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5일 금요일

차범근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

http://navercast.naver.com/science/documentary/3026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에디슨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에디슨만큼 많은 발명품과 큰 업적을 남긴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집에서 사용하는 리모컨, 교류전기, 모터, 형광등, 네온사인, 레이더 등은 모두 그가 고안했거나 그가 고안한 기술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테슬라의 가장 유명한 발명품은 테슬라코일인데, 이것은 저전압을 고전압으로 바꿀 수 있는 장치이다. 국립과천과학관에 가면 높이 3.1 m 규모의 테슬라코일 에서 나오는 400만볼트의 강력한 방전스파크를 볼 수 있다.



국립과천과학관(기초과학관)에 설치된 테슬라코일의 작동 모습이다. 동영상 뒷 부분에서 사람들이 들고 있는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는
이유는 테슬라코일 주위에 형성된 전기장에 의해 형광등 내 형광물질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비운의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

테슬라는 1856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민하여 수많은 발명품과 현대 전기문명에 큰 업적을 남겼다. 니콜라 테슬라는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에게 크게 알려지지 못한 비운의 천재 과학자였다. 그렇게 된 것은 에디슨과도 관련이 있다. 테슬라는 28세 되던 해, 미국으로 이주하여 잠시 에디슨과 함께 일했으나 직류와 교류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로 에디슨과 헤어져 독자적으로 연구를 했다. 테슬라가 에디슨 연구소에서 연구할 때부터 에디슨은 테슬라의 천재적인 재능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 보았고, 테슬라가 에디슨의 직류시스템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교류시스템을 개발하자 에디슨은 전기를 저가로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테슬라에게 거액을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테슬라는 에디슨을 떠났다.


재평가 받는 테슬라, 자기장 단위에 이름을 남기다

하지만, 테슬라의 교류시스템이 우수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의 창립자 조지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라의 특허를 사들였으며,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의 도움으로 교류발전기와 송배전 시스템을 발명했다. 이 발명은 1895년 웨스팅하우스사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교류발전기를 사용한 수력발전소를 만들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교류시스템의 상용화가 테슬라 한 사람만의 업적은 아니지만, 나이아가라 폭포 발전소 교류발전기에 필요한 13건의 특허 중 9개가 테슬라의 것이라는 사실만 봐도 그의 공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케 한다.

1961년, 국제순수 및 응용물리학 연맹(IUPAP)은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테슬라의 이름을 딴 T(Tesla)를 쓰기로 정했다. 테슬라가 남긴 업적에 비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그의 이름이 자기장의 단위로나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이후 크로아디아는 2006년에 테슬라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니콜라 테슬라의 해’를 선포했고, 미국의 주간지 <라이프>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테슬라의 이름을 올렸다. 또, 세르비아는 베오그라드국제공항이름을 ‘테슬라 공항’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테슬라는 재평가되고 있다.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


테슬라코일의 작동 원리는 공진

테슬라코일은 고전압을 만드는 장치로, 수십에서 수백만 볼트의 전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테슬라코일은 6개의 기본요소로 구성된다. 구성요소는 1차 고전압 트랜스(High voltage transformer), 고전압 콘덴서(Hig voltage capacitor), 스파크 갭(Spark gap), 1차 코일(Primary Coil), 2차 코일(Secondary Coil), 토로이드(Toroid)이다.

테슬라코일을 작동시키면 1차 고전압 트랜스가 가정용 교류 전압(=220 볼트)을 수만 볼트(과천과학관의 경우 4만 볼트)정도로 변환한다. 이렇게 변환된 에너지는 고압의 콘덴서를 충전시키고, 콘덴서에 충전된 전하가 스파크 갭을 가로지를 만큼 충분히 모아졌을 때, 스파크 갭 사이에서 스파크가 발생되고 콘덴서와 1차코일 사이에 폐회로가 형성된다. 이 때 콘덴서에 저장된 에너지는 1차 코일에 전달되고 1차 코일과 2차 코일 사이에 전자기장이 형성된다. 이러한 과정은 스파크 갭에서 스파크 방전이 초당 수백에서 수천 회까지 빠르게 반복된다. 1차 코일과 2차 코일 사이에 형성된 전자기장에 의해 2차 코일은 에너지를 흡수하고 전압이 크게 증폭된다. 이러한 원리는 마치 작은 눈덩이를 굴리면 큰 눈덩이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테슬라코일의 회로도. 테슬라코일은 2개의 LC회로로 구성된다.


테슬라코일의 회로도(위 그림)로 보면, 테슬라코일은 2개의 LC회로로 구성된다. LC회로는 콘덴서와 코일로 구성되는 회로이며, 특정한 조건에서 공진이 일어나는 특성을 가진다. 테슬라 코일의 첫번째 LC회로는 콘덴서, 스파크 갭, 1차 코일로 구성된 발진기 역할을 하고, 2차 LC회로는 2차 코일과 토로이드로 구성되는 공진회로 역할을 한다. 2차 코일의 상단에 연결된 토로이드와 하단에 연결된 지면(접지)은 그 자체가 콘덴서 역할을 하는데, 토로이드에서 강력한 방전 스파크가 발생하는 이유는 2차 LC회로가 공진주파수 일 때 전압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공기의 팽창으로 인해 아주 큰 소음이 발생하게 된다. 테슬라코일이 동작할 때 스파크 방전이 생기고 소음이 발생하는 원리는 흐린 날 번개와 천둥이 만들어지는 원리와 같다.


국립과천과학관에 설치된 테슬라코일이 400만 볼트의 고전압을 만들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테슬라코일의 응용

테슬라코일을 이용하면 물체를 순간적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있었고, 전기를 무선으로 송출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테슬라코일이 그 동안 몇몇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기도 했다. 영화 [프레스티지]를 보면 마술사 로버트가 순간 이동 마술을 펼치기 위해 테슬라를 찾아가 테슬라코일을 얻는 장면도 나온다. 아직 테슬라코일을 직접적으로 응용하여 상용화해서 사용하고 있는 예는 없지만, 테슬라코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발명을 자극해 왔다. 현재에는 영화의 특수효과나 자동차 쇼, 올림픽 개막식과 같은 공식행사의 퍼포먼스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테슬라코일
수백만 볼트 이상의 고전압을 발생시키는 장치. 1차코일과 2차코일로 구성되어 공진의 원리로 고전압을 발생시킨다.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의 가장 유명한 발명 품 중 하나이다. 국립과천과학관에 400만 볼트를 내는 테슬라코일이 전시되어 있다.




글 정광훈 / 국립과천과학관 전시기획총괄과 연구사
부산대학교 물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2007년부터 교육과학기술부 국립과학관추진기획단에서 과학관 전시물 제작 감독업무를 맡았으며, 현재는 국립과천과학관에서 기초과학분야 전시기획 및 교육프로그램 개발 업무를 맡고 있다.
국립과천과학관

좌뇌와 우뇌의 신비 <질 테일러> 동영상

미국 하버드 대학 뇌과학자인
질볼트테일러(Jill Bolte Taylor)는 1959년생으로 51세의 여성입니다.


1996년 12월에 뇌졸중에 걸려 좌뇌의 기능장애로
약 8년간 투병생활을 통하여 완치된 다음
2008년에 라는 저서를 출간하고
동년 2월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열린
TED컨퍼런스에서 그녀가 행한 18분짜리 강연 동영상은
조회수 200만회를 돌파했고, 지금도 매일 2만명이 봅니다.

테일러 박사는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08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선정됐습니다.

테일러 박사의 메시지는 좌뇌의 기능이 스톱된 상태에서
우뇌의 기능으로 살아본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이 좌뇌에 지배당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좌뇌의 영향력에서 한 발 비켜서면
더 평화롭고 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봄나라에서는
2005년도에 발간한 책
제1권 <늘봄의 생활> 서문<읽어두기> 글에서
"좌뇌본위에 치우친 인간을 바로 잡자면
우뇌의 계발을 통해
좌우가 균형잡히고
두뇌와 가슴이 통하는
성숙한 인간으로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
******
여기에
획기적인 우뇌계발의 길이 있습니다.
돌아봄 바라봄 늘봄의 생활로
전환하기만 하면 됩니다." 라고 선언한 다음

잇달아 6년간
2, 3, 4, 5, 6, 7, 8권을 통하여
좌뇌본위 생각위주의 삶에서
우뇌본위 감각위주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뇌계발 낭독교재***

읽기만 하면
좌뇌에서 우뇌로
자유 평화 행복의 삶입니다.

1권 늘봄의 생활
2권 나는 봄이다 고로 존재한다.
3권 나는 봄의 힘으로 산다.
4권 봄나는 어떻게 삶을 창조하고 운행하는가.
5권 봄나의 증득
6권 태양의 탄생 봄나라
7권 사람의 완성
8권 삶의 완성
9권 사랑의 완성 (2010년 6월 현재 집필중)

우뇌본위의 삶 봄나라 (http://bomnara.com)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안철수 "젊은이들이여, 인생의 본질은 불안정이다"

잡코리아가 최근 젊은 직장인 373명을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31.1%가 '이 시대의 성공 아이콘'으로 안철수 카이스트 교수를 꼽았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김연아(17.2%) 선수에 이어 세 번째(15%)로 꼽히는 데 그쳤다. 두 사람이 이끌었거나 이끌고 있는 기업의 규모나 개별적 자산 규모, 세계 시장에서의 인지도는 사실 견주기도 힘들다. 하지만 왜 직장인들은 안 교수를 꼽았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안 교수와 서면 인터뷰를 준비했다. 인터뷰는 그 의문의 정확한 답은 아니어도, 일견의 답을 알려줬다. 안 교수는 끝없이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하고, 그 도전의 결과물로 얻어진 창조가 개별적 자산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이 된다는 점을 설파하고 있었다. (스크롤 압박 주의)



-안 교수의 삶은 늘 변화가 키워드다. 의사에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로, 한국을 대표하는 벤처기업가로, 다시 안정된 기업 대표직을 버리고 공부하는 사람 겸 가르치는 사람의 길로, 늘 변화하는 원동력은 어떤 것이고 그 변화가 교수님에게 가르쳐준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게 만드는 드라이빙 포스는 세 가지이다. 의미 있는 일, 재미있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그것이다.

의사를 그만둘 때도, 컴퓨터 바이러스 쪽 분야는 나밖에 없다 보니 정말 의미 있는 일이었고, 재밌는 일이었다. 잘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러나 잘할 가능성은 있었으므로 도전했다. 처음 백신을 개발한 후 의대 교수로서, 군의관으로서 일하며 틈틈이 시간을 쪼개 백신 개발을 계속했고, 박사 학위를 받고 군의관 복무를 마친 뒤에 컴퓨터와 의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되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거듭된 고민을 해결해 줄 실마리는 그때까지 살아왔던 삶은 남이 보기 좋은 삶이라는 데서 풀렸다. 서울대 의대 졸업, 20대 의학 박사, 20대 의대 교수로 이어지던 순탄한 과정은 남이 보기에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컴퓨터를 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자부심, 보람, 사명감, 성취감 등을 주지는 못했다. 살아온 시간보다는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시점에서, 지금까지 쌓아온 것에 연연하기보다는 앞으로 더 보람을 느낄 수 있고 해 나갈 일이 많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14년간 공부해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던 의학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1995년 3월 회사를 설립한 후 그 해 가을에 첫 유학을 갔다. 회사 규모가 구멍가게 수준이기도 했거니와, 연구소는 연구 개발만 하고 마케팅 및 판매는 한글과컴퓨터가 전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회사의 책임자로서 앞날을 생각하면 늘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장 수익을 창출할 시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매출액이 연 백억 원이 넘던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 저렇게 되어 보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유학을 가서 공부한 분야는 MOT (Management of Technology, 기술경영)이었다. MBA가 금융업, 제조업, 서비스업 등의 전 산업분야에 걸쳐 필요한 경영을 배우는 데 비해서, MOT 과정은 말 그대로 첨단 기술 분야의 경영에 특화된 과정이다. 따라서 경영과 기술적인 지식 모두가 필요한 벤처기업의 경영을 맡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적합한 과정이었다.
아무런 소질도 경험도 없이 회사를 만든 탓에, 늦게나마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경영공부를 한시라도 빨리 하는 것이 회사를 위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회사 경영 10년을 채우고 CEO를 퇴임한 것은 세 가지 고민을 하다 내린 결정이었다.
첫째가 기업지배구조이다. 민주주의가 삼권분립의 형태로 정립되게 된 이유는, 사람은 유혹에 약한 존재여서 한 사람이 오랫동안 모든 결정을 하다보면 교만해지고 부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특히 상장법인은 CEO나 대주주의 개인 자산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위해 건강한 견제 시스템이 필요하다. 따라서 안연구소의 그 다음 발전단계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가 창업자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실리콘밸리에서는 창업자의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경험과 지식이 사회 자산화되는 것이 부러웠다. 즉, 창업자들이 인수합병을 통해서 대기업 임원이 되기도 하고, 벤처 캐피털리스트가 되기도 하고, 정치가가 되기도 하면서, 그들의 다양한 경험들이 사회 곳곳으로 파급되고 선순환이 된다. 반면에 한국은 벤처산업의 역사가 짧은 점도 있겠지만, 무너지는 기업들이 많아지면서 창업자의 경험이 사회적 자산이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 실정이다.

셋째로는 안철수연구소 한 회사뿐만 아니라 업계 전반적으로 도움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2005년 3월에 CEO를 스스로 사임한 후에 두 번째 유학을 가게 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경험을 체계화하고 저변을 넓히는 준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리고 공부하는 방법으로도 연구원이나 교환교수로 편하게 갔다 오는 것보다는 제대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부에 한해서는 ‘노 페인 노 게인 (No pain, no gain)’라는 말을 실감한다. 괴롭게 고생하지 않으면 실력이 늘 수 없다. 그것이 40중반의 나이에 TOEFL 시험, GMAT 시험을 봐서 MBA 석사과정 학생으로 입학했던 이유이다. 출석 체크, 발표, 숙제, 시험 등 힘든 과정을 거치고나서, 그 많은 내용들이 내 것이 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KAIST를 택한 이유는 업계 전체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서이다. 여러 대학에서 풀타임 교수 제안을 받았으며 의대와 경영대도 있었지만, 요즘같이 전반적인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가치사슬의 처음 부분이 망가지는 현실에서 우리나라 장래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으며, 이러한 흐름을 바꾸는데 조금이라도 일조하기 위해 공대를 택했다.

내 인생의 성공의 정의는 ‘삶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영어 표현으로는 ‘Make a difference’하고 싶다. 내가 죽고 나서도, 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때와는 다른 것이 이 세상에 남았으면 한다. 크로마뇽인의 벽화처럼, 이름이 남아있지도 않고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의 생각의 변화나 제도, 책, 조직처럼 누군가가 있었다는 흔적이 남기를 바란다.

-KAIST에서 ‘기업가정신’이라는 수업을 하고 있다. ‘당신이 바로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기업가입니다’라는 문구를 학생들에게 보여준 걸로 알고 있는데, 잠시 이 지면이 그 강의공간이라고 생각하고, 기업가정신은 무엇이며 자신의 삶을 경영한다는 의미는 어떤 것일지 설명해달라.
=‘기업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세 가지의 다른 한자 표기를 발견할 수 있다. 기업가(企業家)는 일반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자를 뜻하며, 기업가(起業家)는 일으킬 기(起)가 뜻하는 대로 새로운 가치나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람을 말하며, 기업가(機業家)는 직물업을 하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다.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라고 할 때의 기업가는 두 번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현상유지의 수준을 뛰어넘어 위험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마음가짐과 행동력이 기업가정신의 핵심인 것이다. 또한 기업가정신은 정신이 아니라 활동이 중요하다. 마치 리더로서 마음가짐만 있는 사람을 리더십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기업가정신’이라는 번역보다는 ‘가치창조활동’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래의 entrepreneurship의 뜻을 더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업가정신의 본질은 도전과 혁신의 정신이다. 저는 여기에 세 가지를 더 보태고 싶다. 첫째, 사회적 책임의식, 둘째,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사람들의 삶에 혜택을 주는 것을 만들겠다는 마음가짐, 셋째, 급변하는 트렌드를 앞서서 읽는 통찰력 또는 비전이다.

이때의 통찰은 단순히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정말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느리고 지루하고 점진적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즉, 진정한 의미의 통찰은 탄탄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숱한 고민과 갖은 시행착오의 산물인 것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이러한 진화 과정을 겪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를 거듭하여 결국 자기가 창업한 애플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넓은 세상에 나가 여러 경험을 쌓다 보니 통찰력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기업가들만 기업가정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정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이 ‘당신이 바로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기업가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안 교수의 이미지는 늘 무언가 도전하고 변화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상징으로 그려지곤 한다. 안 교수에게도 실패의 경험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 경험은 어떤 것이 있었으며 그때의 실패가 가르쳐준 것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회사 경영은 매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그래서 사실 매순간이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한 회사의 CEO로 10년을 있었기 때문에 한 가지 일만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회사의 규모가 10명, 20명, 50명, 100명, 500명일 때마다 모두 역할이 달랐다. 10명 정도 규모에 적합한 CEO는 직접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실무형 CEO이다. 이러한 역할을 고생 끝에 익숙해지고 나면, 어느새 회사는 30명 규모가 되어 있었다. 30명 규모에서는 적절한 권한위임이 필요한데, 10명 규모의 회사일 때 익숙해 있었던 직접 일을 처리하는 습관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 역할에 익숙해진 순간, 어느새 조직은 50, 100, 500명이 되었다. 따라서 10년 간 끊임없이 내가 편한 업무방식보다는 조직이 필요로 하는 역할에 나를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다. 내가 바뀌든지 또는 그 역할에 맞는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다. 선택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편안하고 익숙한 역할을 버리고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하니까.



-요즘 20대가 여기저기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반대로 ‘측은함’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한다. 대학을 나와도 취업을 못하는 20대가 넘쳐나는 시대이면서 ‘정치적인 견해 표현조차 하지 않는 세대’라는 시각이 겹쳐서 그런 것 같다. 지금의 20대는 어떠한 세대로 보이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던질 메시지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런 상황을 놓고 젊은이들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보면, 요즘 젊은이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호기심이 강하고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더 큰 힘으로 젊은이들을 안전지향적인 선택을 하도록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원래 삶 자체는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사실 세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세포가 불균형을 만들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세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세포 속으로 들어오는 소금기(Na)를 밖으로 퍼내고, 포타슘(K)을 세포 속으로 끌어들인다. 안정은 오히려 죽음 뒤에 찾아온다. 세포막이 터져버리면 바깥에 있던 소금기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고, 그 동안 소중하게 모았던 포타슘은 모두 바깥으로 흩어져버린다. 안정이 찾아오는 것이다. 세포나 생명 그리고 인생의 본질이 불안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인생을 경영하는 CEO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맞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종종 스티브 잡스와 비견되기도 한다. 개인의 창의성이 사회에 공헌한다는 점, 그리고 그 공헌이 기업운영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 같다. ‘아이폰’, ‘아이패드’로 대변되는 2010년대의 IT시대 변화는 어떻게 전망되며, 그를 위해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떤 준비를 해가야 할까.
=2000년대 초반 처음 아이팟을 구입했을 때 온오프 스위치와 볼륨이 없어 놀랐다. 화면과 원반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용설명서를 보고 따라 해보니, 그 다음부터는 평생 설명서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용하기 쉬웠다.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냈는지가 궁금했던 차에, 애플사의 디자이너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디자인만 알고 있는 디자이너는 이런 생각을 못 한다는 것이다.
전자기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전자공학 전문가가 회로를 설계하고 몇 가지 단서조항을 붙인다. 온오프 스위치가 있어야하고, 볼륨 조절단자가 있어야하는 등의 조건이 그것이다. 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이러한 단서조항들을 모두 충실하게 따르면서 가장 예쁜 제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플 디자이너들은 디자인 전문지식뿐 아니라 전자공학 등 다른 분야도 아는 디자이너들이었다. 그래서 설계도를 받은 후 단서조항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온오프 스위치를 없앨 수 없을까?"와 같은 역발상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팟, 아이폰 같은 제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화(globalization)의 개념을 제대로 정립한 사람들중의 하나로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을 꼽는다. 그가 뉴욕 타임즈 기자가 되어서 처음 간 곳이 중동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특파원으로 열심히 취재하고 공부하다 보니, 중동지역의 역사와 국제정세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 다음에는 월스트리트로 갔는데, 그곳에서는 금융 전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양쪽 분야의 전문성을 가지다보니, 보통 사람은 볼 수 없는 그 둘 간의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었고, 세계화의 개념을 세계적인 석학의 수준으로 정립할 수 있었다.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은 경영학 분야를 사회학과 심리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다보니, 보통 사람들은 간과하기 쉬운 깊은 통찰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고, 불과 저서 4권으로 세계적인 석학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런 예들을 보면 확실한 전문성을 가지는 자신만의 분야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분야 또는 더 깊은 분야에 대한 관심과 공부가 결합됐을 때 창조의 힘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역시 강의에서 “마지막 인상이 그 사람을 결정한다”고 말한신 적이 있다. 그 생각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들어봤으면 좋겠다. 사람을 대하고,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보통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헤어질 때의 마지막 인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헤어질 때가 그 사람의 본 모습을 알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잘하다가 헤어질 때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돌변하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어서 결국은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마주치게 마련이다. 직접 마주치지 않더라도 주위 사람들의 평판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세상이어서, 옛날에 했던 일 때문에 앞길이 막히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인간관계를 단기적이고 이해타산적으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결국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IT강국이던 한국이 ‘아이폰’ 등의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안 교수는 ‘정통부 부활’을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의 IT산업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그를 위해 대안적 방법론은 어떻게 제시할 수 있을까.
=아이폰으로 촉발된 스마트폰 혁명은 제2의 IT혁명(second wave)이라고 할 수 있다. 모바일 인터넷이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은 물론 IT산업의 틀을 통째로 변화시킬 수 있는 거대한 물결이다. 1980년대 초에 IBM이 PC를 개발하고 마이크로소프트(MS)가 도스와 윈도라는 운영체제(OS)를 만들어 PC를 기반으로 한 IT산업 성장을 이끈 제1의 IT혁명에 견줄 만하다.

제2의 IT혁명의 요체는 플랫폼(platform) 전쟁이다. 무수한 IT기업과 개발자들이 애플리케이션(앱 • 응용프로그램) 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결국 앱 공급 사슬을 주도하는 플랫폼 승자가 최종 승자가 될 것이다. 아이폰은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 자체가 플랫폼이다. 또 다른 예로서 세계 최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이트인 페이스북이나 구글 등도 플랫폼을 장악하려 경쟁을 벌이고 있다. 소프트웨어나 콘텐츠가 집중되고 또 이를 매개하는 창구 역할을 하는 플랫폼이 모바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IT 흐름을 주도해 나갈 것이다.

아이폰의 등장으로 글로벌 기업들은 2~3년 전부터 플랫폼 전쟁에 돌입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작년 말에야 뒤늦게 아이폰을 도입했고, 곧 이어서 올해는 아이패드 충격을 겪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 탓도 있지만 한국의 고질적인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산업 구조의 탓이 크다.

국내의 많은 대기업들이 하청기업의 이익을 짜내는 불공정한 거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소프트웨어 벤처나 컨텐츠 업체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 없고, 이는 대기업의 경쟁력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대기업 경영자는 물론 실무자들도 마인드를 고쳐 하청기업이 장기적인 동반자 관계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글로벌 플랫폼 경쟁에서 우리나라는 이미 뒤처져 있지만, 끝자락이라도 잡고 늘어져 틈새시장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대기업들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회사들은 모두 외국기업들의 하청 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말라. 결과에만 집착하지 말라”고도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제도 속에서 관계를 맺다보면 그런 걸 의식하지 않기가 힘들 때가 많고, 결과로 모든 걸 평가하는 조직에 속할 때도 많다. 사람과의 관계에 치어 힘겹게 직장생활을 하는 30대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는 어떤 게 있을까.
=과정과 결과를 가장 극명하게 고민하는 것이 기업이다. 수익 창출은 기업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고, 그것이 국민 상식이 된 것 같다. 그러나 회사를 세울 때, 경영도 모르고 조직생활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처음 고민했던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한 제과점이 맛있는 빵을 만드는 조리법을 개발하고, 건강에 좋은 재료로 빵을 만들고, 적당한 가격에 내놓는다. 그러면 소비자들이 다른 제과점과 비교해서 맛있고 건강에도 좋고 가격도 적당하면 그 집 빵을 산다. 결과적으로 제과점은 돈을 번다. 따라서 이 제과점이 수익을 얻은 것은 본연의 일을 열심히 해서 인정받은 결과이지 목적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반대로 수익 창출이 목적이라고 믿는 다른 제과점이 있다고 하자.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 중국에서 건강에 해로운 값싼 재료를 들여와서 빵을 만들어 판다. 그러면 그 제과점은 목적을 충실히 달성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제과점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내 생각으로는 수익 창출은 기업 활동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기업을 경영하기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생각이 큰 차이를 만들게 되었다. 단기적인 이익보다는 장기적으로 옳은 일을 택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대기업이 천만 불 인수제안을 했을 때 거절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생각 때문이었다. 과정에 충실하면 결과는 따라올 것이라는 믿음이 단기적으로는 힘들게 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큰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벤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벤처 기업가로서, 지난 10년 동안의 벤처기업의 성공과 실패를 어떻게 돌아보고 계시는지 들어보고 싶다.
=미국에서는 ‘페이스북’ 창업자 같은 젋은 벤처기업인들이 경제 주간지의 표지모델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새로운 ‘스타’가 없어서다. 스타는 한 산업이 성장하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 벤처산업에는 새로운 스타가 나타나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그만큼 벤처산업이 침체되어 있음을 방증한다. 창업 인재풀도 거의 바닥이 났다. 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원인은 세 가지이다. 첫째,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우선은 중소기업, 벤처기업 경영진의 경영능력 부족 문제. 둘째, 부실한 산업지원 인프라, 즉 인력을 공급하는 대학, 적극적 투자를 하는 벤처캐피탈, 자본을 대출하는 금융권, 낙후한 아웃소싱 산업, 정부의 산업지원정책 등이다. 셋째, 대기업, 공공기관과 중소기업, 벤처기업 사이에 아직도 존재하는 불공정한 시장구조를 들 수 있다.

추가로 주식시장, 특히 코스닥시장이 아직도 불투명하다보니, M&A가 이루어질 때 인수한 회사자금을 유용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더 많은 가격을 지불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정당하게 사업을 하려는 사람보다는 머니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기업을 인수할 수밖에 없게 되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것도 경영이 악화된 후 좋은 회사가 맡아서 다시 회생시키는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데 일조한다.

이런 문제점들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은 우선 중소기업은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상황파악에 기반하여 기존의 성장모델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하며 차별화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야만 한다.

인프라 측면에서 벤처캐피털은 단순 재무투자에서 벗어나 경영 및 평판 관리, 휴먼 네트웍 연결 등 기업이 커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능동적인 투자’로 바뀌어야 한다. 전문성을 갖춘 아웃소싱 기업도 더 늘어나야 한다. 대학은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과도 산학협동 및 연구활동을 늘려나가야 한다.

대기업의 생각 전환 또한 필요하다. 벤처가 살아야 중소기업이 살고, 그래야 중산층이 두꺼워지면서 소비력이 커져 대기업 물품구매가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또한 벤처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대기업의 장기적인 생존을 보장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단기 성과에 급급해서 벤처기업들을 옥죄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방학기간 동안 집필을 준비하신다고 들었다. 이번 저서는 어떤 주제를 담고 있으며 현재적 의미에서 그 책이 던지는 메시지에는 어떤 것을 담으려 하는가.
=경영상식 가운데 사실과는 다른데도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많이 있다. CEO 퇴임후에 미국 와튼스쿨에서 MBA 과정을 밟으면서 이런 부분들을 배울 수 있었고, 그 중에서 50가지 정도를 뽑아서 정리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한 사람의 인생도 그렇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조직도 작든 크든 모두 흥망성쇠가 있게 마련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좋은 일만 있는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잘되기만 하는 단체나 국가는 인류역사상 존재하지 않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표현대로, 좋은 시기가 있은 다음에는 어려운 시기가 있게 마련이고, 어려운 시기를 잘 보내면 다시 좋은 시기가 오는 형태가 반복되게 된다.

이러한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잘되는 시기에 얼마나 잘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보내는 개인이나 조직은 다시 잘 되는 시기를 맞이하지만, 어려운 시기를 잘 보내지 못하는 개인이나 조직은 망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조직이 어려운 시기를 잘 보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세 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어려운 시기가 지속되면 편법적이거나 정당하지 못한 수단을 써서라도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이나 조직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면 단기적으로는 쉽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더 큰 어려움을 불러오게 된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주위에 알려져 더 큰 문제를 불러올 수 있으며, 설령 알려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없어 결코 어려운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문제점을 파악하고 고치는 일이다. 잘 되는 시기에는 문제점이 보이지 않는 법이며, 문제점이 보이더라도 바빠서 고칠 만한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어려운 시기야말로 그 동안 고치지 못했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절호의 시기이며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어려운 시기에 문제점을 파악하고 고쳐놓는 개인이나 조직만이 대내외 여건이 좋아졌을 때 다시 좋은 시기를 맞이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서로를 격려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어려운 시기를 오랫동안 겪다보면 개인들이나 조직 내의 조직원들은 사기가 저하되기 쉽다. 원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이러한 때는 스스로도 마음을 다잡고 서로를 격려해주며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가 절실히 필요하다. 사기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은 일의 결과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세 가지 일은 개인이나 작은 조직뿐만 아니라 국가와 같은 큰 조직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운 시기에 이러한 일들을 잘 지켜나간다면, 우리는 다시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안철수교수의 아이폰을 바라보면서 얻는 교훈 3가지

http://blog.daum.net/bomall/15938744

2003년에 ipod 디자인 왈 : ipod의 하나뿐이 없는 디자인은 옛날 사고 방식의 디자이너는 못 만든다. : 전자공학을 공부한 디자이너들이 두가지 입장으로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혁신적인 디자인이 나올 수 있다.

2007년 아이폰 등장 : 2년 정도를 기득권들이 막았던 것이다.
대기업 임원들의 공통적인 이야기 : 우리가 뒤쳐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좀 더 디자인을 예쁘게 만들고, 기능을 추가를 하고, 사용법을 좀 더 편하게 만들면 그러면 우리가 따라 잡을 있지 않은가? 대부분이었다.


안철수 교수 : 걱정이 되더군요. 아이폰은 단순한 휴대폰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휴대폰과 휴대폰, 하드웨어 vs 하드웨어로의 싸움이 아니라 한국대기업들은 수직적인 효율화에 강한 한국 기업들( 하청업체에 최단시간에 최고의 품질의 제품을 납품하는 시스템 ) SCM(Supply Chain Management)로 경쟁력을 가지는 것이 익숙한 방법들입니다. 한국의 대기업은 수직적인 효율화에 세계적인 효율화 기업들입니다.
하지만 아이폰의 상징은 수평적 네트워크 모델이다. 삼성과 LG의 싸움은 하드웨어 vs 하드웨어의 싸움이 아니라 한국의 수직적인 효율화 비즈니스 VS 수평적 네트워크 비즈니스 전면전입니다.


아이폰을 통해 배운 3가지 교훈

1. 세상은 두눈으로 봐야한다.
세상은 다차원적이라서 한쪽면만을 봐서는 전체를 볼 수 없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아이폰을 한쪽 눈으로만 보고 있다. 하드웨어라는 한쪽 눈으로만 보다 보니 입체적인 것도 이차원적으로만 보이는 것이죠. 제대로 된 면들을 보지를 못하고 있다. 세상의 다양한 면들을 다 보려면 2개 이상의 시각을 가지고 두눈 뜨고 세상을 바라 봐야 ( 두 개 이상의 시각이 필요하다. ) 3차원인 물체가 3차원으로 보이겠다.

말콤 글래드웰은 심라학과 사회학으로 경영을 바라보는 유명한 석학 입니다.
경영이란 인문과학 분야의 가장 응용분야에 있는데 사실은 그 보다 깊이 있는 쪽이 사회학, 더 깊이 있는 것이 심리학 - 사람들이 심라와 사회가 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경영 쪽 시각으로만 머물러 본다면
다른 석학들이 해석 할 수 없는 것들을 해석을 하고, 통념을 깨는 활동들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한눈으로만 보면 이차원적으로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2개 이상의 시각을 가지고 봐야 제대로 된 실체를 볼 수 있다.


2. 수평적 사고방식의 중요성
6년 전에 세미나 : IT 산업 분야에 대한 전망 중에 IT 산업을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서비스 등으로 나누어서 어떻게 발전을 할 것이다 이야기 했는데 참가한 부사장님이 부르더니 분류를 바꾸었으면 좋겠다.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를 구동시키는 하드웨어의 구동품인데 나누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 사람들이 분류를 헷갈린다. 하드웨어 밑으로 소프트웨어를 넣어 달라고 부탁 하는 분을 보면서 절대로 융합의 시대에 의미 있는 일을 할 수가 없겠구나를 생각을 했답니다.

융합의 시대의 시대정신은 수평적인 시대정신입니다. 나와 다른 상대방의 전문분야에 대해서 내 밑, 내 위로 생각 하지 않고, 상대방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을 하고,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얻어 낼 수 있는데 수직적인 구조로 볼 때는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거죠. 저 회사는 Ipod 같은 제품을 만들 수 없겠구나.

수평적인 네트워크 비즈니스 모델이 뭘까?
가정용 게임기입니다. 비디오 게임기 - 닌텐도의 Wii vs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3 둘 간의 싸움을 보면 누가 이길까? 하드웨어 성능이 승자가 나올 거라 하면 당연히 소니가 이겨야 하는데 닌텐도 wii가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다.
모든 게임 프로그램을 다 대기업이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써드파티(3rd party) 수평적인 독립적인 게임 업체
1:1로 싸우면 소니가 크기 때문에 크기로 싸우면 소니가 이기지만 연합으로 싸움을 하기 때문에 닌텐도는 자기는 작은데 엄청난 연합군이 모여서 싸우니 닌텐도 Wii가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비즈니스가 싸움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타인을 적극적으로 포섭해서 그 사람들의 장점을 활용하고, 그 사람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이끌어 내는 능력이 있으면 가장 중요한 자원입니다. - 수평적 네트워크 비즈니스 모델 이라고 합니다.

애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드웨어 전화기 인데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애플용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전혀 상관없는 중소기업들이 콘텐츠를 만들어 주고 있는 네트워크 하는 능력이 무서운 것입니다.

만약에 삼성이나 LG가 성능이 더 뛰어난 휴대폰을 만든다고 해도 애플이 가지고 있는 자발적인 생태계를 만들지 못한다면 전쟁은 보나 마나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하드웨로만 보지 말고, 소프트웨어나 콘텐츠 업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를 할 수 있도록 생태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불리한 구조가 있다. : 언어 구조이다. 극존칭부터 하칭까지 존칭의 구조가 다양한 언어구조가 사실은 언어라는 것은 사고체계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서 나이를 파악해서 내 위/아래를 파악해야 대화가 편하게 할 수 있게 되니 수평적 사고방식이 너무나 힘들다.

아웃라인즈 : 대한항공 이야기가 나온다.
10년도 전에 최하의 항공사 였는데 어느 순간에 최상의 항공사로 바뀌었다. 단기간의 변화를 한 사례를 이야기 하더라.
비행기에서 기장, 부기장이 타고 있는 이유가 있다. 기장의 실수, 판단 착오를 할 때 부기장이 체크를 해주면서 상호보완체계가 잡혀 있는 것입니다. 기장, 부기장 체계인데.
한국말로 대화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부기장이 기장에게 토를 못 다는 분위기가 되었답니다.
기장이 편하게 이야기 하라고 하지만 부기장이 말을 못하고, 위험한 상황이 되어도 말 못하고 결국은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들이 계속 벌어 졌는데. 기내의 대화를 영어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영어로 하다 보니 존칭이 없어져서 사고율이 급락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수평적인 사고 구조로 우리나라 사고구조의 급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21세기는 융합의 시대이고, 수평적인 사고방식의 시대입니다. 융합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바꾸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비즈니스 모델도 마찬가지고, 언어적인 수직관계도 수평적으로 가야 합니다.



3. 균형 감각이 필요성
세상 현상은 복잡 하여서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더라.
세상을 흑백논리로 보는 것은 위험한 사고방식이고, 더 비꼬면 머리 나쁜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균형감각이란?
균형감각이란 양극한의 정확히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 균형감각이 아니라 진정한 균형감각은 양극단을 오고 가면서 끊임없이 최적점을 탐색해 나가는 과정
균형 감각이란 동적인 감각이지 정적인 감각이 아니더라.
상황에 따라서 두 가지의 선택에서 상황에 따라서 역동적으로 바뀌니깐 그런 것들을 찾아 나가기 위해서는 결국은 끊임없이 찾아 나가는 것으로 찾아 가는 과정이 균형 감각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흑백논리가 지나친 것 같다. 기술, 정치, 등 각 분야에서 심지어 교육 분야에서도 문과 이과 구분을 짓는 것은 전 세계에서 한두 개 나라뿐이 없다고 하더라.
문과 이과를 넘나들어 보니 고등학교에서의 영어, 잘하고 수학 못하면 문과 가고, 반대면 이과 가더라.
컴퓨터 프로그램을 하다 보니 세계적으로 최신의 기술은 영어로 나오더라. 영어를 잘 해야 좋은 엔진어가 될 수 있더라.
우리나라 옛날 방식으로는 절대로 세계적이 과학자가 나올 수 없게 됩니다.
우리나라 전체로 볼 때 좋지 않을 것 같다.

한마디로
다른 분야에 대한 상식과 포용력을 가져야


도요타의 어려워 진 것은 균형감각 상실로 이어진 것이다.
효율화와 품질의 균형감각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품질을 따라 가다 보면 효율화가 떨어지고요. 효율화가 따라 가다 보면 품질이 떨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둘을 얻는 것이 경영이다. 균형감각으로 둘 사이를 오고 가면서 균형감각을 잡아내야 합니다.
동적인 개념을 가질 때 - 현대에 있어야 T자형 전문가야 하다.
예전의 전문가는 한 분야의 깊이 있는 지식이 있으면 전문가라고 했는데
그런 전문가들에게 자동차를 만들어라 하니 싸우느냐 자동차가 만들어 지지 않더라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한분야만 깊이 아는 사람은 전문가 아니구나. 다른 분야의 지식까지도 포용할 줄 알아야 전문가 구나를 깨닫게 되었답니다.
Broadmindedness

2010년 6월 10일 목요일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백인 선교사들의 종교적 믿음에 대한 강요에 대해
타코타족 오예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과의 만남이 이렇듯 침묵속에서 이루어지는 이유는
모든 언어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고, 진리에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디언들의 영혼은 말 없는 찬양 속에서 신에게로 올라가곤 했다.
신과의 만남은 홀로 있음 속에서 가능하다고 우리 인디언들은 믿었다.
우리를 만드신 이와 우리 사이에 어떤 성직자도 끼어들 필요가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종교적 체험에 대해 참견하거나 간섭하면 안 된다.

우리들 각자 신이 창조한 자식들이고,
모두가 그 안에 신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의 종교는 어떤 특정한 교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또한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 종교에는 설교도 없고, 개종이나 박해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종교를 무시하거나 비웃는 일도 없었다.
무신론자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의 종교는 교리가 아니라 마음상태였다.

자연을 제외하고는 우리에게는 사원도 신전도 없었다.

말할수 없이 신비한 원시림의 그늘진 오솔길에서,
처녀와도 같은 평원의 햇빛 비치는 가슴 위에서

현기증 나는 산 정상과 벌거벗은 바위가 우뚝 솟은 뾰족 산봉우리 위에서
보석 박힌 드넓은 밤하늘에서

얼굴과 얼굴은 맞대고 만날 수 있는 그 거대한 절대자를 위해
손바닥만한 집을 짖는다는 것은
우리가 보기엔 신을 모독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중략)

첫번째 함베데이, 곧 생애 최초의 종교적인 수행은
인디언들의 삶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때가 되면 인디언 아이는 먼저 땀천막에서
뜨거운 수증기로 자신의 몸을 정화했다.
그런 다음 모든 인간적인 욕구나 육체적인 욕망을 멀리한 채,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꼭대기로 혼자 올라갔다.
위대한 정렬이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아이는 어떤 제물이나 희생양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었다.
다만 겸허한 마음으로 위대한 정령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기에
모카신과 허리에 두르는 천 외에는 옷도 가져가지 않았다.

해가 뜨고 지는 장엄한 시간에
아이는 산꼭대기에 위치를 정하고 서서
드넓은 대지를 내려다보며 위대한 신비와 마주했다.

그곳에서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미동하지 않고 서서,
침묵 속에 위대한 정령의 힘 앞에 자신을 내맡겼다.

하루 낮과 하루 밤, 또는 이틀낮과 이틀밤 동안,
가끔은 며칠씩 그렇게 서 있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절대 고요속에서 신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 신성한 명상 상태 또는 환희의 체험을 통해 어린 인디언 신비가는
자기 존재의 최고의 행복과 근원이 되는 생명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을로 돌아오면 아이는 잠시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
다시 땀천막에서 몸을 정화하는 의식을 치를 때까지.
그런 다음에야 비로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자신이 산꼭대기에서 본 환영이나 암시에 대해선
부족 전체의 운명과 관련된 내용이 아니면 입밖에 내지 않았다.

...(중략)

얼굴 흰 정복자들은
우리 인디언들을 가난하고 단순하다고 경멸해 왔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의 종교가 재산 축적과 사치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음을 잊은 모양이다.

우리 인디언들은 소유를 탐하는 것을 하나의 덫으로 알았으며,
복잡한 사회가 안겨주는 많은 짐을
쓸데없는 유혹과 고통의 근원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따라서 인디언들이 지속적으로 도시를 발전 시키거나
물질 문명을 발달 시키지 않은 것은 무지하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소박한 인디언 현자의 눈에는
수많은 인구가 한 곳에 집중해 모여 사는 것은 모든 악의 원인이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러했다.

(출처/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김영사)

현대 한국의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



글쓴이 : 날짜 : 08-04-29 18:11 조회 : 677
현대 한국의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





"군인으로서 김영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최고의 군인이다." -존 코백 미 육군 예비역중령

25일 MBC 스페셜이 ‘영웅, 김영욱 대령’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한국계 미국인 전쟁영웅의 삶을 재조명해 관심을 모았다.

방송에 따르면 김영옥(86) 씨는 2차대전에서 이탈리아 최고십자무공훈장, 프랑스 최고훈장, 등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또한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해 불패의 신화를 쌓아 미국 은성, 동성 훈장을 받으며 전설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1919년 미국 이민 1세대의 아들로 태어난 김 씨는 1941년 군대에 입대했다. 당시 아시아인은 차별이 심해 미군에 입대할 수 없었지만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법이 바뀌어 군 입대가 허용됐다. 김 씨는 이듬해 아시아인으로 유일하게 장교 후보생이 됐다.

그는 초급 장교가 됐지만 인종 차별 때문에 전투에는 참전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바로 일본계 미국인들을 지휘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 것.

당시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은 자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소개해 수용소에 감금했다. 그들 중 일부 일본인들을 모아 442연대 100대대를 창설한 것이다. 김 씨는 100대대 2중대에 배치됐다.

기본적인 군사훈련조차 받지 않았던 일본인들을 모아 김 씨는 실전에 버금가는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다른 부대원들이 기본 교육에 치중했던 것과 달랐다. 그는 스스로 엄격하게 규정을 지키며 훈련에 임했고 다른 부대원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이 같은 훈련은 실전에 투입되면서 효력을 발휘했다. 1943년 김 씨가 이끄는 부대는 유럽에 투입됐고 이후 탁월한 작전능력을 보이며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작전참모가 됐다.

또한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이 로마 입성을 앞두고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그는 자원해 독일 진영에 침입 2명의 독일군을 납치했다. 이를 통해 독일군의 병력 배치 상황을 파악해 연합군은 손쉽게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다. 여기다 그가 속한 100연대가 독일 치하의 프랑스 브뤼에르나 비퐁텐 지역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이 지역에선 아직도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는 노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한국 전쟁에서도 김 씨의 전공은 눈부셨다. 2차 대전 후 잠시 군을 떠났던 그는 자신의 조국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입대했다. 그는 “한국을 위해 싸우고 싶었고 부분적으로 (전쟁에)미국의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며 입대 이유를 밝혔다.

참전 후 김 씨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최전방을 지원, 교착상태였던 전선을 돌파해 60㎞나 북진해 휴전선 형태가 북쪽으로 치솟은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데 기여했다. 그는 눈부신 활약으로 아시아계 최초로 백인들을 지휘하는 대대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공적에 마크 클락크 전 유엔군 총사령관은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에 최고의 군인이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김 씨는 한국 전쟁의 참상을 겪은 후 자신이 한국인임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이후 행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전쟁고아들을 후원하는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을 만들어 후원했고, 1963년에서 1965년까지 한국에서 미 군사 고문단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군의 현대화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2000년 노근리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미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정확한 진상을 알기 어렵지만 미군이 양민학살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며 미군의 치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제대 후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시민 봉사 단체들을 만들어 후원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이 할일을 묵묵히 해 냈다. 때문에 그의 공적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에 대해 한 한국인 이민 3세는 “자신이 한 일을 알리지 않고 댓가를 바라지도 않았다”며 “김영옥 대령의 삶과 업적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삶의 태도에 2차 대전 당시 그의 휘하에 있던 일본인 부대원들과 미국 내 백인주류사회 등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본보기이자 지도자로서 존경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소박했다. 그의 방은 꾸며지지 않았고 벽에 걸려 있는 한반도 지도가 유일한 장식품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현재 김 씨가 두 차례 암 수술을 받고 투병중이란 사실. 그는 다시 재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고 방송은 밝혔다.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김영옥 씨의 삶에 많은 시청자들은 “그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아이디가 ‘WHBEAN`이란 시청자는 “그 분이 한국인이란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다”며 “김영옥 대령의 고귀한 정신이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아이디가 ’JS4019`인 시청자는 “전쟁영웅이면 어딘지 모를 이데올로기적 완고함과 편협함이 느껴져야 하는데 김영옥 대령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며 “고귀한 양심, 이타적 리더쉽 등 민족을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를 화려한 수식어 없이 그는 행적으로 몸소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많은 시청자들이 그가 걸어온 삶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최근 국내에서는 김영옥 씨의 공적을 기려 무공훈장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서훈이 추진되고 있다. 뛰어난 업적과 미국 사회에서 엄청난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는 미국에서 두 번째 무공훈장을 받는데 그쳤다.


--------------------------------------------------------------------------------

레종도뇌르 받은 김영옥 대령
프랑스 최고훈장 레종도뇌르

김제완 oniva@freechal.com


2차대전의 영웅인 재미동포 김영옥 미국 육군 예비역 대령(85)이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종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받게 됐다.
한국계 미국인으론 처음 수상


▲ 김영옥 예비역 대령
1월18일 LA 프랑스총영사관과 재미 일본계 미군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 주축이 된 ‘고 포 브로크재단(Go For Broke Foundation)’에 따르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김영옥 예비역 대령에게 레종 도뇌르 무공훈장을 수여한다는 공문에 서명했다.
그리고 오는 2월4일 LA 다운타운에서 기념식을 할 예정이다.
레종 도뇌르 훈장은 국민훈장 혹은 무공훈장으로 주어지기도 하는데 한국계 미국인이 이 훈장을 받는 것은 김 대령이 처음이다.

LA의 프랑스총영사관은 선정 이유를 밝히면서 “프랑스 정부와 국민은 2차대전때 피를 흘리며 조국을 구해준 김 대령에게 무한히 감사한다. 레종 도뇌르는 흔히 슈발리에급으로 주어지나 이번 김 대령의 경우는 공적을 감안, 한 등급 위인 오피시에급으로 수여된다”고 말했다.
김영옥 예비역 대령은 수상소식을 듣고 “나는 100% 미국인이면서 100% 한국인이다. 이 나이에 훈장 하나를 더 단들 개인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 그게 한국계 후배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나름대로 뜻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이민 2세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김 대령은 진정한 군인정신을 갖고 있는 신화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2차대전시의 혁혁한 활약으로 유럽 여러나라로부터 무공을 인정받아 큰 훈장을 받았고 한국전쟁에서도 참전했지만 정작 한국정부만은 이같은 사실을 가장 늦게 인정했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다. 지난 2003년 1월 한국정부가 김영옥대령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또 같은해에 KBS 해외동포상 시상식에서 ‘사회부문’ 수상자로 결정됐다.
프랑스 “김대령에게 무한히 감사”

지금은 72년 예편한 뒤 여성과 청소년을 위한 기관을 설립하는 등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

美 위안부결의안의 숨은 주역 '김영옥'
[김동석의 뉴욕통신] 일본계 미국인 사로잡은 '위대한 영웅'
2007-03-06 19:03:35
초읽기에 들어간 미 하원에서의 '일본군위안부결의안' 통과는 미주동포의 평화 만들기를 위한 노력의 결정체이다.

필자는 2004년 9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케리 상원의원의 선거유세 지원차 뉴욕을 방문한 마이크 혼다 의원을 만났었다. 그는 필자에게 자신은 일본계이지만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영혼(Political Spritual)을 사로잡고 있는 사람은 ‘한국인’이라고 하면서 2차대전 당시 한국계 미군영웅인 고 김영옥 대령을 ‘아름다운 영웅’(Beautiful Hero)라고 소개했다. 김영옥 대령은 군인이었을 때보다도 퇴역 후 그가 미국의 아시안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온 것이 더 돋보인다고도 했다.

김영옥 대령, 일본계 미국인들의 '결의안' 지지 얻어내

혼다 의원은 필자에게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후 미국의 정치인들은 미국내 일본인들을 몰살시키려고 했었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당시 혼다 의원 본인은 갓 태어났었고, 그러한 이유로 6살 때까지 포로 같은 생활을 했다고 했다. 미국 정부는 그 후 40년이 훨씬 지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에 와서야 당시 일본인들 전체를 몰살하려고 했던 인종적 차별의 과오를 인정하고 재미 일본인 사회에 공식 사과했는데 이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한국인인 '김영옥 대령' 이었다고 하면서 필자가 한국인임을 추켜세워 주었다.

당시 필자는 미국생활 20년이 지나고 있음에도 김영옥을 단순하게 한국전쟁때 수많은 고아들을 구한 한국계 미국인 전쟁영웅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가 이같은 토로를 하는 혼다 의원 앞에서 당황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내 일본인 2세들은 자신들이 적국의 시민이 아니고 미국에 충성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했고, 태평양과 유럽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특수부대 지휘관으로 전설적인 전쟁 신화를 만들어 낸 김영옥 대령은 당시 아시안계의 유일한 지휘관이었고 일본계 참전군인들의 영웅으로 받들어졌다. 전쟁후에 김영옥 대령은 한국계지만 일본계사회의 가장 영향력이 큰 '일본계참전용사회'를 이끌었다. 로스엔젤레스 다운타운의 '일본계참전기념비'를 일본계 참전용사들은 김영옥 대령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대하여 건립했다.

1999년에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일본정부에게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이었던 마이크 혼다의원이 발의, 상정하여 통과시켰기 때문에 ‘혼다 결의안’이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계 3세인 혼다 의원이 이 결의안을 내놓자 미국내 일본인 사회가 요동쳤다. 영향력 있는 일본계 지도자들은 연일 혼다측에게 이를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하며 압력을 가했다. 어려움에 직면한 혼다 의원은 곧바로 한국계 전설적인 전쟁영웅인 김영옥 대령에게 도움을 청했다.

혼다 의원의 설명을 들은 김영옥 대령은 일본계 참전용사들의 '혼다결의안' 지지 서명을 받아서 혼다의원에게 전달했다. 혼다 의원에게 결의안 철회를 종용하던 재미일본인사회 지도자들은 2차대전 일본계 참전용사회의 지지서명을 확인하고는 결의안 반대를 접게 되었고, 그래서 캘리포니아 의회가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일본계 참전용사회는 재미 일본사회의 자부심이고 정신적 지주이다. 그 용사회의 절대적인 지도자가 전설적인 한국계 전쟁영웅인 김영옥 대령인 것이다.

◀ 생전의 김영옥 대령. 그는 지난 2003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받았다. ⓒ연합뉴스

---------------------------------------------------------------------------------------


정말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예전에 MBC에서 이분관련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특공대형식의 소부대 지휘뿐만 아니라 대규모 부대운용,첩보전까지 해내시는

다재다능하신 군인.

간혹 밴드오브브라더스의 101공수부대의 윈터스대위와 비교하시는분이 많으신데

군인으로써의 재능은 이분이 더 뛰어나신듯.

전장에 서면 모든 지형지물과 피아의 움직임이 머리속에 그대로 그려진다라고 하시더군요.

소위 말하는 "천재적 군인"

군인으로써의 재능과 천재성뿐만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완성된 "장군".

그렇지 않았다면 2차대전당시 동양인인 누가 이분을 따랐겟습니까.

더욱이 이분의 부대는 미국계 일본인으로 구성된부대.

식민지 출신의 장교가 자신들을 지휘한다면 누구나 경멸감을 가지지 않을수없을것입니다.


다음은 2차대전 당시 김영옥대령님 휘하의 한 일본군인분께서 쓰신 글입니다.


--------------------------------------------------------------------------------
김영옥 소위는 미시시피에 위치해 고도의 전투준비 상태에 있던 제 100 보병대대로 왔댜.
24살의 군인은 모든 징집병들이 너무도 많이 보아왔던 그리고 피하고 싶어하던 그런 종류의 장교였다.
죠지아의 포트 베닝에 있는 OCS ( 사관후보학교 )를 갓 나온 그는 '용맹한' 자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
그는 100대대에서 다른 장교들(처음 100대대 장교의 대부분은 백인들이었다.)의 혐오와 징집된 (일본계)병사들의 경멸을 참으며 병사들을 몰아 붙였지만, 점차적으로 그들의 존경을 얻었다.
부대와 함께 이태리에 도착하자, 전투에서의 그의 멋진 통솔력과 병사들의 복지를 위한 그의 배려로인해 곧 칭송을 받는 장교가 된다.
전쟁터에서의 그의 강인함과 용기 또한 칭찬을 받게되었다.

1943년 11월 3일, 이른 아침에 제 100대대는 치오르라노 근방의 볼레르노 강에서 세번째 도하를 명령을 받았다. 한밤중에 무지막지하게 쏟아진 포탄세례에 그 지역이 흔들리고 난후, 제 100대대와 제133 보병연대의 제2대대는 함께 출발했다.
새벽 4시가 되었을 즈음, 100대대의 B중대가 물살이 빠르고 차거운 볼테르노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니세이(Nisei·二世- 미국의 일본인 2세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부르던 호칭 )이 거친 숨을 내쉬며 차겁고 젖은 건너편 강둑을 기어 올라가 발견한 것은 지뢰밭에 한가운데에 있는 자신들 이었다.
즉시 반응한 독일군의 포대와 아군포대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병사들은 한가운데 갇혀 버리고 말았다.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비 ( 포탄 )로 인해 30명 이상의 니세이들이 전사해 버렸다. 강둑으로부터 비틀 거리며 올라간 병사들은 4마일 떨어진 그들의 목적지인 85번 국도를 향해 급히 대오를 정돈했다.
어둠속이라 어느 방향으로 중대가 나가야 할지 모르게 되는 혼란이 찾아왔다.
선두소대가 지뢰밭으로 걸어 들어가 7명의 병사를 사상자 명단에 올리고 말았다.

김의 소대는 김이 인솔하는대로 마침내 길이 보일때가지 나아갔다 되돌아 오곤했다.
겁없는 소위는 정찰을 위해 어둠속으로 홀로 나아갔다. 철모대신 니트로 만들어진 모자를 항상 착용했던 용감한 소위를 따라가는건 어둠속에서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김소위는 항상 무언가 무거운것이 그의 머리에 있으면 생각을 바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

돌담의 꼭대기에 다다라, 김소위는 그위에 서서 그의 대원들에게 전진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갑자기 독일군의 총알이 공기를 갈랐고 김소위는 땅위로 떨어졌다.
분노가 교차되던중, 로버트 오자키 병장은 용감한 소위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거나 포로가 된다는것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거의 반사적으로 그는 전투의 시끄러운 소음 너머로 고함을 질렀다.

" 착검 ! "

'반자이 (만세)!" 라는 고함과 함께 전방의 모든 니세이들이 일어서서 독일군의 총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이차대전중 이태리에서는 최초의 착검공격인 데다가, 우렁찬 '만세' 공격이 배가되어, 독일군들은 대경실색해 버렸다. 담 너머에 도착한 그들이 발견한건 아직 살아서 수류탄을 적의 기관총좌에 던지고 있는 그들의 소대장이었다.
-------------------------------------------------------------------------------
동양인..그것도 식민지의 약소국가출신인 분을 위해 목숨을 다해 돌격하는 미국군.
대단하시다란 말뿐이 안나오는군요.
그 이후에도 이분은 일본계 미국인의 존경을 받으며 지대한 영향을 미치신...
제작년 12월 29일 돌아가신것이 안타까울뿐입니다.

2010년 6월 6일 일요일

2010년 6월 2일 수요일

몸이 1000냥이면 눈은 900냥 : 매일경제

Helth & Life] 호두만한 그 안에 온갖 질병정보 다 있다
매일경제 | 입력 2010.06.02 16:23


몸이 1000냥이면 눈은 900냥이라는 말이 있다. 눈이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신체기관이라는 얘기다.

눈은 밖을 보는 감각기관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창문을 통해 집안을 들여다보듯이 눈을 통해 뇌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시신경이 뇌의 일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의사들은 안구검사를 통해 당뇨나 고혈압, 동맥경화를 찾아내곤 한다. 때로는 다발성 경화증, 뇌졸중, 중풍, 백혈병 등과 같이 많은 질환 상태까지 발견한다.


눈은 호두 크기만 한 동그란 공모양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안구(眼球)'라고 부른다. 직경이 2.5㎝쯤 되는 눈은 각막(검은자위), 동공, 홍채, 수정체, 유리체, 망막, 맥락막, 공막(흰자위), 황반, 시신경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눈을 보호하는 신체기관에는 뼈로 구성돼 있는 안와, 쿠션 기능을 담당하는 지방조직, 안구를 감싸고 있는 투명한 비닐막 같은 결막, 카메라 셔터에 해당하는 눈꺼풀, 눈이 마르지 않도록 눈물을 공급하는 눈물샘, 눈을 움직이게 하는 근육인 외안근 등이 있다. 시력은 태어났을 때는 거의 없는 상태지만 자라면서 서서히 발달해 만 5~7세 정도가 되어야 어른들과 같은 시력을 갖게 된다.

◆ 가장 흔한 안과질환 '결막'

= 눈은 뇌가 처리하는 정보 중 80%를 차지하는 감각기관이다. 또 눈은 신체 건강상태를 알려주는 바로미터로 몸이 피곤하면 눈이 먼저 뻐근해지고 심하면 핏발이 서기도 한다.

눈은 가장 바깥 앞쪽에 각막이 있다. 검은자위인 각막은 빛이 들어오는 투명한 창문과 같은 것으로 미식축구 공처럼 타원체다. 각막은 눈의 굴절이나 초점 능력의 70%를 담당하는 곳으로 시력교정수술을 할 때 이 각막을 깎아 굴절 이상을 교정한다.

검은 눈동자는 동공과 홍채로 이뤄져 있다.

동공은 눈동자 가운데 있는 구멍으로 카메라 조리개처럼 빛의 양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눈으로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한다. 홍채는 동공을 둥글고 색깔이 있는 얇은 막으로 인종에 따라 다르다. 동양인 눈이 짙은 갈색, 서양인 눈이 푸른색으로 보이는 것은 홍채 색깔 때문이다.

눈의 흰자위(공막)는 눈 바깥쪽 대부분을 감싸는 아주 단단한 조직으로 눈을 보호한다. 축구공으로 치면 바깥 표면과 같다. 결막은 흰자위와 눈꺼풀 안쪽을 덮고 있는 얇고 촉촉한 점막이다. 결막은 눈물 성분인 점액을 분비하고 혈관과 림프조직이 풍부해 외부 자극으로 인해 각막과 흰자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한편 가장 흔한 안과질환 발생지이기도 하다.

◆ 백내장 생기면 인공수정체 수술 필요

= 홍채 뒤에는 카메라 렌즈에 해당하는 수정체가 있다.

수정체는 두께를 조절해 카메라 줌 기능처럼 거리를 조절하며 초점을 맞추는데 나이가 들면서 탄력이 떨어지고 수축이 잘 안 되어 가까이 있는 사물을 보기 어려워지는 것이 바로 노안이다. 수정체가 흐려지는 백내장 역시 나이가 들수록 많이 생긴다. 백내장이 생기면 뿌옇게 변한 수정체를 제거하고 새로운 인공수정체를 넣어주는 수술이 필요하다.

각막과 수정체 사이에는 방수라는 액체가 가득 차 있다. 방수는 눈 안팎을 끊임없이 순환하며 그물망 같은 덮개를 통과해 걸러진다. 방수 순환은 안구조직에 영양을 공급하고 깨끗이 청소하는 기능을 하며 안압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

정상 안압은 10~21㎜Hg이다. 정상적인 눈은 방수가 만들어지는 양만큼 눈밖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안압이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 하지만 방수가 적게 만들어지거나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압이 줄어 안구가 작아지고 눈이 쑥 들어간다. 이와 반대로 방수가 많아지면 안압이 증가해 시신경이 약해져 녹내장이 발생하며 심하면 실명하게 된다.

망막은 카메라 필름 기능을 하는 것으로 안구 가장 안쪽에 있는 막이다. 망막 안쪽에 초점을 맺게 되면 먼 곳에 있는 물체가 흐리게 보이는 근시가 나타난다. 대부분 근시는 몸이 왕성하게 성장하는 사춘기 때 눈이 과도하게 커져 근시가 발생한다.

또 가까이에서 오래 보는 습관이나 조명, 휴식, 영양상태에 따라 수정체 조절력이 과다해져 근시가 발생하기도 한다. 시신경은 망막에 있는 빛의 수용기가 보낸 신경전달신호를 뇌로 전달한다.

◆ 눈병도 일반질환처럼 생각하고 대처를

= 눈과 관련해 낯익은 단어는 라식, 라섹, 백내장, 녹내장, 황반변성, 망막박리, 안구건조증 등이다.

라식과 라섹은 대표적인 근시수술이다.

근시는 흔히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로 교정을 하지만 안경이나 콘택트렌즈 없이 잘 보기를 원할 때, 콘택트렌즈를 끼기 어려운 눈이나 직업적인 이유로 근시수술을 한다. 근시가 심하지 않으면 엑시머레이저 수술을 하고 근시가 아주 심하면 투명수정체 제거술이나 안내렌즈 삽입술을 한다. 그 중간 근시는 라식, 라섹, 에피라식 수술을 많이 한다.

녹내장, 황반변성, 당뇨성 망막질환은 3대 실명 질환으로 불릴 만큼 위험한 질환이다.

녹내장은 안구 내부 압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져 시신경이 손상되고 시력이 약해지는 질환으로 40세 이상 성인 가운데 2%에서 나타난다. 증상이 거의 없으며 다만 정상인에 비해 시야가 좁고 어둡게 나타난다.

황반변성은 65세 이상 노인이 가장 많이 앓는 질환으로 글자나 직선이 흔들려 보이거나 휘어 보이고 물체가 비틀려 보인다. 증상이 심해지면 곧 시력이 저하되고 글을 읽을 때 글자 사이에 공백이 보이거나 그림 일부가 지워진 것처럼 보인다.

당뇨망막증은 망막 말초혈관에 순환장애가 일어나 발생하는 합병증으로 당뇨병 발병 15~20년이 지나면 거의 모든 환자에게 발병한다.

망막박리는 망막이 눈의 껍질 안쪽면(맥락막)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으로 망막이 떨어지면 맥락막에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망막이 손상되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망막박리를 치료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실명하게 된다.

안구건조증은 눈물이 빨리 마르거나 눈물 생성이 부족해지면서 눈물막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발생하는 질환이다. 이 질환은 사계절 내내 발생하지만 에어컨 사용이 늘어나는 여름에는 실내 습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안구건조증이 심해지기 쉽다.

◆ 건강의 척도 '눈'

= 눈에 이상이 생기면 일반인들은 매우 당황하게 된다. 며칠 놔둬도 되는지, 아니면 급하게 병원에 가야 하는지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이런 점에서 눈병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알아두면 많은 도움이 된다.

눈에 무언가 들어 있는 느낌이 들면 눈꺼풀이나 결막, 각막에 원인이 있을 확률이 높다. 이는 피로나 무리한 근거리 작업, 건조한 곳, 특히 냉방에 오래 있을 때 발생한다. 이물감이 느껴지되 시력이 떨어지지 않으면 바깥공기를 쏘이거나 가습기를 틀면 좋아진다.

눈물이 계속 흐르는 것은 각막염이나 눈물이 내려가는 길이 막혀서 발생한다. 이럴 때는 대개 안과에서 눈물길을 뚫어주는 수술을 해야 한다. 눈곱이 고름같이 심하게 나오면 결막뿐만 아니라 각막이나 눈물주머니에 염증이 있다는 얘기다. 속눈썹에 의한 자극이 원인일 수도 있다. 양쪽 눈이 다같이 튀어나올 때는 대부분 갑상선 항진증이 원인이며 한쪽 눈만 튀어나오면 안구 뒤에 염증이 있거나 종양이 있는 가능성이 높다. 어린이 안구가 돌출될 때는 악성종양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빨리 안과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눈앞에 벌레 그림자가 보이는 증상'은 유리체(망막 앞에 찐득찐득한 액체)에 부유물이 떠 있어 망막에 그림자를 지게 하는 유리체 혼탁 혹은 비문증이라고 볼 수 있다. 벌레 그림자가 갑자기 수십, 수백 개로 보이거나 검은 먹물을 쏟아놓은 것처럼 증상이 심하면 망막출혈이나 망막박리 가능성이 있는 만큼 지체하지 말고 병원에 가야 한다. 전깃불을 보는데 눈앞에 달무리나 무지개 같은 것이 보인다면 이는 급성 녹내장 증상으로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 급성 녹내장은 머리와 눈이 몸시 아프고 토하기도 한다. 햇빛을 볼 때나 밝은 곳에서 눈이 심하게 부시면 눈이 건조하거나 눈썹이 각막을 찔러 작은 상처가 나 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new eye닥터 119(황금시간 출간) / 안경 없이 1.0 세상을 보는 즐거움(서울문화사 출간)

[이병문 의료 전문기자]

팔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