안 반대를 접게 되었고, 그래서 캘리포니아 의회가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일본계 참전용사회는 재미 일본사회의 자부심이고 정신적 지주이다. 그 용사회의 절대적인 지도자가 전설적인 한국계 전쟁영웅인 김영옥 대령인 것이다.

◀ 생전의 김영옥 대령. 그는 지난 2003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받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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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예전에 MBC에서 이분관련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특공대형식의 소부대 지휘뿐만 아니라 대규모 부대운용,첩보전까지 해내시는

다재다능하신 군인.

간혹 밴드오브브라더스의 101공수부대의 윈터스대위와 비교하시는분이 많으신데

군인으로써의 재능은 이분이 더 뛰어나신듯.

전장에 서면 모든 지형지물과 피아의 움직임이 머리속에 그대로 그려진다라고 하시더군요.

소위 말하는 "천재적 군인"

군인으로써의 재능과 천재성뿐만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완성된 "장군".

그렇지 않았다면 2차대전당시 동양인인 누가 이분을 따랐겟습니까.

더욱이 이분의 부대는 미국계 일본인으로 구성된부대.

식민지 출신의 장교가 자신들을 지휘한다면 누구나 경멸감을 가지지 않을수없을것입니다.


다음은 2차대전 당시 김영옥대령님 휘하의 한 일본군인분께서 쓰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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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소위는 미시시피에 위치해 고도의 전투준비 상태에 있던 제 100 보병대대로 왔댜.
24살의 군인은 모든 징집병들이 너무도 많이 보아왔던 그리고 피하고 싶어하던 그런 종류의 장교였다.
죠지아의 포트 베닝에 있는 OCS ( 사관후보학교 )를 갓 나온 그는 '용맹한' 자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
그는 100대대에서 다른 장교들(처음 100대대 장교의 대부분은 백인들이었다.)의 혐오와 징집된 (일본계)병사들의 경멸을 참으며 병사들을 몰아 붙였지만, 점차적으로 그들의 존경을 얻었다.
부대와 함께 이태리에 도착하자, 전투에서의 그의 멋진 통솔력과 병사들의 복지를 위한 그의 배려로인해 곧 칭송을 받는 장교가 된다.
전쟁터에서의 그의 강인함과 용기 또한 칭찬을 받게되었다.

1943년 11월 3일, 이른 아침에 제 100대대는 치오르라노 근방의 볼레르노 강에서 세번째 도하를 명령을 받았다. 한밤중에 무지막지하게 쏟아진 포탄세례에 그 지역이 흔들리고 난후, 제 100대대와 제133 보병연대의 제2대대는 함께 출발했다.
새벽 4시가 되었을 즈음, 100대대의 B중대가 물살이 빠르고 차거운 볼테르노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니세이(Nisei·二世- 미국의 일본인 2세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부르던 호칭 )이 거친 숨을 내쉬며 차겁고 젖은 건너편 강둑을 기어 올라가 발견한 것은 지뢰밭에 한가운데에 있는 자신들 이었다.
즉시 반응한 독일군의 포대와 아군포대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병사들은 한가운데 갇혀 버리고 말았다.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비 ( 포탄 )로 인해 30명 이상의 니세이들이 전사해 버렸다. 강둑으로부터 비틀 거리며 올라간 병사들은 4마일 떨어진 그들의 목적지인 85번 국도를 향해 급히 대오를 정돈했다.
어둠속이라 어느 방향으로 중대가 나가야 할지 모르게 되는 혼란이 찾아왔다.
선두소대가 지뢰밭으로 걸어 들어가 7명의 병사를 사상자 명단에 올리고 말았다.

김의 소대는 김이 인솔하는대로 마침내 길이 보일때가지 나아갔다 되돌아 오곤했다.
겁없는 소위는 정찰을 위해 어둠속으로 홀로 나아갔다. 철모대신 니트로 만들어진 모자를 항상 착용했던 용감한 소위를 따라가는건 어둠속에서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김소위는 항상 무언가 무거운것이 그의 머리에 있으면 생각을 바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

돌담의 꼭대기에 다다라, 김소위는 그위에 서서 그의 대원들에게 전진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갑자기 독일군의 총알이 공기를 갈랐고 김소위는 땅위로 떨어졌다.
분노가 교차되던중, 로버트 오자키 병장은 용감한 소위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거나 포로가 된다는것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거의 반사적으로 그는 전투의 시끄러운 소음 너머로 고함을 질렀다.

" 착검 ! "

'반자이 (만세)!" 라는 고함과 함께 전방의 모든 니세이들이 일어서서 독일군의 총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이차대전중 이태리에서는 최초의 착검공격인 데다가, 우렁찬 '만세' 공격이 배가되어, 독일군들은 대경실색해 버렸다. 담 너머에 도착한 그들이 발견한건 아직 살아서 수류탄을 적의 기관총좌에 던지고 있는 그들의 소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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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그것도 식민지의 약소국가출신인 분을 위해 목숨을 다해 돌격하는 미국군.
대단하시다란 말뿐이 안나오는군요.
그 이후에도 이분은 일본계 미국인의 존경을 받으며 지대한 영향을 미치신...
제작년 12월 29일 돌아가신것이 안타까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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