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3일 금요일

자연선택의 단위는 집단인가 개체인가? 최재천교수

http://navercast.naver.com/science/biology/2473

1960년대에 접어들며 진화생물학은 커다란 개념적 혁신을 맞는다. 진화생물학이 그 논리적 기초를 다윈의 자연선택론에 둔다고는 했으나 많은 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의 단위와 대상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생물은 모두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이나 종의 보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도록 진화했다고 믿었다. 이 같은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for the good of group)’라는 논리는 스스로 번식을 자제하는 집단조절기능을 가진 종들만이 이 지구상에 남아 있고 그렇지 못한 종들은 자원고갈로 인해 끝내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이른바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에 입각한 것이다. 이 같은 집단선택설적 자연선택 이론은 다윈의 개체중심적 이론에 어긋나는 것으로 특수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한 실제에 적용되기 어렵다.


자연선택의 단위는 집단인가 개체인가?

가상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바닷가 벼랑에 서식하고 있는 어떤 갈매기 집단을 상상해 보자. 갈매기는 대개 암수가 한번 짝을 지으면 평생토록 같이 사는 전형적인 일부일처제 동물이다. 이 집단의 갈매기들은 암수 한 쌍이 해마다 알을 둘만 낳아 기른다고 가정하자. 따라서 자원을 지나치게 고갈시키는 일도 없다고 하자.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대대로 유전된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날 이 집단에 세 개의 알을 낳는 돌연변이가 발생했다고 하자. 그리고 알을 셋이나 낳은 쌍도 세 마리의 새끼를 키우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새끼들이 다 잘 자라 각자 또 번식을 하고, 또 그 새끼들이 또 번식하고 하는 식으로 몇 세대를 지나게 되면 이 집단에는 ‘세 알 유전형(genotype)’이 원래의 ‘두 알 유전형’보다 훨씬 많게 될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네 알 유전형’도 생겨날지 모른다. 알을 더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더 많은 새끼들을 키워낼 수 있다면 갈매기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많은 알을 낳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알의 수는 부모가 키울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조절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한 둥지 내의 알의 수는 부모의 부양능력과 여러 환경요인의 영향아래 가장 많은 새끼들을 배출하도록 자연선택된 적응의 결과이다. 개체가 집단의 존속을 위해 자발적으로 산아제한을 하는 체제는 결코 진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체들의 이기적인 행동의 전파를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윈의 후예를 자청하던 생물학자들도 오랫동안 이 문제를 명확하게 읽어내지 못했다. 폰 프리쉬(Karl von Frisch), 틴버겐(Nikko Tinbergen) 등과 함께 1973년 노벨 생리 및 의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의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 같은 위대한 학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렌츠는 1966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공격성에 대하여(On Aggression)>에서 맹수들이 종종 송곳니를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상대를 물어 죽일 듯이 으르렁거리지만 좀처럼 목숨을 앗을 정도로 싸우지는 않는 까닭으로 다분히 집단선택설적 설명을 제시했다. 싸울 때마다 번번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개체들의 집단은 결코 오래 버틸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자제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설명 논리를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펼치다가 끝내 집단선택설의 원흉으로 낙인 찍힌 비운의 조류학자가 있다. 베로 윈-에드워즈(Vero Copner Wynne-Edwards, 1906-1997)는 새에 관한 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1962년에 출간한 <사회적 행동에 관련한 동물의 분산(Animal Dispersion in Relation to Social Behavior)>에서 동물 개체군의 자기조절 능력이 집단 수준에서 진화한 적응이라는 주장을 너무 대대적으로 하는 바람에 그 이전에 비슷한 주장을 펼쳤던 다른 많은 학자들의 오명을 온전히 홀로 뒤집어쓰고 말았다.


윌리엄 해밀턴 : 자연선택의 단위는 유전자

자연선택이 집단보다는 유전자 수준에서 훨씬 더 보편적이고 강력하게 일어난다는 걸 일깨워준 것은 1964년에 발표된 윌리엄 해밀턴의 논문이었지만 집단선택설에 대한 직접적인 포문을 연 사람은 조지 윌리엄즈(George C. Williams)였다. 당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후 연수과정을 밟고 있던 그는 1966년 <적응과 자연선택(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진화생물학이 집단유전학의 도움으로 이른바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 또는 ‘현대적 종합(Modern Synthesis)’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오류들이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자연선택이 종종 개체보다 집단의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윈-에드워즈의 주장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해밀턴의 논문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 후 1976년에는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역시 해밀턴의 이론을 바탕으로 집단선택설에 의한 설명들의 오류를 조목조목 파헤쳤다.

하지만 해밀튼의 50여 쪽에 이르는 수학적 논문과 더불어 윌리엄즈와 도킨스의 책이 구구절절이 설명한 집단선택설의 모순을 미국의 만화가 라슨(Gary Larson)은 만화 한 컷으로 해치웠다. 설치류의 동물 나그네쥐(lemming)는 오랫동안 자살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치티(Dennis Chitty) 교수의 연구로 결국 그들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게 아니라 미처 눈이 채 녹지도 않은 들판에서 먹이를 찾아 떼로 돌아다니다가 벼랑 끝에서 멈추지 못하고 차가운 강물에 빠져 죽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어쨌든 그들이 이처럼 떼죽음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시하는 ‘이론’은 철저하게 집단선택설의 관점을 지닌 것이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너도 나도 살려 하면 모두가 살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일부 ‘숭고한’ 나그네쥐들이 동료들을 위해 죽어준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라슨은 그의 만화에서 그 숭고한 나그네쥐들 중 홀연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돌연변이 개체의 출현을 상상한다 만일 구명대를 두르고자 하는 이기적 성향이 유전하는 변이라면 이듬 해 봄에는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나그네쥐가 더 많아질 것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귀한 유전자들은 숭고한 나그네쥐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지만 이기적 유전자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집단 수준의 선택은 개체 수준의 선택을 당할 수 없다. 집단선택은 그만큼 일어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 유전자도 개체의 번식을 통해야만 자신의 복사체들을 퍼뜨릴 수 있다. 한 개체내의 유전자들의 운명은 그 개체에게 달려있다. 다윈의 고민 두 가지에 대한 분석을 다룬 저서 <개미와 공작(The Ant and the Peacock, 1991)>에서 크러닌(Helena Croni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전자들은 스스로 발가벗고 자연선택의 심판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꼬리나 가죽, 또는 근육이나 껍질을 내세운다. 그들은 또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이나 기막힌 위장술, 배우자를 매료시키는 힘, 훌륭한 둥지를 만드는 능력 등을 내세운다. 유전자들의 차이는 이러한 표현형(phenotype)의 차이로 나타난다. 자연선택은 표현형적 변이에 작용함으로써 유전자에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들은 그들의 표현형적 효과의 선택가치(selective value)에 비례하여 다음 세대에 전파된다.


자연선택은 유전자, 개체, 집단, 그리고 심지어는 종의 수준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적응(adaptation)은 표현형으로 나타난다. 선택의 대상(object)과 결과(effect)는 종종 다를 수 있다. 철학자 엘리엇 소버(Elliott Sober)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선택 장난감(selection toy)’을 가지고 이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했다. 원통형으로 되어 있는 이 장난감에는 맨 위층으로부터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작은 크기의 구멍들이 뚫려 있다. 만일 가장 작은 구슬들의 색깔이 녹색이라면 맨 아래층에는 결국 작은 녹색 구슬들만 모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제일 작은 구슬을 선택한 것이지 녹색 구슬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선택의 대상(selection of)은 작은 구슬이었는데 결과적으로(selection for) 작은 구슬들의 색깔인 녹색도 선택된 것이다. 자연선택은 표현형에 작용하고, 그 결과로 후세에 전달되는 것은 유전자이다.


사라지지 않는 집단선택설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실체(entity)에 대한 논의는 크게 단위(unit)와 수준(level)으로 나뉘어 이뤄지지만, 이 둘은 때로 혼용되며 종종 혼란의 여지를 남긴다. 일찍이 도킨스는 자연선택의 과정에는 복제자(replicator)와 운반자(vehicle)가 관여하는데, 선택의 단위에 대한 논의는 운반자가 아니라 복제자에 초첨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철학자 헐(David Hull)은 복제자의 개념에는 사실 복제의 대상 외에도 선택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실체인 교류자(interactor)가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과정이란 “교류자들의 차등 절멸과 확산이 그들을 만들어낸 복제자들의 차등 보전을 일으키는 과정(a process in which the differential extinction and proliferation of interactors cause the differential perpetuation of the replicators that produced them)”이라는 헐의 논리에 따르면, 선택의 수준은 바로 교류자를 묻는 것이고 단위는 복제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의 대상, 단위, 또는 결과에 비해 선택의 수준은 훨씬 더 다양할 수 있다. 작게는 유전자, 세포, 생명체(organism)로부터 크게는 친족(kinship), 집단, 심지어는 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 수준에서 선택은 일어날 수 있다. 선택의 수준 논의에서 유전자 선택(genic selection)의 관점을 제외할 수는 절대 없지만 논쟁의 열기는 주로 개체와 집단간에 벌어진다. 다윈은 이 점에 있어서 사뭇 혼란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그의 자연선택 이론은 기본적으로 개체중심적이지만 1871년에 출간한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 사회에서 이타주의 또는 도덕적 행위가 어떻게 발생하고 유지되는지를 설명하려면 집단간의 경쟁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부족 내에서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유리한 점이 별로 없을지 모르지만,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많은 집단은 그렇지 못한 집단에 비해 훨씬 유리하다. 집단에 충성하려는 성향이 강하고 용감하며 타인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있어서 항상 다른 사람을 도울 자세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 또한 자연선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부족들간에는 하나의 부족이 다른 부족을 대체해가는 과정이 진행되므로,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도덕성이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므로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차지하는 수적 비중이 점차 늘어나게 될 것이다.


다윈의 이 같은 모호함에 힘 입은 바 있는지 윌리엄즈와 도킨스 등의 통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후반부터 데이빗 슬론 윌슨(David Sloan Wilson), 엘리엇 소버, 마이클 웨이드(Michael Wade)를 비롯한 일군의 진화학자들은 집단선택설이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고 실제로도 몇몇 특수한 조건만 맞으면 일어난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이른바 ‘다중수준 선택(multi-level selection)’으로 알려진 이들의 이론은 나름대로 설명력을 지니지만 진화의 역사에서 실제로 얼마나 빈번하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다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철학자 데이빗 헐(David Hull)은 이 같은 혼란은 근본적으로 개체와 집단이 지니고 있는 정의의 모호함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얘기하는 개체의 범주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딸기밭을 한 가득 메우고 있는 각각의 딸기 개체들은 종종 땅 속 줄기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의 딸기 줄기를 뽑아 들면 서로 독립적인 개체인 줄 알았던 여러 개체들이 줄줄이 딸려 올라온다. 땅 위에서는 분명히 서로 다른 개체처럼 제가끔 벌 나비를 유혹하며 번식 경쟁을 벌이지만 땅 속에서는 하나의 개체이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개미나 꿀벌의 군락은 분명히 많은 개체들로 이뤄져 있지만 전체가 대단히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조직이다. 그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개체처럼 유기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종종 ‘초유기체(superorganism)’라고 불린다. 이렇게 보면 생물계의 모든 조직은 결국 넓은 의미의 개체이며, 모든 개체는 다 보다 작은 구성체들의 집합이다.




에드워드 윌슨 : 다시 집단선택설로?

선택의 수준 문제를 두고 세계 최고 권위의 개미학자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행보가 주목을 끌고 있다. 윌리엄즈와 더불어 자칫 아무도 읽지 않을 해밀턴의 1964년 논문의 중요성을 일깨워 우리 모두가 유전자 렌즈를 끼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줬던 그가 최근 홀연 포괄적응도 개념의 혈연선택론에 대한 그의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일종의 폭탄 선언을 한 것이다. 집단선택설의 부활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데이빗 슬론 윌슨이 1970년대 중반 잠시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생활하던 시절 그와 가깝게 지냈던 에드워드 윌슨, 이 두 윌슨이 최근 다시 의기투합하여 진화, 적어도 사회성의 진화에는 유전자나 개체보다 집단 수준의 선택이 훨씬 더 중요했다는 주장을 들고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참으로 난처한 경험을 했다. 2005년 미국 텍사스의 오스틴에서 열린 인간행동및진화학회(Human Behavior and Evolution Society)의 기조강연에서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강연장을 가득 메운 해밀턴 추종자들에게 그의 심경 변화에 대해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야속하게도 해밀턴이 세상을 떠난 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공적이 다분히 부풀려진 감이 있다는 발언으로 장내는 이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회생물학 논란으로 반대 진영의 비난에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진 윌슨 교수인지라 장내의 분위기에 별로 아랑곳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은 애꿎게 강연장 중간쯤에 앉아 있던 나를 돌아보며 어깨를 들먹여 보였다. 그 날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아마 내가 유일한 윌슨 교수의 제자였던 것 같다. 강연이 끝난 후 사람들은 정작 윌슨 교수는 놓아둔 채 총총히 방을 빠져나가며 내게 다가와 어찌 된 일이냐며 따져 물었다.

사실 윌슨 교수는 선택의 수준에 관하여 초지일관 애매한 입장을 취해왔다. 개미를 연구하는 특수성 때문인지 그는 늘 해밀턴의 혈연선택을 군락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한다고 하여 우리들을 당황스럽게 하곤 했다. 그의 자서전 격인 <자연주의자(Naturalist, 1994)>에 보면 해밀턴 이론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던 그의 모습이 군데군데 묘사되어 있다. 그는 마이애미로 가는 열차 안에서 처음으로 해밀턴의 논문을 읽는다. 그는 “나는 처음에는 ‘이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에 온 힘을 다해 거부하려 했다”고 쓰고 있다. 열차를 타고 가며 또 “나는 가끔 눈을 감고 대안을 찾아보려 노력했다”고도 썼다. 그러나 마이애미에 도착한 이른 오후 “나는 포기했다. 나는 개종하여 해밀턴의 손 안에 나를 맡겼다”라고 토로한다. 그 후 윌슨 교수는 해밀턴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그를 하버드에 모셔오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역시 <자연주의자>에 보면 훗날 호혜성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 이론을 개발한 트리버즈(Robert Trivers)가 해밀턴의 이론을 보완한 것을 구태여 “끝내 해밀턴의 논리에서 실수를 찾아낸 것은 바로 트리버즈였다”라고 표현한 걸로 보아 윌슨 교수는 해밀턴의 이론에 대한 불편함을 끝내 떨쳐내지 못했던 것 같다.


자연선택의 수준은 개체인가 집단인가?

두 윌슨 교수가 공동 저술한 2007년 논문 ‘사회생물학의 이론적 기초를 다시 생각한다(Rethinking the Theoretical Foundation of Sociobiology)’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집단 내에서는 이기주의가 이타주의를 이긴다. [그러나] 이타적인 집단이 이기적인 집단을 이긴다. 다른 모든 것은 사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선택이 노는 물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에 관한 논의가 또다시 시끄러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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