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3일 금요일

유전자의 눈으로 본 생명 최재천교수

2001년 1월 26일 일본 도쿄 신주쿠 근방 신오쿠보 역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전동차에 치여 숨진 한국 청년 이수현, 당신이 태어난 나라도 아닌 곳에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테레사 수녀, 철학과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였으면서도 나이 서른에 다시 의학 공부를 시작하여 38세 때부터 평생토록 아프리카에서 그곳 원주민들을 위해 의료 봉사를 한 알베르트 슈바이처,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 스님… 우리는 이처럼 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바친 이들에 대해 끝없는 존경을 표한다. 희생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희생을 진화의 입장에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희생이란 이처럼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임에도 우리 주변에는 크고 작은 희생의 미담이 끊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다윈의 또 다른 고민이었다. 철저하게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기반을 둔 그의 자연선택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쉽지 않은 현상이 바로 자기희생(self-sacrifice) 또는 이타주의(altruism)였다. 어떻게 남을 돕기 위해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희생하는 행동과 심성이 진화할 수 있을까? 다윈은 이 문제를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했다. 특히 개미나 벌과 같은 이른바 사회성 곤충(social insect)의 군락에서 벌어지는 일개미나 일벌들의 번식 희생은 다윈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불가사의한 생명 현상이었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번식을 위해서 행동하도록 진화했다는 다윈의 이론으로는 각기 다른 생명체들로 태어나 스스로 번식을 억제하고 오로지 여왕으로 하여금 홀로 번식할 수 있도록 평생 봉사하는 일개미나 일벌들의 헌신적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윈은 [종의 기원] 제1판 8장에서 사회성 곤충의 극단적 이타주의에 대해 “내게는 언뜻 극복하기 어려운 특별한 난관이며 실제로 내 이론에 치명적인” 문제라고 토로한 바 있다. 다윈은 끝내 이 문제에 관한 한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타주의적 행동에 처음으로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한 윌리엄 해밀턴

이타주의적 행동이 어떻게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개체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진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처음으로 제공한 사람은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1936~2000)이었다. 포괄적응도 이론(inclusive fitness theory) 또는 혈연선택론(kin selection theory)으로 알려진 해밀턴의 이론은 개체 수준에서는 엄연한 이타주의적 행동이 유전자 수준에서 분석해보면 사실상 이기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흔히 rB > C라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공식으로 알려진 해밀턴의 법칙(Hamilton’s rule)에 따르면 이타적인 행동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적응적 이득(B, benefit)에 유전적 근친도(r, genetic relatedness)를 곱한 값이 그런 행동을 하는 데 드는 비용(C, cost)보다 크기만 하면 그 행동은 진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유전적으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타적인 행동이 진화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사실 해밀턴보다 일찍 이 문제의 해결에 단서를 제공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전설적인 영국의 유전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잭 홀데인(J. B. S. Haldane, 1892~1964)이었다. 물리학자들은 종종 사석에서 뉴턴·아인슈타인·파인만 등을 들먹이며 생물학계에도 이들만큼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가 있느냐고 윽박지른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언제든 급하면 다윈의 품에 안길 순 있지만, 그는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그런 순발력 있는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도 내세울 수 있는 분이 한 분 있다. 그가 바로 홀데인이다. 내가 그를 소개하며 굳이 ‘전설적인’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그에 관한 많은 일화가 아직도 마치 구전문화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최첨단 과학계에서 구전문화라니?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를 거쳐 오랫동안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교수생활을 한 그는 물론 그가 남긴 많은 연구 업적으로도 유명하지만, 대학 앞 선술집 등 여러 형태의 사석에서 남긴 촌철살인의 우문현답들로 더 유명하다. 어느 날 진화학자로서 조물주의 마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곧바로 조물주께서는 “딱정벌레에 대해 지나친 호감(an inordinate fondness for beetles)을 가졌던 분이었던 것 같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딱정벌레는 기재된 종만 무려 35만 종에 이르는데, 이는 전체 곤충 종수의 거의 절반이다. 홀데인의 상상 속에는 태초에 세상을 만드시던 그 엿새 중 어느 날 진흙으로 딱정벌레 한 마리를 빚으신 다음 숨을 불어넣으시곤 스스로 만드신 딱정벌레의 귀여움에 정신이 빠져 그만 멈추지 못하고 계속 다양한 모습의 딱정벌레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던 하느님의 모습이 그려졌던 것이다. 그가 순간적으로 내뱉었다는 이 같은 말들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구전자들마저 이제 연로하여 하나 둘씩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분들이 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홀데인 어록을 정리해둬야 할 텐데.


“형제 2명, 혹은 사촌 8명의 목숨이라면 내 목숨을 버릴 수도?”

또 어느 날 누군가가 홀데인에게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즉시 “내가 만일 형제 둘이나 사촌 여덟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을 버릴 용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형제는 평균적으로 서로 유전자의 50%를 공유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평균이 아니라 확실하게 50%이다. 번식을 위해 난자와 정자를 만들 때 이른바 감수분열(meiosis)이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가진 유전자의 정확하게 50%를 넣어주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잘 났어도, 그래서 내 유전자를 보다 많이 남겨주고 싶더라도 내 난자와 정자에 내 유전자의 50%가 아니라 하다못해 51%라도 꾸겨 넣는다면 내 아이는 기형으로 태어나고 만다. 부모-자식 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정확하게 50%이고 형제자매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물론 부모가 같을 경우, 평균 50%이다. 배다른 형제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25%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흔히 사촌이라 부르는 대상을, 유전적으로 계산하면 팔촌이라고 불렀더라면 훨씬 더 정확했을 뻔했다. 예를 들어, 나와 내 이종사촌 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나와 어머니의 관계가 50%이고, 어머니와 이모의 관계가 또 50%이고, 이모와 그의 딸의 관계가 역시 50%이니 모두 곱하면 12.5% 즉 1/8이 된다. 그래서 홀데인은 형제 둘 또는 사촌 여덟의 유전자를 합하면 내 유전자만큼 된다는 걸 그리 말한 것이다. 이 명언의 현장을 전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날 그 자리에서 홀데인의 대답을 듣고 곧바로 머리를 끄덕이며 웃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전한다. 그처럼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 우리 중에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일벌은 왜 평생 불쌍하게 일만 하다 죽는가?

해밀턴은 그의 혈연선택 이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예로 개미, 벌, 말벌 등 이른바 벌목(Order Hymenoptera)에 속하는 사회성 곤충을 택했다. 벌목의 곤충들은 매우 독특한 성 결정체계(sex determination system)를 갖고 있다. 개미와 벌 사회의 암컷들은 대부분의 유성생식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암수의 유전자가 교합하여 태어나지만, 수컷들은 모두 미수정란으로부터 탄생한다. 다시 말하면 암수의 유전자가 합쳐지면 암컷이 되지만 수컷은 오로지 암컷의 유전자만으로 만들어진다. 세상에 이렇게 기이한 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수컷의 유전자가 개입하지 않아야 수컷으로 태어난다니 말이다. 그래서 개미와 벌의 수컷은 우리처럼 염색체를 한 쌍(diploid, 이배체)으로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한 벌(haploid, 반수체)만 지닌다. 인간의 염색체를 가지고 설명해보면, 여자들은 그들의 세포 안에 모두 23쌍 즉 46개의 염색체들(n=46)을 가지고 있지만, 남자들은 달랑 한 벌 즉 23개의 염색체(n=23)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성 결정체계를 우리 인간을 포함한 많은 동식물의 체계인 이배체(diploidy)와 달리 반수이배체(haplodiploidy)라고 부른다.

벌목 곤충의 반수이배체 기제는 이미 19세기 중반에 밝혀졌다. 지금은 폴란드 영역이지만 당시 프러시아 실레시아 지방의 신부였던 요한 지어존(Johann Dzierzon)이 1845년에 내세운 가설을 1856년 생물학자 칼 폰 시볼트(Carl von Siebold)가 현미경을 이용하여 장차 수벌로 발생할 난자에는 정자가 진입한 흔적이 없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확증해주었다.



이 같은 메커니즘은 사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기 전부터 알려진 지식이었지만 그것의 진화적 의미는 그로부터 무려 100년이 흐른 후에야 밝혀진 것이다. 해밀턴은 1964년 이론생물학 저널(The Journal of Theoretical Biology)에 “사회 행동의 유전적 진화(The Genetical Evolution of Social Behaviour)”라는 제목의 다분히 수학적인 논문을 게재하며 벌목 곤충의 반수이배체 성 결정 메커니즘과 사회적 진화의 관계를 설명했다.

이 논문에서 해밀턴은 이를테면 개미 사회에서 일개미들이 왜 스스로 번식을 포기하고 어머니인 여왕개미로 하여금 모든 번식을 도맡아 하도록 평생 돕기만 하는지에 대해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두 일개미 자매는 어머니인 여왕개미로부터는 우리와 같은 이배체 생물과 마찬가지로 50%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지만, 그 어느 날 혼인비행 때 당신의 정자를 어머니의 몸속에 넣어주곤 세상을 떠난 아버지 수개미로부터는 그의 유전자 전부(100%)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형제·자매들끼리 평균 50%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이배체 생물과 달리 평균 75%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어떻게 이런 계산이 나오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개미 제국의 발견(1999)]이나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2007)]을 참조하기 바란다. 일개미는 만일 스스로 자기 자식을 낳는다 하더라도 그의 몸에 자기 유전자의 50%밖에 남겨주지 못한다. 따라서 개미 사회의 번식을 순전히 유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스로 번식을 하여 자기 유전자의 50%를 남기는 것보다 여왕개미를 도와 자매인 일개미를 낳게 하여 자기 유전자의 75%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에 스스로 번식을 포기하는 이타적 행동이 진화한 것이다.


일벌 입장에서는 희생이 번식보다 유전자 관점에서 유리하기 때문

해밀턴의 이론에 의하면 번식이란 결국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복사체들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버드대학의 사회생물학자 윌슨(Edward O. Wilson)은 영국 작가 버틀러(Samuel Butler)의 표현을 빌려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흔히 뜰에 돌아다니는 닭들이 각자 모이도 쪼아먹고, 때론 싸움도 하고, 짝짓기도 하고, 알을 낳고 살다가 죽는 걸 보며 닭이라는 생명의 주인은 당연히 닭이라는 개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버틀러와 윌슨의 관점에서 보면 닭은 기껏해야 몇 년 동안 알을 낳고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 닭을 만들어낸 유전자는 그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고 어쩌면 영원히 그의 후손으로 이어져갈 존재이다. 나는 2001년에 에세이집을 한 권 출간하며 제목을 [알이 닭을 낳는다]로 붙였다. 흔히 ‘죽음의 시인’이라고 알려진 최승호 시인이 붙여준 제목이다. 버틀러나 윌슨이 길게 설명한 내용을 보다 간략하고 인상적으로 표현했다고 자부해본다.


내 유전자가 진정한 내 생명의 주인

해밀턴은 우리에게 유전자의 눈높이 또는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했다. 유전자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은 언뜻 허무하고 냉혹해 보인다. 지금 이 순간 엄연히 숨 쉬고 있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내가 내 삶의 주체가 아니고 내 삶의 이전에도 존재했고 내가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 내 유전자가 진정한 내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자칫 염세주의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다. 나는 벌써 25년 이상 대학 강단에서 유전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그런 강의를 하는 거의 매 학기마다 어김없이 한두 명의 학생들이 나를 찾아온다. 주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전공한 학생들인데 어느 날 졸지에 내가 씌워준 유전자 렌즈로 보는 세상이 너무나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삶이 무의미해졌다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나는 그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고. 그런데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했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홀연 마음이 평안해지더라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마음을 비울 수 있다. 비울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 한복판에 커다란 여백이 생기는 걸 느끼게 된다. 이 세상 모든 종교가 다 우리더러 마음을 비우라지만 그처럼 어려운 일이 어디 또 있으랴. 그런데 유전자 렌즈를 끼면 저절로 마음이 비워진다.



그런 다음 나는 그 학생들에게 꼭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를 읽으라고 권한다. 책 한 권이 하루아침에 인생관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수 있을까? 내겐 [이기적 유전자]가 그런 책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도킨스가 해밀턴의 이론을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준 책이다. 도킨스는 긴 진화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개체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고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유전자라고 설명했다.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경우, 사실상 개체들이 직접 자신들의 복사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후손에 전달되는 실체는 다름 아닌 유전자이기 때문에 적응 형질들은 집단을 위해서도 아니고 개체를 위해서도 아니라 유전자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에 도킨스는 개체를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라 부르고, 끊임없이 복제되어 후세에 전달되는 유전자 즉 DNA를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이라고 일컫는다. 개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말지만 그 개체의 특성에 관한 정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DNA, 불멸의 나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생명, 적어도 지구라는 행성의 생명의 역사는 유전자의 역사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수많은 생명체가 태어났다 사라져 갔어도 그 옛날 생명의 늪에서 우연히 탄생하여 신기하게도 자기와 똑같은 복사체를 만들 줄 알게 된 화학물질인 DNA와 그의 후손들이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 엄청난 생물다양성을 창조해낸 것이다. 각각의 생명체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분명히 한계성(ephemerality)을 지니지만 수십 억년 전에 태어나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DNA의 눈으로 보면 생명은 엄연한 영속성(perpetuity)을 띤다. 지구의 생명의 역사는 DNA라는 매우 성공적인 화학물질의 일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댓글 없음:

팔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