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의 서사시라고 하는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대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내용은 점토판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바로 성경이란 개잡서 속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와 너무나도 흡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의 이름과 주인공의 이름 정도만 다를 뿐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을 구사하던 수메르인들이 설마하니 이름없이 떠도는 유대인들의 홍수 이야기를 베꼈겠는가? 당시 수메르 등지에서 노예나 장사치로 떠돌던 아피루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남의 신화를 그대로 베껴 자신들의 표절개잡서인 성경이란 구라경을 각색했다는 것은 신화학에 대해 약간의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다.
세상이 물에 잠겨 모든 생명이 전멸하고 오직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노아와 그 가족, 그리고 방주에 탄 동물들만이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는 생각할수록 공포 그 자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원형은 따로 있다. 바로 수메르의 홍수신화다. 수메르의 점토판에 전해져 내려오는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거의 흡사하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이러한 홍수 이야기가 전 세계 모든 대륙에 500여 개나 퍼져 있다는 것이다. 중동 지방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에 전설이나 설화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고고학자들은 1만년을 전후하여 실제로 지구상에 대홍수가 있었다고 주장 한다. 이집트의 스핑크스 상에 남아있는 물결의 흔적이나 아메리카 대륙의 비라코차, 케찰코아틀 등의 신화 등을 예를 들어 대홍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증명하려 한다. 어느 한 곳에서 시작된 대홍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 것인지, 실제로 대홍수가 지구 전체에 일어나 이곳저곳에서 제각각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그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인지는 더 연구해봐야 할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신들은 자신들이 만든 인간들이 말을 잘 안 듣고 제멋대로 행동하자, 이를 괘씸하게 생각하여 대홍수를 일으켜 모조리 없애기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인간을 창조한 에아(엔키) 신은 인간들을 가엽게 여겨‘지우수드라'를 몰래 불러 벽을 통해 대홍수를 일으키기로 한 신들의 결정을 알렸다. 그리고 살아남으려면 거대한 방주를 만들고 모든 식물의 종자와 동물 암수 한 쌍을 실으라고 하였다. 이에 지우수드라는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 엔키 신이 일러준 대로 동물들과 식물의 씨앗을 실었다. 그러자 곧이어 하늘이 새까맣게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엄청난 폭풍우가 쏟아치기 시작하였다. 무시무시한 폭풍우는 6일 동안 계속되며 온 세상을 물로 뒤덮고 말았고 7일째가 되자 신이 가르쳐준 대로 폭풍우가 멈추고 하늘이 맑게 개였다. 이에 지우수드라는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머물 곳을 찾아보았다. 지우수드라 일행이 탄 배는 물결 위를 흐르고 흘러 마침내 니시르산 꼭대기에 가서 멈추었다. 이곳에서 다시 6일을 보낸 지우수드라는 7일째 되는 날 물이 빠졌나 알아보기 위해 창문을 열고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그러나 온 세상이 물에 잠겨 버렸기 때문에 앉을 곳 을 찾지 못한 비둘기는 다시 돌아오고 말았고 다시 제비를 날려 보냈지만 역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렇지만 지우수드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번에는 까마귀를 날려 보냈더니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물이 빠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지우수드라 는 배의 문을 열고 나와 음식을 차려놓고 신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올렸고 우주 공간에서 굶주림에 떨고 있던 신들이 파리 떼처럼 꼬여들어 제물을 먹었다고 하며, 이후에 지우수드라(우트나피쉬팀)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신들의 거처라고 불리는 낙원‘딜문’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위의 내용은 바로 수메르의 점토판에서 발견된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대홍수의 기록이다. 노아의 방주하고 뭐가 다른가? 성경이란 잡서와의 차이는 지우수드라가 노아로 바뀐 것과 수메르 신화의 니시르 산이 아라라트 산으로 바뀐 정도일 것이다. 수메르 문명이란 말은 있어도 유대문명이란 말은 없다. 역사적으로 야훼 개잡신을 추종하는 파괴적인 종교를 남겨놓은 것외에는 유대인들이 남겨놓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네티즌들의 편리를 위해 노아의 방주 이야기도 아래에 첨부한다. 눈이 있고 생각할 머리가 있다면 잘 비교해 보길 바란다.
노아의 방주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대홍수 이야기다. 지상에 인간들이 자꾸 불어나자 이를 창조한 신 야훼는 어느 날부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비롯하여 동물과 식물들을 홍수를 일으켜 모조리 지상에서 쓸어버릴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노아는 어느 날 잣나무로 거대한 방주를 만들 것을 계시받는다. 그리하여 자식들과 더불어 거대한 방주를 만들고 모든 동물들을 암수 한 쌍씩 태우고 식물들의 씨앗을 실은 뒤 방주의 문을 닫는다. 그러자 검은 비구름이 몰려와 폭우가 40일 동안 퍼붓기 시작하여 마침내 세상이 모두 물에 잠기고 말았다. 대홍수로 인하여 모든 생명들이 멸종되고 오직 방주 안에 있던 노아의 가족들과 동식물들만이 목숨을 건졌다. 거센 물결 위를 떠돌던 방주는 아라라트 산에 가 닿았고, 이에 노아는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냈는데 앉을 곳을 찾지 못한 채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는데, 마침내 비둘기가 나뭇잎을 물고 온 것을 보고 세상에 물이 빠진 것을 알고는 방주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이윽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제단을 쌓고 제물을 잡아 신에게 제를 지냈다고 한다.
원래 유대인들은 터키의 산악지대에서 발원하여 수메르를 거쳐 이집트에 들어가 힉소스 치하에서는 잠시 영화를 누리지만, 그 후 노예생활을 하다 모세에 의해 탈출한 후 40년 동안을 사막에서 떠돌며 가나안 사람들을 학살하고 약탈하며 터전을 닦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이 건국되지만 솔로몬 왕이 죽자 왕국은 분열되어 유대왕국과 이스라엘로 나뉘고, 결국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유대왕국은 해방되며, 이때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종교인 유대교의 뼈대를 만든다. 이렇듯이 유대인들은 주변국을 상인이나 노예로 방랑하던 떠돌이 부족으로 다른 나라의 신화와 종교, 역사를 표절하고 짜깁기하여 성경이란 표절서를 만들었으며, 유대사막의 별 볼일 없던 야훼란 잡신마저 이집트의 유일신 '아톤'을 흉내 내고 조로아스터교의 전지전능한 신 '아후라마즈다'를 베껴 전지전능한 유일신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천지창조는 메소포타미아의 마르둑 신화를, 창세기의 인간창조는 수메르의 인간창조를, 노아의 방주는 수메르의 지우수드라 이야기를, 바벨탑은 바빌로니아의 지구랏트를, 모세의 출생은 아카드의 사르곤왕의 출생설화를, 유대의 12부족이나 예수의 12제자는 고대의 12진법을,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 선과 악, 메시아, 최후의 심판 등의 모든 교리는 조로아스터교를 홀라당 베낀 것이다. 유일신 개념은 이집트의 유일신 '아톤'신을 흉내내고, 전지전능이란 말은 조로아스터교의 전지전능한 신 '아후라마즈다'를 베낀 것이다. 너무 많아서 이루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성경 내용이나 기독교의 교리 대부분은 주변국의 신화와 종교, 설화 등을 그대로 베끼거나 표절해 각색한 것이다.
전지전능하다는 신이라면서 세상을 창조한 것이 고작 5771년 전이라고 주장하는 종교. 물론 bc 3761년에 천지창조를 했다는 기록은 바로 성경이라는 표절서의 기록이며, 유대달력이 주장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현대과학에서 지구가 탄생한 것은 약 46억 년 전이라고 하는데, 고작 6천년 전도 안 된 시점에 천지창조를 했다고 하는 신도 웃기지만, 그런 신을 전지전능한 신이라며 자나 깨나 아버지 하나님 어쩌고 하는 건 개그 소재로 쓰기에도 빈약하지 않는가? 그뿐인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이며 신과 삼위일체 동격인 예수의 출생일이나 부활한 날은 왜 모르는가? 적어도 다시 부활한 신이라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면 그 정도 기록은 남아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그조차 몰라 이교도들의 동지 축제와 춘분 축제를 도둑질하여 메시아의 생일인 양, 부활한 날 인양 구라를 치는가???
2010년 4월 29일 목요일
2010년 4월 23일 금요일
유전자의 눈으로 본 생명 최재천교수
2001년 1월 26일 일본 도쿄 신주쿠 근방 신오쿠보 역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전동차에 치여 숨진 한국 청년 이수현, 당신이 태어난 나라도 아닌 곳에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테레사 수녀, 철학과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였으면서도 나이 서른에 다시 의학 공부를 시작하여 38세 때부터 평생토록 아프리카에서 그곳 원주민들을 위해 의료 봉사를 한 알베르트 슈바이처,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 스님… 우리는 이처럼 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바친 이들에 대해 끝없는 존경을 표한다. 희생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희생을 진화의 입장에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희생이란 이처럼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임에도 우리 주변에는 크고 작은 희생의 미담이 끊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다윈의 또 다른 고민이었다. 철저하게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기반을 둔 그의 자연선택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쉽지 않은 현상이 바로 자기희생(self-sacrifice) 또는 이타주의(altruism)였다. 어떻게 남을 돕기 위해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희생하는 행동과 심성이 진화할 수 있을까? 다윈은 이 문제를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했다. 특히 개미나 벌과 같은 이른바 사회성 곤충(social insect)의 군락에서 벌어지는 일개미나 일벌들의 번식 희생은 다윈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불가사의한 생명 현상이었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번식을 위해서 행동하도록 진화했다는 다윈의 이론으로는 각기 다른 생명체들로 태어나 스스로 번식을 억제하고 오로지 여왕으로 하여금 홀로 번식할 수 있도록 평생 봉사하는 일개미나 일벌들의 헌신적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윈은 [종의 기원] 제1판 8장에서 사회성 곤충의 극단적 이타주의에 대해 “내게는 언뜻 극복하기 어려운 특별한 난관이며 실제로 내 이론에 치명적인” 문제라고 토로한 바 있다. 다윈은 끝내 이 문제에 관한 한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타주의적 행동에 처음으로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한 윌리엄 해밀턴
이타주의적 행동이 어떻게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개체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진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처음으로 제공한 사람은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1936~2000)이었다. 포괄적응도 이론(inclusive fitness theory) 또는 혈연선택론(kin selection theory)으로 알려진 해밀턴의 이론은 개체 수준에서는 엄연한 이타주의적 행동이 유전자 수준에서 분석해보면 사실상 이기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흔히 rB > C라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공식으로 알려진 해밀턴의 법칙(Hamilton’s rule)에 따르면 이타적인 행동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적응적 이득(B, benefit)에 유전적 근친도(r, genetic relatedness)를 곱한 값이 그런 행동을 하는 데 드는 비용(C, cost)보다 크기만 하면 그 행동은 진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유전적으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타적인 행동이 진화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사실 해밀턴보다 일찍 이 문제의 해결에 단서를 제공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전설적인 영국의 유전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잭 홀데인(J. B. S. Haldane, 1892~1964)이었다. 물리학자들은 종종 사석에서 뉴턴·아인슈타인·파인만 등을 들먹이며 생물학계에도 이들만큼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가 있느냐고 윽박지른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언제든 급하면 다윈의 품에 안길 순 있지만, 그는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그런 순발력 있는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도 내세울 수 있는 분이 한 분 있다. 그가 바로 홀데인이다. 내가 그를 소개하며 굳이 ‘전설적인’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그에 관한 많은 일화가 아직도 마치 구전문화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최첨단 과학계에서 구전문화라니?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를 거쳐 오랫동안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교수생활을 한 그는 물론 그가 남긴 많은 연구 업적으로도 유명하지만, 대학 앞 선술집 등 여러 형태의 사석에서 남긴 촌철살인의 우문현답들로 더 유명하다. 어느 날 진화학자로서 조물주의 마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곧바로 조물주께서는 “딱정벌레에 대해 지나친 호감(an inordinate fondness for beetles)을 가졌던 분이었던 것 같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딱정벌레는 기재된 종만 무려 35만 종에 이르는데, 이는 전체 곤충 종수의 거의 절반이다. 홀데인의 상상 속에는 태초에 세상을 만드시던 그 엿새 중 어느 날 진흙으로 딱정벌레 한 마리를 빚으신 다음 숨을 불어넣으시곤 스스로 만드신 딱정벌레의 귀여움에 정신이 빠져 그만 멈추지 못하고 계속 다양한 모습의 딱정벌레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던 하느님의 모습이 그려졌던 것이다. 그가 순간적으로 내뱉었다는 이 같은 말들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구전자들마저 이제 연로하여 하나 둘씩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분들이 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홀데인 어록을 정리해둬야 할 텐데.
“형제 2명, 혹은 사촌 8명의 목숨이라면 내 목숨을 버릴 수도?”
또 어느 날 누군가가 홀데인에게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즉시 “내가 만일 형제 둘이나 사촌 여덟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을 버릴 용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형제는 평균적으로 서로 유전자의 50%를 공유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평균이 아니라 확실하게 50%이다. 번식을 위해 난자와 정자를 만들 때 이른바 감수분열(meiosis)이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가진 유전자의 정확하게 50%를 넣어주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잘 났어도, 그래서 내 유전자를 보다 많이 남겨주고 싶더라도 내 난자와 정자에 내 유전자의 50%가 아니라 하다못해 51%라도 꾸겨 넣는다면 내 아이는 기형으로 태어나고 만다. 부모-자식 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정확하게 50%이고 형제자매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물론 부모가 같을 경우, 평균 50%이다. 배다른 형제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25%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흔히 사촌이라 부르는 대상을, 유전적으로 계산하면 팔촌이라고 불렀더라면 훨씬 더 정확했을 뻔했다. 예를 들어, 나와 내 이종사촌 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나와 어머니의 관계가 50%이고, 어머니와 이모의 관계가 또 50%이고, 이모와 그의 딸의 관계가 역시 50%이니 모두 곱하면 12.5% 즉 1/8이 된다. 그래서 홀데인은 형제 둘 또는 사촌 여덟의 유전자를 합하면 내 유전자만큼 된다는 걸 그리 말한 것이다. 이 명언의 현장을 전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날 그 자리에서 홀데인의 대답을 듣고 곧바로 머리를 끄덕이며 웃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전한다. 그처럼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 우리 중에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일벌은 왜 평생 불쌍하게 일만 하다 죽는가?
해밀턴은 그의 혈연선택 이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예로 개미, 벌, 말벌 등 이른바 벌목(Order Hymenoptera)에 속하는 사회성 곤충을 택했다. 벌목의 곤충들은 매우 독특한 성 결정체계(sex determination system)를 갖고 있다. 개미와 벌 사회의 암컷들은 대부분의 유성생식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암수의 유전자가 교합하여 태어나지만, 수컷들은 모두 미수정란으로부터 탄생한다. 다시 말하면 암수의 유전자가 합쳐지면 암컷이 되지만 수컷은 오로지 암컷의 유전자만으로 만들어진다. 세상에 이렇게 기이한 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수컷의 유전자가 개입하지 않아야 수컷으로 태어난다니 말이다. 그래서 개미와 벌의 수컷은 우리처럼 염색체를 한 쌍(diploid, 이배체)으로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한 벌(haploid, 반수체)만 지닌다. 인간의 염색체를 가지고 설명해보면, 여자들은 그들의 세포 안에 모두 23쌍 즉 46개의 염색체들(n=46)을 가지고 있지만, 남자들은 달랑 한 벌 즉 23개의 염색체(n=23)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성 결정체계를 우리 인간을 포함한 많은 동식물의 체계인 이배체(diploidy)와 달리 반수이배체(haplodiploidy)라고 부른다.
벌목 곤충의 반수이배체 기제는 이미 19세기 중반에 밝혀졌다. 지금은 폴란드 영역이지만 당시 프러시아 실레시아 지방의 신부였던 요한 지어존(Johann Dzierzon)이 1845년에 내세운 가설을 1856년 생물학자 칼 폰 시볼트(Carl von Siebold)가 현미경을 이용하여 장차 수벌로 발생할 난자에는 정자가 진입한 흔적이 없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확증해주었다.
이 같은 메커니즘은 사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기 전부터 알려진 지식이었지만 그것의 진화적 의미는 그로부터 무려 100년이 흐른 후에야 밝혀진 것이다. 해밀턴은 1964년 이론생물학 저널(The Journal of Theoretical Biology)에 “사회 행동의 유전적 진화(The Genetical Evolution of Social Behaviour)”라는 제목의 다분히 수학적인 논문을 게재하며 벌목 곤충의 반수이배체 성 결정 메커니즘과 사회적 진화의 관계를 설명했다.
이 논문에서 해밀턴은 이를테면 개미 사회에서 일개미들이 왜 스스로 번식을 포기하고 어머니인 여왕개미로 하여금 모든 번식을 도맡아 하도록 평생 돕기만 하는지에 대해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두 일개미 자매는 어머니인 여왕개미로부터는 우리와 같은 이배체 생물과 마찬가지로 50%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지만, 그 어느 날 혼인비행 때 당신의 정자를 어머니의 몸속에 넣어주곤 세상을 떠난 아버지 수개미로부터는 그의 유전자 전부(100%)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형제·자매들끼리 평균 50%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이배체 생물과 달리 평균 75%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어떻게 이런 계산이 나오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개미 제국의 발견(1999)]이나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2007)]을 참조하기 바란다. 일개미는 만일 스스로 자기 자식을 낳는다 하더라도 그의 몸에 자기 유전자의 50%밖에 남겨주지 못한다. 따라서 개미 사회의 번식을 순전히 유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스로 번식을 하여 자기 유전자의 50%를 남기는 것보다 여왕개미를 도와 자매인 일개미를 낳게 하여 자기 유전자의 75%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에 스스로 번식을 포기하는 이타적 행동이 진화한 것이다.
일벌 입장에서는 희생이 번식보다 유전자 관점에서 유리하기 때문
해밀턴의 이론에 의하면 번식이란 결국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복사체들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버드대학의 사회생물학자 윌슨(Edward O. Wilson)은 영국 작가 버틀러(Samuel Butler)의 표현을 빌려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흔히 뜰에 돌아다니는 닭들이 각자 모이도 쪼아먹고, 때론 싸움도 하고, 짝짓기도 하고, 알을 낳고 살다가 죽는 걸 보며 닭이라는 생명의 주인은 당연히 닭이라는 개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버틀러와 윌슨의 관점에서 보면 닭은 기껏해야 몇 년 동안 알을 낳고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 닭을 만들어낸 유전자는 그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고 어쩌면 영원히 그의 후손으로 이어져갈 존재이다. 나는 2001년에 에세이집을 한 권 출간하며 제목을 [알이 닭을 낳는다]로 붙였다. 흔히 ‘죽음의 시인’이라고 알려진 최승호 시인이 붙여준 제목이다. 버틀러나 윌슨이 길게 설명한 내용을 보다 간략하고 인상적으로 표현했다고 자부해본다.
내 유전자가 진정한 내 생명의 주인
해밀턴은 우리에게 유전자의 눈높이 또는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했다. 유전자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은 언뜻 허무하고 냉혹해 보인다. 지금 이 순간 엄연히 숨 쉬고 있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내가 내 삶의 주체가 아니고 내 삶의 이전에도 존재했고 내가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 내 유전자가 진정한 내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자칫 염세주의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다. 나는 벌써 25년 이상 대학 강단에서 유전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그런 강의를 하는 거의 매 학기마다 어김없이 한두 명의 학생들이 나를 찾아온다. 주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전공한 학생들인데 어느 날 졸지에 내가 씌워준 유전자 렌즈로 보는 세상이 너무나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삶이 무의미해졌다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나는 그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고. 그런데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했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홀연 마음이 평안해지더라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마음을 비울 수 있다. 비울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 한복판에 커다란 여백이 생기는 걸 느끼게 된다. 이 세상 모든 종교가 다 우리더러 마음을 비우라지만 그처럼 어려운 일이 어디 또 있으랴. 그런데 유전자 렌즈를 끼면 저절로 마음이 비워진다.
그런 다음 나는 그 학생들에게 꼭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를 읽으라고 권한다. 책 한 권이 하루아침에 인생관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수 있을까? 내겐 [이기적 유전자]가 그런 책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도킨스가 해밀턴의 이론을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준 책이다. 도킨스는 긴 진화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개체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고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유전자라고 설명했다.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경우, 사실상 개체들이 직접 자신들의 복사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후손에 전달되는 실체는 다름 아닌 유전자이기 때문에 적응 형질들은 집단을 위해서도 아니고 개체를 위해서도 아니라 유전자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에 도킨스는 개체를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라 부르고, 끊임없이 복제되어 후세에 전달되는 유전자 즉 DNA를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이라고 일컫는다. 개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말지만 그 개체의 특성에 관한 정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DNA, 불멸의 나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생명, 적어도 지구라는 행성의 생명의 역사는 유전자의 역사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수많은 생명체가 태어났다 사라져 갔어도 그 옛날 생명의 늪에서 우연히 탄생하여 신기하게도 자기와 똑같은 복사체를 만들 줄 알게 된 화학물질인 DNA와 그의 후손들이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 엄청난 생물다양성을 창조해낸 것이다. 각각의 생명체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분명히 한계성(ephemerality)을 지니지만 수십 억년 전에 태어나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DNA의 눈으로 보면 생명은 엄연한 영속성(perpetuity)을 띤다. 지구의 생명의 역사는 DNA라는 매우 성공적인 화학물질의 일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희생을 진화의 입장에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희생이란 이처럼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임에도 우리 주변에는 크고 작은 희생의 미담이 끊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다윈의 또 다른 고민이었다. 철저하게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기반을 둔 그의 자연선택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쉽지 않은 현상이 바로 자기희생(self-sacrifice) 또는 이타주의(altruism)였다. 어떻게 남을 돕기 위해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희생하는 행동과 심성이 진화할 수 있을까? 다윈은 이 문제를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했다. 특히 개미나 벌과 같은 이른바 사회성 곤충(social insect)의 군락에서 벌어지는 일개미나 일벌들의 번식 희생은 다윈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불가사의한 생명 현상이었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번식을 위해서 행동하도록 진화했다는 다윈의 이론으로는 각기 다른 생명체들로 태어나 스스로 번식을 억제하고 오로지 여왕으로 하여금 홀로 번식할 수 있도록 평생 봉사하는 일개미나 일벌들의 헌신적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윈은 [종의 기원] 제1판 8장에서 사회성 곤충의 극단적 이타주의에 대해 “내게는 언뜻 극복하기 어려운 특별한 난관이며 실제로 내 이론에 치명적인” 문제라고 토로한 바 있다. 다윈은 끝내 이 문제에 관한 한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타주의적 행동에 처음으로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한 윌리엄 해밀턴
이타주의적 행동이 어떻게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개체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진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처음으로 제공한 사람은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1936~2000)이었다. 포괄적응도 이론(inclusive fitness theory) 또는 혈연선택론(kin selection theory)으로 알려진 해밀턴의 이론은 개체 수준에서는 엄연한 이타주의적 행동이 유전자 수준에서 분석해보면 사실상 이기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흔히 rB > C라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공식으로 알려진 해밀턴의 법칙(Hamilton’s rule)에 따르면 이타적인 행동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적응적 이득(B, benefit)에 유전적 근친도(r, genetic relatedness)를 곱한 값이 그런 행동을 하는 데 드는 비용(C, cost)보다 크기만 하면 그 행동은 진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유전적으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타적인 행동이 진화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사실 해밀턴보다 일찍 이 문제의 해결에 단서를 제공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전설적인 영국의 유전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잭 홀데인(J. B. S. Haldane, 1892~1964)이었다. 물리학자들은 종종 사석에서 뉴턴·아인슈타인·파인만 등을 들먹이며 생물학계에도 이들만큼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가 있느냐고 윽박지른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언제든 급하면 다윈의 품에 안길 순 있지만, 그는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그런 순발력 있는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도 내세울 수 있는 분이 한 분 있다. 그가 바로 홀데인이다. 내가 그를 소개하며 굳이 ‘전설적인’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그에 관한 많은 일화가 아직도 마치 구전문화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최첨단 과학계에서 구전문화라니?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를 거쳐 오랫동안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교수생활을 한 그는 물론 그가 남긴 많은 연구 업적으로도 유명하지만, 대학 앞 선술집 등 여러 형태의 사석에서 남긴 촌철살인의 우문현답들로 더 유명하다. 어느 날 진화학자로서 조물주의 마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곧바로 조물주께서는 “딱정벌레에 대해 지나친 호감(an inordinate fondness for beetles)을 가졌던 분이었던 것 같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딱정벌레는 기재된 종만 무려 35만 종에 이르는데, 이는 전체 곤충 종수의 거의 절반이다. 홀데인의 상상 속에는 태초에 세상을 만드시던 그 엿새 중 어느 날 진흙으로 딱정벌레 한 마리를 빚으신 다음 숨을 불어넣으시곤 스스로 만드신 딱정벌레의 귀여움에 정신이 빠져 그만 멈추지 못하고 계속 다양한 모습의 딱정벌레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던 하느님의 모습이 그려졌던 것이다. 그가 순간적으로 내뱉었다는 이 같은 말들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구전자들마저 이제 연로하여 하나 둘씩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분들이 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홀데인 어록을 정리해둬야 할 텐데.
“형제 2명, 혹은 사촌 8명의 목숨이라면 내 목숨을 버릴 수도?”
또 어느 날 누군가가 홀데인에게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즉시 “내가 만일 형제 둘이나 사촌 여덟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을 버릴 용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형제는 평균적으로 서로 유전자의 50%를 공유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평균이 아니라 확실하게 50%이다. 번식을 위해 난자와 정자를 만들 때 이른바 감수분열(meiosis)이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가진 유전자의 정확하게 50%를 넣어주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잘 났어도, 그래서 내 유전자를 보다 많이 남겨주고 싶더라도 내 난자와 정자에 내 유전자의 50%가 아니라 하다못해 51%라도 꾸겨 넣는다면 내 아이는 기형으로 태어나고 만다. 부모-자식 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정확하게 50%이고 형제자매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물론 부모가 같을 경우, 평균 50%이다. 배다른 형제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25%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흔히 사촌이라 부르는 대상을, 유전적으로 계산하면 팔촌이라고 불렀더라면 훨씬 더 정확했을 뻔했다. 예를 들어, 나와 내 이종사촌 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나와 어머니의 관계가 50%이고, 어머니와 이모의 관계가 또 50%이고, 이모와 그의 딸의 관계가 역시 50%이니 모두 곱하면 12.5% 즉 1/8이 된다. 그래서 홀데인은 형제 둘 또는 사촌 여덟의 유전자를 합하면 내 유전자만큼 된다는 걸 그리 말한 것이다. 이 명언의 현장을 전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날 그 자리에서 홀데인의 대답을 듣고 곧바로 머리를 끄덕이며 웃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전한다. 그처럼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 우리 중에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일벌은 왜 평생 불쌍하게 일만 하다 죽는가?
해밀턴은 그의 혈연선택 이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예로 개미, 벌, 말벌 등 이른바 벌목(Order Hymenoptera)에 속하는 사회성 곤충을 택했다. 벌목의 곤충들은 매우 독특한 성 결정체계(sex determination system)를 갖고 있다. 개미와 벌 사회의 암컷들은 대부분의 유성생식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암수의 유전자가 교합하여 태어나지만, 수컷들은 모두 미수정란으로부터 탄생한다. 다시 말하면 암수의 유전자가 합쳐지면 암컷이 되지만 수컷은 오로지 암컷의 유전자만으로 만들어진다. 세상에 이렇게 기이한 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수컷의 유전자가 개입하지 않아야 수컷으로 태어난다니 말이다. 그래서 개미와 벌의 수컷은 우리처럼 염색체를 한 쌍(diploid, 이배체)으로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한 벌(haploid, 반수체)만 지닌다. 인간의 염색체를 가지고 설명해보면, 여자들은 그들의 세포 안에 모두 23쌍 즉 46개의 염색체들(n=46)을 가지고 있지만, 남자들은 달랑 한 벌 즉 23개의 염색체(n=23)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성 결정체계를 우리 인간을 포함한 많은 동식물의 체계인 이배체(diploidy)와 달리 반수이배체(haplodiploidy)라고 부른다.
벌목 곤충의 반수이배체 기제는 이미 19세기 중반에 밝혀졌다. 지금은 폴란드 영역이지만 당시 프러시아 실레시아 지방의 신부였던 요한 지어존(Johann Dzierzon)이 1845년에 내세운 가설을 1856년 생물학자 칼 폰 시볼트(Carl von Siebold)가 현미경을 이용하여 장차 수벌로 발생할 난자에는 정자가 진입한 흔적이 없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확증해주었다.
이 같은 메커니즘은 사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기 전부터 알려진 지식이었지만 그것의 진화적 의미는 그로부터 무려 100년이 흐른 후에야 밝혀진 것이다. 해밀턴은 1964년 이론생물학 저널(The Journal of Theoretical Biology)에 “사회 행동의 유전적 진화(The Genetical Evolution of Social Behaviour)”라는 제목의 다분히 수학적인 논문을 게재하며 벌목 곤충의 반수이배체 성 결정 메커니즘과 사회적 진화의 관계를 설명했다.
이 논문에서 해밀턴은 이를테면 개미 사회에서 일개미들이 왜 스스로 번식을 포기하고 어머니인 여왕개미로 하여금 모든 번식을 도맡아 하도록 평생 돕기만 하는지에 대해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두 일개미 자매는 어머니인 여왕개미로부터는 우리와 같은 이배체 생물과 마찬가지로 50%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지만, 그 어느 날 혼인비행 때 당신의 정자를 어머니의 몸속에 넣어주곤 세상을 떠난 아버지 수개미로부터는 그의 유전자 전부(100%)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형제·자매들끼리 평균 50%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이배체 생물과 달리 평균 75%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어떻게 이런 계산이 나오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개미 제국의 발견(1999)]이나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2007)]을 참조하기 바란다. 일개미는 만일 스스로 자기 자식을 낳는다 하더라도 그의 몸에 자기 유전자의 50%밖에 남겨주지 못한다. 따라서 개미 사회의 번식을 순전히 유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스로 번식을 하여 자기 유전자의 50%를 남기는 것보다 여왕개미를 도와 자매인 일개미를 낳게 하여 자기 유전자의 75%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에 스스로 번식을 포기하는 이타적 행동이 진화한 것이다.
일벌 입장에서는 희생이 번식보다 유전자 관점에서 유리하기 때문
해밀턴의 이론에 의하면 번식이란 결국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복사체들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버드대학의 사회생물학자 윌슨(Edward O. Wilson)은 영국 작가 버틀러(Samuel Butler)의 표현을 빌려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흔히 뜰에 돌아다니는 닭들이 각자 모이도 쪼아먹고, 때론 싸움도 하고, 짝짓기도 하고, 알을 낳고 살다가 죽는 걸 보며 닭이라는 생명의 주인은 당연히 닭이라는 개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버틀러와 윌슨의 관점에서 보면 닭은 기껏해야 몇 년 동안 알을 낳고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 닭을 만들어낸 유전자는 그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고 어쩌면 영원히 그의 후손으로 이어져갈 존재이다. 나는 2001년에 에세이집을 한 권 출간하며 제목을 [알이 닭을 낳는다]로 붙였다. 흔히 ‘죽음의 시인’이라고 알려진 최승호 시인이 붙여준 제목이다. 버틀러나 윌슨이 길게 설명한 내용을 보다 간략하고 인상적으로 표현했다고 자부해본다.
내 유전자가 진정한 내 생명의 주인
해밀턴은 우리에게 유전자의 눈높이 또는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했다. 유전자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은 언뜻 허무하고 냉혹해 보인다. 지금 이 순간 엄연히 숨 쉬고 있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내가 내 삶의 주체가 아니고 내 삶의 이전에도 존재했고 내가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 내 유전자가 진정한 내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자칫 염세주의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다. 나는 벌써 25년 이상 대학 강단에서 유전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그런 강의를 하는 거의 매 학기마다 어김없이 한두 명의 학생들이 나를 찾아온다. 주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전공한 학생들인데 어느 날 졸지에 내가 씌워준 유전자 렌즈로 보는 세상이 너무나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삶이 무의미해졌다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나는 그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고. 그런데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했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홀연 마음이 평안해지더라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마음을 비울 수 있다. 비울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 한복판에 커다란 여백이 생기는 걸 느끼게 된다. 이 세상 모든 종교가 다 우리더러 마음을 비우라지만 그처럼 어려운 일이 어디 또 있으랴. 그런데 유전자 렌즈를 끼면 저절로 마음이 비워진다.
그런 다음 나는 그 학생들에게 꼭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를 읽으라고 권한다. 책 한 권이 하루아침에 인생관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수 있을까? 내겐 [이기적 유전자]가 그런 책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도킨스가 해밀턴의 이론을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준 책이다. 도킨스는 긴 진화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개체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고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유전자라고 설명했다.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경우, 사실상 개체들이 직접 자신들의 복사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후손에 전달되는 실체는 다름 아닌 유전자이기 때문에 적응 형질들은 집단을 위해서도 아니고 개체를 위해서도 아니라 유전자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에 도킨스는 개체를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라 부르고, 끊임없이 복제되어 후세에 전달되는 유전자 즉 DNA를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이라고 일컫는다. 개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말지만 그 개체의 특성에 관한 정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DNA, 불멸의 나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생명, 적어도 지구라는 행성의 생명의 역사는 유전자의 역사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수많은 생명체가 태어났다 사라져 갔어도 그 옛날 생명의 늪에서 우연히 탄생하여 신기하게도 자기와 똑같은 복사체를 만들 줄 알게 된 화학물질인 DNA와 그의 후손들이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 엄청난 생물다양성을 창조해낸 것이다. 각각의 생명체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분명히 한계성(ephemerality)을 지니지만 수십 억년 전에 태어나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DNA의 눈으로 보면 생명은 엄연한 영속성(perpetuity)을 띤다. 지구의 생명의 역사는 DNA라는 매우 성공적인 화학물질의 일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선택의 단위는 집단인가 개체인가? 최재천교수
http://navercast.naver.com/science/biology/2473
1960년대에 접어들며 진화생물학은 커다란 개념적 혁신을 맞는다. 진화생물학이 그 논리적 기초를 다윈의 자연선택론에 둔다고는 했으나 많은 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의 단위와 대상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생물은 모두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이나 종의 보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도록 진화했다고 믿었다. 이 같은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for the good of group)’라는 논리는 스스로 번식을 자제하는 집단조절기능을 가진 종들만이 이 지구상에 남아 있고 그렇지 못한 종들은 자원고갈로 인해 끝내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이른바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에 입각한 것이다. 이 같은 집단선택설적 자연선택 이론은 다윈의 개체중심적 이론에 어긋나는 것으로 특수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한 실제에 적용되기 어렵다.
자연선택의 단위는 집단인가 개체인가?
가상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바닷가 벼랑에 서식하고 있는 어떤 갈매기 집단을 상상해 보자. 갈매기는 대개 암수가 한번 짝을 지으면 평생토록 같이 사는 전형적인 일부일처제 동물이다. 이 집단의 갈매기들은 암수 한 쌍이 해마다 알을 둘만 낳아 기른다고 가정하자. 따라서 자원을 지나치게 고갈시키는 일도 없다고 하자.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대대로 유전된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날 이 집단에 세 개의 알을 낳는 돌연변이가 발생했다고 하자. 그리고 알을 셋이나 낳은 쌍도 세 마리의 새끼를 키우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새끼들이 다 잘 자라 각자 또 번식을 하고, 또 그 새끼들이 또 번식하고 하는 식으로 몇 세대를 지나게 되면 이 집단에는 ‘세 알 유전형(genotype)’이 원래의 ‘두 알 유전형’보다 훨씬 많게 될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네 알 유전형’도 생겨날지 모른다. 알을 더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더 많은 새끼들을 키워낼 수 있다면 갈매기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많은 알을 낳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알의 수는 부모가 키울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조절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한 둥지 내의 알의 수는 부모의 부양능력과 여러 환경요인의 영향아래 가장 많은 새끼들을 배출하도록 자연선택된 적응의 결과이다. 개체가 집단의 존속을 위해 자발적으로 산아제한을 하는 체제는 결코 진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체들의 이기적인 행동의 전파를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윈의 후예를 자청하던 생물학자들도 오랫동안 이 문제를 명확하게 읽어내지 못했다. 폰 프리쉬(Karl von Frisch), 틴버겐(Nikko Tinbergen) 등과 함께 1973년 노벨 생리 및 의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의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 같은 위대한 학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렌츠는 1966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공격성에 대하여(On Aggression)>에서 맹수들이 종종 송곳니를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상대를 물어 죽일 듯이 으르렁거리지만 좀처럼 목숨을 앗을 정도로 싸우지는 않는 까닭으로 다분히 집단선택설적 설명을 제시했다. 싸울 때마다 번번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개체들의 집단은 결코 오래 버틸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자제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설명 논리를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펼치다가 끝내 집단선택설의 원흉으로 낙인 찍힌 비운의 조류학자가 있다. 베로 윈-에드워즈(Vero Copner Wynne-Edwards, 1906-1997)는 새에 관한 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1962년에 출간한 <사회적 행동에 관련한 동물의 분산(Animal Dispersion in Relation to Social Behavior)>에서 동물 개체군의 자기조절 능력이 집단 수준에서 진화한 적응이라는 주장을 너무 대대적으로 하는 바람에 그 이전에 비슷한 주장을 펼쳤던 다른 많은 학자들의 오명을 온전히 홀로 뒤집어쓰고 말았다.
윌리엄 해밀턴 : 자연선택의 단위는 유전자
자연선택이 집단보다는 유전자 수준에서 훨씬 더 보편적이고 강력하게 일어난다는 걸 일깨워준 것은 1964년에 발표된 윌리엄 해밀턴의 논문이었지만 집단선택설에 대한 직접적인 포문을 연 사람은 조지 윌리엄즈(George C. Williams)였다. 당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후 연수과정을 밟고 있던 그는 1966년 <적응과 자연선택(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진화생물학이 집단유전학의 도움으로 이른바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 또는 ‘현대적 종합(Modern Synthesis)’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오류들이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자연선택이 종종 개체보다 집단의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윈-에드워즈의 주장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해밀턴의 논문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 후 1976년에는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역시 해밀턴의 이론을 바탕으로 집단선택설에 의한 설명들의 오류를 조목조목 파헤쳤다.
하지만 해밀튼의 50여 쪽에 이르는 수학적 논문과 더불어 윌리엄즈와 도킨스의 책이 구구절절이 설명한 집단선택설의 모순을 미국의 만화가 라슨(Gary Larson)은 만화 한 컷으로 해치웠다. 설치류의 동물 나그네쥐(lemming)는 오랫동안 자살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치티(Dennis Chitty) 교수의 연구로 결국 그들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게 아니라 미처 눈이 채 녹지도 않은 들판에서 먹이를 찾아 떼로 돌아다니다가 벼랑 끝에서 멈추지 못하고 차가운 강물에 빠져 죽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어쨌든 그들이 이처럼 떼죽음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시하는 ‘이론’은 철저하게 집단선택설의 관점을 지닌 것이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너도 나도 살려 하면 모두가 살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일부 ‘숭고한’ 나그네쥐들이 동료들을 위해 죽어준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라슨은 그의 만화에서 그 숭고한 나그네쥐들 중 홀연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돌연변이 개체의 출현을 상상한다 만일 구명대를 두르고자 하는 이기적 성향이 유전하는 변이라면 이듬 해 봄에는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나그네쥐가 더 많아질 것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귀한 유전자들은 숭고한 나그네쥐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지만 이기적 유전자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집단 수준의 선택은 개체 수준의 선택을 당할 수 없다. 집단선택은 그만큼 일어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 유전자도 개체의 번식을 통해야만 자신의 복사체들을 퍼뜨릴 수 있다. 한 개체내의 유전자들의 운명은 그 개체에게 달려있다. 다윈의 고민 두 가지에 대한 분석을 다룬 저서 <개미와 공작(The Ant and the Peacock, 1991)>에서 크러닌(Helena Croni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전자들은 스스로 발가벗고 자연선택의 심판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꼬리나 가죽, 또는 근육이나 껍질을 내세운다. 그들은 또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이나 기막힌 위장술, 배우자를 매료시키는 힘, 훌륭한 둥지를 만드는 능력 등을 내세운다. 유전자들의 차이는 이러한 표현형(phenotype)의 차이로 나타난다. 자연선택은 표현형적 변이에 작용함으로써 유전자에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들은 그들의 표현형적 효과의 선택가치(selective value)에 비례하여 다음 세대에 전파된다.
자연선택은 유전자, 개체, 집단, 그리고 심지어는 종의 수준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적응(adaptation)은 표현형으로 나타난다. 선택의 대상(object)과 결과(effect)는 종종 다를 수 있다. 철학자 엘리엇 소버(Elliott Sober)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선택 장난감(selection toy)’을 가지고 이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했다. 원통형으로 되어 있는 이 장난감에는 맨 위층으로부터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작은 크기의 구멍들이 뚫려 있다. 만일 가장 작은 구슬들의 색깔이 녹색이라면 맨 아래층에는 결국 작은 녹색 구슬들만 모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제일 작은 구슬을 선택한 것이지 녹색 구슬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선택의 대상(selection of)은 작은 구슬이었는데 결과적으로(selection for) 작은 구슬들의 색깔인 녹색도 선택된 것이다. 자연선택은 표현형에 작용하고, 그 결과로 후세에 전달되는 것은 유전자이다.
사라지지 않는 집단선택설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실체(entity)에 대한 논의는 크게 단위(unit)와 수준(level)으로 나뉘어 이뤄지지만, 이 둘은 때로 혼용되며 종종 혼란의 여지를 남긴다. 일찍이 도킨스는 자연선택의 과정에는 복제자(replicator)와 운반자(vehicle)가 관여하는데, 선택의 단위에 대한 논의는 운반자가 아니라 복제자에 초첨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철학자 헐(David Hull)은 복제자의 개념에는 사실 복제의 대상 외에도 선택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실체인 교류자(interactor)가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과정이란 “교류자들의 차등 절멸과 확산이 그들을 만들어낸 복제자들의 차등 보전을 일으키는 과정(a process in which the differential extinction and proliferation of interactors cause the differential perpetuation of the replicators that produced them)”이라는 헐의 논리에 따르면, 선택의 수준은 바로 교류자를 묻는 것이고 단위는 복제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의 대상, 단위, 또는 결과에 비해 선택의 수준은 훨씬 더 다양할 수 있다. 작게는 유전자, 세포, 생명체(organism)로부터 크게는 친족(kinship), 집단, 심지어는 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 수준에서 선택은 일어날 수 있다. 선택의 수준 논의에서 유전자 선택(genic selection)의 관점을 제외할 수는 절대 없지만 논쟁의 열기는 주로 개체와 집단간에 벌어진다. 다윈은 이 점에 있어서 사뭇 혼란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그의 자연선택 이론은 기본적으로 개체중심적이지만 1871년에 출간한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 사회에서 이타주의 또는 도덕적 행위가 어떻게 발생하고 유지되는지를 설명하려면 집단간의 경쟁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부족 내에서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유리한 점이 별로 없을지 모르지만,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많은 집단은 그렇지 못한 집단에 비해 훨씬 유리하다. 집단에 충성하려는 성향이 강하고 용감하며 타인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있어서 항상 다른 사람을 도울 자세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 또한 자연선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부족들간에는 하나의 부족이 다른 부족을 대체해가는 과정이 진행되므로,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도덕성이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므로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차지하는 수적 비중이 점차 늘어나게 될 것이다.
다윈의 이 같은 모호함에 힘 입은 바 있는지 윌리엄즈와 도킨스 등의 통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후반부터 데이빗 슬론 윌슨(David Sloan Wilson), 엘리엇 소버, 마이클 웨이드(Michael Wade)를 비롯한 일군의 진화학자들은 집단선택설이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고 실제로도 몇몇 특수한 조건만 맞으면 일어난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이른바 ‘다중수준 선택(multi-level selection)’으로 알려진 이들의 이론은 나름대로 설명력을 지니지만 진화의 역사에서 실제로 얼마나 빈번하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다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철학자 데이빗 헐(David Hull)은 이 같은 혼란은 근본적으로 개체와 집단이 지니고 있는 정의의 모호함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얘기하는 개체의 범주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딸기밭을 한 가득 메우고 있는 각각의 딸기 개체들은 종종 땅 속 줄기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의 딸기 줄기를 뽑아 들면 서로 독립적인 개체인 줄 알았던 여러 개체들이 줄줄이 딸려 올라온다. 땅 위에서는 분명히 서로 다른 개체처럼 제가끔 벌 나비를 유혹하며 번식 경쟁을 벌이지만 땅 속에서는 하나의 개체이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개미나 꿀벌의 군락은 분명히 많은 개체들로 이뤄져 있지만 전체가 대단히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조직이다. 그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개체처럼 유기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종종 ‘초유기체(superorganism)’라고 불린다. 이렇게 보면 생물계의 모든 조직은 결국 넓은 의미의 개체이며, 모든 개체는 다 보다 작은 구성체들의 집합이다.
에드워드 윌슨 : 다시 집단선택설로?
선택의 수준 문제를 두고 세계 최고 권위의 개미학자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행보가 주목을 끌고 있다. 윌리엄즈와 더불어 자칫 아무도 읽지 않을 해밀턴의 1964년 논문의 중요성을 일깨워 우리 모두가 유전자 렌즈를 끼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줬던 그가 최근 홀연 포괄적응도 개념의 혈연선택론에 대한 그의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일종의 폭탄 선언을 한 것이다. 집단선택설의 부활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데이빗 슬론 윌슨이 1970년대 중반 잠시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생활하던 시절 그와 가깝게 지냈던 에드워드 윌슨, 이 두 윌슨이 최근 다시 의기투합하여 진화, 적어도 사회성의 진화에는 유전자나 개체보다 집단 수준의 선택이 훨씬 더 중요했다는 주장을 들고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참으로 난처한 경험을 했다. 2005년 미국 텍사스의 오스틴에서 열린 인간행동및진화학회(Human Behavior and Evolution Society)의 기조강연에서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강연장을 가득 메운 해밀턴 추종자들에게 그의 심경 변화에 대해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야속하게도 해밀턴이 세상을 떠난 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공적이 다분히 부풀려진 감이 있다는 발언으로 장내는 이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회생물학 논란으로 반대 진영의 비난에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진 윌슨 교수인지라 장내의 분위기에 별로 아랑곳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은 애꿎게 강연장 중간쯤에 앉아 있던 나를 돌아보며 어깨를 들먹여 보였다. 그 날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아마 내가 유일한 윌슨 교수의 제자였던 것 같다. 강연이 끝난 후 사람들은 정작 윌슨 교수는 놓아둔 채 총총히 방을 빠져나가며 내게 다가와 어찌 된 일이냐며 따져 물었다.
사실 윌슨 교수는 선택의 수준에 관하여 초지일관 애매한 입장을 취해왔다. 개미를 연구하는 특수성 때문인지 그는 늘 해밀턴의 혈연선택을 군락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한다고 하여 우리들을 당황스럽게 하곤 했다. 그의 자서전 격인 <자연주의자(Naturalist, 1994)>에 보면 해밀턴 이론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던 그의 모습이 군데군데 묘사되어 있다. 그는 마이애미로 가는 열차 안에서 처음으로 해밀턴의 논문을 읽는다. 그는 “나는 처음에는 ‘이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에 온 힘을 다해 거부하려 했다”고 쓰고 있다. 열차를 타고 가며 또 “나는 가끔 눈을 감고 대안을 찾아보려 노력했다”고도 썼다. 그러나 마이애미에 도착한 이른 오후 “나는 포기했다. 나는 개종하여 해밀턴의 손 안에 나를 맡겼다”라고 토로한다. 그 후 윌슨 교수는 해밀턴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그를 하버드에 모셔오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역시 <자연주의자>에 보면 훗날 호혜성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 이론을 개발한 트리버즈(Robert Trivers)가 해밀턴의 이론을 보완한 것을 구태여 “끝내 해밀턴의 논리에서 실수를 찾아낸 것은 바로 트리버즈였다”라고 표현한 걸로 보아 윌슨 교수는 해밀턴의 이론에 대한 불편함을 끝내 떨쳐내지 못했던 것 같다.
자연선택의 수준은 개체인가 집단인가?
두 윌슨 교수가 공동 저술한 2007년 논문 ‘사회생물학의 이론적 기초를 다시 생각한다(Rethinking the Theoretical Foundation of Sociobiology)’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집단 내에서는 이기주의가 이타주의를 이긴다. [그러나] 이타적인 집단이 이기적인 집단을 이긴다. 다른 모든 것은 사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선택이 노는 물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에 관한 논의가 또다시 시끄러워지고 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며 진화생물학은 커다란 개념적 혁신을 맞는다. 진화생물학이 그 논리적 기초를 다윈의 자연선택론에 둔다고는 했으나 많은 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의 단위와 대상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생물은 모두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이나 종의 보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도록 진화했다고 믿었다. 이 같은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for the good of group)’라는 논리는 스스로 번식을 자제하는 집단조절기능을 가진 종들만이 이 지구상에 남아 있고 그렇지 못한 종들은 자원고갈로 인해 끝내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이른바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에 입각한 것이다. 이 같은 집단선택설적 자연선택 이론은 다윈의 개체중심적 이론에 어긋나는 것으로 특수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한 실제에 적용되기 어렵다.
자연선택의 단위는 집단인가 개체인가?
가상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바닷가 벼랑에 서식하고 있는 어떤 갈매기 집단을 상상해 보자. 갈매기는 대개 암수가 한번 짝을 지으면 평생토록 같이 사는 전형적인 일부일처제 동물이다. 이 집단의 갈매기들은 암수 한 쌍이 해마다 알을 둘만 낳아 기른다고 가정하자. 따라서 자원을 지나치게 고갈시키는 일도 없다고 하자.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대대로 유전된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날 이 집단에 세 개의 알을 낳는 돌연변이가 발생했다고 하자. 그리고 알을 셋이나 낳은 쌍도 세 마리의 새끼를 키우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새끼들이 다 잘 자라 각자 또 번식을 하고, 또 그 새끼들이 또 번식하고 하는 식으로 몇 세대를 지나게 되면 이 집단에는 ‘세 알 유전형(genotype)’이 원래의 ‘두 알 유전형’보다 훨씬 많게 될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네 알 유전형’도 생겨날지 모른다. 알을 더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더 많은 새끼들을 키워낼 수 있다면 갈매기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많은 알을 낳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알의 수는 부모가 키울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조절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한 둥지 내의 알의 수는 부모의 부양능력과 여러 환경요인의 영향아래 가장 많은 새끼들을 배출하도록 자연선택된 적응의 결과이다. 개체가 집단의 존속을 위해 자발적으로 산아제한을 하는 체제는 결코 진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체들의 이기적인 행동의 전파를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윈의 후예를 자청하던 생물학자들도 오랫동안 이 문제를 명확하게 읽어내지 못했다. 폰 프리쉬(Karl von Frisch), 틴버겐(Nikko Tinbergen) 등과 함께 1973년 노벨 생리 및 의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의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 같은 위대한 학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렌츠는 1966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공격성에 대하여(On Aggression)>에서 맹수들이 종종 송곳니를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상대를 물어 죽일 듯이 으르렁거리지만 좀처럼 목숨을 앗을 정도로 싸우지는 않는 까닭으로 다분히 집단선택설적 설명을 제시했다. 싸울 때마다 번번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개체들의 집단은 결코 오래 버틸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자제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설명 논리를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펼치다가 끝내 집단선택설의 원흉으로 낙인 찍힌 비운의 조류학자가 있다. 베로 윈-에드워즈(Vero Copner Wynne-Edwards, 1906-1997)는 새에 관한 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1962년에 출간한 <사회적 행동에 관련한 동물의 분산(Animal Dispersion in Relation to Social Behavior)>에서 동물 개체군의 자기조절 능력이 집단 수준에서 진화한 적응이라는 주장을 너무 대대적으로 하는 바람에 그 이전에 비슷한 주장을 펼쳤던 다른 많은 학자들의 오명을 온전히 홀로 뒤집어쓰고 말았다.
윌리엄 해밀턴 : 자연선택의 단위는 유전자
자연선택이 집단보다는 유전자 수준에서 훨씬 더 보편적이고 강력하게 일어난다는 걸 일깨워준 것은 1964년에 발표된 윌리엄 해밀턴의 논문이었지만 집단선택설에 대한 직접적인 포문을 연 사람은 조지 윌리엄즈(George C. Williams)였다. 당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후 연수과정을 밟고 있던 그는 1966년 <적응과 자연선택(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진화생물학이 집단유전학의 도움으로 이른바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 또는 ‘현대적 종합(Modern Synthesis)’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오류들이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자연선택이 종종 개체보다 집단의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윈-에드워즈의 주장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해밀턴의 논문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 후 1976년에는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역시 해밀턴의 이론을 바탕으로 집단선택설에 의한 설명들의 오류를 조목조목 파헤쳤다.
하지만 해밀튼의 50여 쪽에 이르는 수학적 논문과 더불어 윌리엄즈와 도킨스의 책이 구구절절이 설명한 집단선택설의 모순을 미국의 만화가 라슨(Gary Larson)은 만화 한 컷으로 해치웠다. 설치류의 동물 나그네쥐(lemming)는 오랫동안 자살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치티(Dennis Chitty) 교수의 연구로 결국 그들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게 아니라 미처 눈이 채 녹지도 않은 들판에서 먹이를 찾아 떼로 돌아다니다가 벼랑 끝에서 멈추지 못하고 차가운 강물에 빠져 죽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어쨌든 그들이 이처럼 떼죽음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시하는 ‘이론’은 철저하게 집단선택설의 관점을 지닌 것이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너도 나도 살려 하면 모두가 살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일부 ‘숭고한’ 나그네쥐들이 동료들을 위해 죽어준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라슨은 그의 만화에서 그 숭고한 나그네쥐들 중 홀연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돌연변이 개체의 출현을 상상한다 만일 구명대를 두르고자 하는 이기적 성향이 유전하는 변이라면 이듬 해 봄에는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나그네쥐가 더 많아질 것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귀한 유전자들은 숭고한 나그네쥐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지만 이기적 유전자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집단 수준의 선택은 개체 수준의 선택을 당할 수 없다. 집단선택은 그만큼 일어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 유전자도 개체의 번식을 통해야만 자신의 복사체들을 퍼뜨릴 수 있다. 한 개체내의 유전자들의 운명은 그 개체에게 달려있다. 다윈의 고민 두 가지에 대한 분석을 다룬 저서 <개미와 공작(The Ant and the Peacock, 1991)>에서 크러닌(Helena Croni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전자들은 스스로 발가벗고 자연선택의 심판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꼬리나 가죽, 또는 근육이나 껍질을 내세운다. 그들은 또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이나 기막힌 위장술, 배우자를 매료시키는 힘, 훌륭한 둥지를 만드는 능력 등을 내세운다. 유전자들의 차이는 이러한 표현형(phenotype)의 차이로 나타난다. 자연선택은 표현형적 변이에 작용함으로써 유전자에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들은 그들의 표현형적 효과의 선택가치(selective value)에 비례하여 다음 세대에 전파된다.
자연선택은 유전자, 개체, 집단, 그리고 심지어는 종의 수준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적응(adaptation)은 표현형으로 나타난다. 선택의 대상(object)과 결과(effect)는 종종 다를 수 있다. 철학자 엘리엇 소버(Elliott Sober)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선택 장난감(selection toy)’을 가지고 이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했다. 원통형으로 되어 있는 이 장난감에는 맨 위층으로부터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작은 크기의 구멍들이 뚫려 있다. 만일 가장 작은 구슬들의 색깔이 녹색이라면 맨 아래층에는 결국 작은 녹색 구슬들만 모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제일 작은 구슬을 선택한 것이지 녹색 구슬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선택의 대상(selection of)은 작은 구슬이었는데 결과적으로(selection for) 작은 구슬들의 색깔인 녹색도 선택된 것이다. 자연선택은 표현형에 작용하고, 그 결과로 후세에 전달되는 것은 유전자이다.
사라지지 않는 집단선택설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실체(entity)에 대한 논의는 크게 단위(unit)와 수준(level)으로 나뉘어 이뤄지지만, 이 둘은 때로 혼용되며 종종 혼란의 여지를 남긴다. 일찍이 도킨스는 자연선택의 과정에는 복제자(replicator)와 운반자(vehicle)가 관여하는데, 선택의 단위에 대한 논의는 운반자가 아니라 복제자에 초첨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철학자 헐(David Hull)은 복제자의 개념에는 사실 복제의 대상 외에도 선택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실체인 교류자(interactor)가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과정이란 “교류자들의 차등 절멸과 확산이 그들을 만들어낸 복제자들의 차등 보전을 일으키는 과정(a process in which the differential extinction and proliferation of interactors cause the differential perpetuation of the replicators that produced them)”이라는 헐의 논리에 따르면, 선택의 수준은 바로 교류자를 묻는 것이고 단위는 복제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의 대상, 단위, 또는 결과에 비해 선택의 수준은 훨씬 더 다양할 수 있다. 작게는 유전자, 세포, 생명체(organism)로부터 크게는 친족(kinship), 집단, 심지어는 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 수준에서 선택은 일어날 수 있다. 선택의 수준 논의에서 유전자 선택(genic selection)의 관점을 제외할 수는 절대 없지만 논쟁의 열기는 주로 개체와 집단간에 벌어진다. 다윈은 이 점에 있어서 사뭇 혼란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그의 자연선택 이론은 기본적으로 개체중심적이지만 1871년에 출간한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 사회에서 이타주의 또는 도덕적 행위가 어떻게 발생하고 유지되는지를 설명하려면 집단간의 경쟁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부족 내에서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유리한 점이 별로 없을지 모르지만,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많은 집단은 그렇지 못한 집단에 비해 훨씬 유리하다. 집단에 충성하려는 성향이 강하고 용감하며 타인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있어서 항상 다른 사람을 도울 자세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 또한 자연선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부족들간에는 하나의 부족이 다른 부족을 대체해가는 과정이 진행되므로,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도덕성이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므로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차지하는 수적 비중이 점차 늘어나게 될 것이다.
다윈의 이 같은 모호함에 힘 입은 바 있는지 윌리엄즈와 도킨스 등의 통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후반부터 데이빗 슬론 윌슨(David Sloan Wilson), 엘리엇 소버, 마이클 웨이드(Michael Wade)를 비롯한 일군의 진화학자들은 집단선택설이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고 실제로도 몇몇 특수한 조건만 맞으면 일어난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이른바 ‘다중수준 선택(multi-level selection)’으로 알려진 이들의 이론은 나름대로 설명력을 지니지만 진화의 역사에서 실제로 얼마나 빈번하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다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철학자 데이빗 헐(David Hull)은 이 같은 혼란은 근본적으로 개체와 집단이 지니고 있는 정의의 모호함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얘기하는 개체의 범주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딸기밭을 한 가득 메우고 있는 각각의 딸기 개체들은 종종 땅 속 줄기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의 딸기 줄기를 뽑아 들면 서로 독립적인 개체인 줄 알았던 여러 개체들이 줄줄이 딸려 올라온다. 땅 위에서는 분명히 서로 다른 개체처럼 제가끔 벌 나비를 유혹하며 번식 경쟁을 벌이지만 땅 속에서는 하나의 개체이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개미나 꿀벌의 군락은 분명히 많은 개체들로 이뤄져 있지만 전체가 대단히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조직이다. 그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개체처럼 유기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종종 ‘초유기체(superorganism)’라고 불린다. 이렇게 보면 생물계의 모든 조직은 결국 넓은 의미의 개체이며, 모든 개체는 다 보다 작은 구성체들의 집합이다.
에드워드 윌슨 : 다시 집단선택설로?
선택의 수준 문제를 두고 세계 최고 권위의 개미학자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행보가 주목을 끌고 있다. 윌리엄즈와 더불어 자칫 아무도 읽지 않을 해밀턴의 1964년 논문의 중요성을 일깨워 우리 모두가 유전자 렌즈를 끼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줬던 그가 최근 홀연 포괄적응도 개념의 혈연선택론에 대한 그의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일종의 폭탄 선언을 한 것이다. 집단선택설의 부활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데이빗 슬론 윌슨이 1970년대 중반 잠시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생활하던 시절 그와 가깝게 지냈던 에드워드 윌슨, 이 두 윌슨이 최근 다시 의기투합하여 진화, 적어도 사회성의 진화에는 유전자나 개체보다 집단 수준의 선택이 훨씬 더 중요했다는 주장을 들고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참으로 난처한 경험을 했다. 2005년 미국 텍사스의 오스틴에서 열린 인간행동및진화학회(Human Behavior and Evolution Society)의 기조강연에서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강연장을 가득 메운 해밀턴 추종자들에게 그의 심경 변화에 대해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야속하게도 해밀턴이 세상을 떠난 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공적이 다분히 부풀려진 감이 있다는 발언으로 장내는 이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회생물학 논란으로 반대 진영의 비난에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진 윌슨 교수인지라 장내의 분위기에 별로 아랑곳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은 애꿎게 강연장 중간쯤에 앉아 있던 나를 돌아보며 어깨를 들먹여 보였다. 그 날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아마 내가 유일한 윌슨 교수의 제자였던 것 같다. 강연이 끝난 후 사람들은 정작 윌슨 교수는 놓아둔 채 총총히 방을 빠져나가며 내게 다가와 어찌 된 일이냐며 따져 물었다.
사실 윌슨 교수는 선택의 수준에 관하여 초지일관 애매한 입장을 취해왔다. 개미를 연구하는 특수성 때문인지 그는 늘 해밀턴의 혈연선택을 군락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한다고 하여 우리들을 당황스럽게 하곤 했다. 그의 자서전 격인 <자연주의자(Naturalist, 1994)>에 보면 해밀턴 이론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던 그의 모습이 군데군데 묘사되어 있다. 그는 마이애미로 가는 열차 안에서 처음으로 해밀턴의 논문을 읽는다. 그는 “나는 처음에는 ‘이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에 온 힘을 다해 거부하려 했다”고 쓰고 있다. 열차를 타고 가며 또 “나는 가끔 눈을 감고 대안을 찾아보려 노력했다”고도 썼다. 그러나 마이애미에 도착한 이른 오후 “나는 포기했다. 나는 개종하여 해밀턴의 손 안에 나를 맡겼다”라고 토로한다. 그 후 윌슨 교수는 해밀턴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그를 하버드에 모셔오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역시 <자연주의자>에 보면 훗날 호혜성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 이론을 개발한 트리버즈(Robert Trivers)가 해밀턴의 이론을 보완한 것을 구태여 “끝내 해밀턴의 논리에서 실수를 찾아낸 것은 바로 트리버즈였다”라고 표현한 걸로 보아 윌슨 교수는 해밀턴의 이론에 대한 불편함을 끝내 떨쳐내지 못했던 것 같다.
자연선택의 수준은 개체인가 집단인가?
두 윌슨 교수가 공동 저술한 2007년 논문 ‘사회생물학의 이론적 기초를 다시 생각한다(Rethinking the Theoretical Foundation of Sociobiology)’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집단 내에서는 이기주의가 이타주의를 이긴다. [그러나] 이타적인 집단이 이기적인 집단을 이긴다. 다른 모든 것은 사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선택이 노는 물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에 관한 논의가 또다시 시끄러워지고 있다.
2010년 4월 22일 목요일
람타(Ramtha) '하느님'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일뿐
다음 카페 현리묘법신공학회 http://cafe.daum.net/hmsh1208
에서 퍼온 람타 서평입니다.
공감가는 서평이라 여기 옮김니다.
진실로 위대한 책 <람타(Ramtha)>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문득 든 생각...
"책을 보면서 위대하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던가..."
우주에 풍덩 빠졌다가 나온 기분이 이런것일런지도...
지구의 시뮬레이션 시간으로 따져서 3만 5천년전 완전히 깨달은 존재 '람타'
그는 거침없이 말한다...
"당신이 진실로 허용한다면...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은 우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들은 '진실로 허용'할 수가 없다.
도덕 윤리 종교 미풍양속 등 온갖 사회적 집단의식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래 '신'이었던 인간들이 한눈을 팔고 지구라는 놀이터에 흠뻑 취해 있는 동안
생로병사의 의식과 시간 관념이 유전자 속에 깊숙히 파고 들었다..
원래 이 우주에는 사회의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란 개념도 없으며 생로병사 따위는 끼어들 자리 조차 없는 생소한 개념일뿐이다..
원래 없던 것을 '신'인 우리 인간들이 기적처럼 만들기도 했는데...
왜 원래 그 자리로 돌아갈 생각은 못하는가?
생각만 바꾸면 지금부터라도 모든게 가능해 지는데 왜 그 '쉬운'일을 하지 못하는가?
지금이라도 신이 되고 싶은가?
그럼 꾸준히 생각하라..
"나는 모든걸 할 수 있는 신"이라고...
"더 이상 깨달아야할 아무것도 없는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단지 그렇게만 생각하면 된다...
너무 쉬워서 이상한가?
그럼 그 관념부터 버리시라..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가 바로 '하느님'이다..
하지만 이 책은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모든 종교와 윤리는 인간을 노예로 속박시키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하느님'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일뿐이다..
이 책에는...
생각이 어떻게 물질화가 되어 실제로 발현되는지...
우주는 어떻게 탄생되었으며 인간에게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한치의 숨김도 없이 적나라하게 묘사를 하고 있다..
다 읽고 나면 왜 이 책을 위대하다고 했는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로되...
더 말해서 무엇하리요...
그 사람의 영성이 얼마나 열려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는 서적 <람타> 그 위대함을 당신에게도 전한다..
에서 퍼온 람타 서평입니다.
공감가는 서평이라 여기 옮김니다.
진실로 위대한 책 <람타(Ramtha)>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문득 든 생각...
"책을 보면서 위대하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던가..."
우주에 풍덩 빠졌다가 나온 기분이 이런것일런지도...
지구의 시뮬레이션 시간으로 따져서 3만 5천년전 완전히 깨달은 존재 '람타'
그는 거침없이 말한다...
"당신이 진실로 허용한다면...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은 우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들은 '진실로 허용'할 수가 없다.
도덕 윤리 종교 미풍양속 등 온갖 사회적 집단의식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래 '신'이었던 인간들이 한눈을 팔고 지구라는 놀이터에 흠뻑 취해 있는 동안
생로병사의 의식과 시간 관념이 유전자 속에 깊숙히 파고 들었다..
원래 이 우주에는 사회의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란 개념도 없으며 생로병사 따위는 끼어들 자리 조차 없는 생소한 개념일뿐이다..
원래 없던 것을 '신'인 우리 인간들이 기적처럼 만들기도 했는데...
왜 원래 그 자리로 돌아갈 생각은 못하는가?
생각만 바꾸면 지금부터라도 모든게 가능해 지는데 왜 그 '쉬운'일을 하지 못하는가?
지금이라도 신이 되고 싶은가?
그럼 꾸준히 생각하라..
"나는 모든걸 할 수 있는 신"이라고...
"더 이상 깨달아야할 아무것도 없는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단지 그렇게만 생각하면 된다...
너무 쉬워서 이상한가?
그럼 그 관념부터 버리시라..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가 바로 '하느님'이다..
하지만 이 책은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모든 종교와 윤리는 인간을 노예로 속박시키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하느님'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일뿐이다..
이 책에는...
생각이 어떻게 물질화가 되어 실제로 발현되는지...
우주는 어떻게 탄생되었으며 인간에게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한치의 숨김도 없이 적나라하게 묘사를 하고 있다..
다 읽고 나면 왜 이 책을 위대하다고 했는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로되...
더 말해서 무엇하리요...
그 사람의 영성이 얼마나 열려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는 서적 <람타> 그 위대함을 당신에게도 전한다..
2010년 4월 20일 화요일
공간이 다르면 시간도 다르다 10의 30승의 수수께끼 "무한중첩연속(無限重疊連續) 우주론
인류가 가진 두 가지 의문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의문은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실체에 관한 것이리라.
오늘날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의문에 대한 끊임없는 과학적 탐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그 해답에 도달하는 것은 아직도 요원하며, 사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이 과연 있는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오랜 옛날부터 이들 의문에 대한 단정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또한 세대에서 세대를 거치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굳게 믿고 있는 사상체계가 있으니 이는 곧 종교이다.
현재 인류의 정신세계를 이끌고 있는 종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유태교 및 그에서 파생된 기독교, 마호메트교 등 중동의 사막지대에서 일어난 유일신을 숭배하는 종교로서 신의 절대적 권능에 대한 믿음의 종교라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로서 이는 인간 스스로 자아와 우주의 본질을 깨쳐 나가야 하는 깨달음의 종교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원류인 유태교는 약 3천5백년 전 모세에 의하여 그 체계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불교는 약 2천5백년 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계승하기 위하여 성립되었다.
유태교 및 기독교의 경전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저자들이 쓴 것을 집성한 것이며, 불교의 경전들은 석가모니의 열반 후 제자들이 기억을 모아 기록한 것이다.
이들 종교의 신실한 신자들에게는 불경스런 말이겠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러한 기록들에는 필경 기록자들의 생각이나 당시의 보편적인 가치관 같은 것이 가미되고 채색되어 있을 것이며, 그리고 당연히 모든 경전들은 수 천년 전 당시 사람들의 언어로 쓰여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진리는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을 것이지만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옛날 사람들의 시각을 탈피하여, 경전 속에 고대의 언어로써 감추어지고 고대의 관념으로써 덧씌워진 진리의 본질을 찾아내어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조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인류의 두 가지 기본적인 의문 중 우주의 실체에 관하여 석가모니가 제시한 해답을 현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우주의 본질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불교의 우주관
불교의 경전은 그 수가 방대하고 또 그 속에 담겨진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에 걸쳐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우주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참 뜻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부처란 우주의 다른 표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해석을 받아들일 경우, 불경에서「부처를 본다」또는「여래를 본다」라고 하는 구절은 우주의 본질을 깨닫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대승경전들에는 부처의 키가 무한히 크며 그 수명 또한 무한히 길다는 구절이 빈번하게 나오는데, 그 뜻은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히 크며 시간적으로 무한히 길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부처의 키나 수명을 말할 때 그냥 무한하다고 하지 않고 겁, 아승지, 항하사, 나유타 등 거대한 단위를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제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비유를 들어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석가모니는 무한한 우주라 하더라도 한낱 티끌에 불과하며, 하나의 티끌 속에도 무량우주가 담겨져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석가모니의 우주관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필자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이 정확히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라는 경전에서 찾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제 9절 진신관(眞身觀) : 無量壽佛...
佛身高六十萬億那由他恒河沙由旬...
제10절 관음관(觀音觀) : 觀世音菩薩...
身長八十萬億那由他由旬...
제11절 세지관(勢至觀) : 大勢至菩薩...
身量大小亦如觀世音...
즉, 아미타불(무량수불)의 신장은 60만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고, 관세음보살의 신장은 80만억 나유타 유순이며, 대세지보살의 신장은 관세음보살과 같다고 하는 내용이다.
석가모니는 여기서 부처 즉 우주의 크기를 아주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 경전의 명칭을 고려해볼 때 석가모니는 이 구절로써 우주의 실체에 대하여 확정적으로 설파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관세음보살의 신장을 계산한다
그러면 우선, 관세음보살의 신장인 80만억 나유타 유순이 도대체 얼마만한 크기인가를 먼저 계산해 보기로 한다.
「나유타」란 아주 많은 수를 표시하는 인도의 단위로서 천억 또는 만억을 뜻하는데, 이 구절이 아주 큰 부처의 신장을 표현하고 있는 점과 나유타 앞에 이미 만억이라는 단위를 사용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여기서 사용된 나유타란 만억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리고 「유순」이란 인도의 거리 단위로서 우리나라식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약30리 또는 40리에 해당되며, 이 단위도 마찬가지로 거대한 부처의 키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고 있으므로 큰 쪽인 40리를 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80만억 나유타 유순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80x만억x만억x16km = 80x10,000x100,000,000x10,000x100,000,000x16km
= 1,280,000,000,000,000,000,000,000,00
= 1.28 x (10의 27승)km
이것은 그야말로 무한의 크기라 할 수 있고 제한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얼핏 감을 잡기 어려운 규모이므로, 이 수치를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은하의 크기 및 우주의 크기와 비교해 보기로 하겠다.
태양계가 포함된 우리 은하계의 반경은 약 5만 광년이며, 이와 같은 은하를 천억 개 이상 포함하고 있는 대우주의 반경은 현재까지 관측된 바로는 약 150억 광년이라고 한다.
광년이란 빛이 매 초당 30만km로 1년간 달리는 거리를 말하므로 은하계의 반경인 5만 광년이란,
300,000km x 60(초) x 60(분) x 24(시간) x 365(일) x 50,000(년)
= 4.7 x (10의 17승)km이고,
또 대우주의 반경인 150억 광년은,
300,000km x 60 x 60 x 24 x 365 x 15,000,000,000
= 1.4x(10의23승)km로 표시된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의 신장은 은하계 반경의 27x(10의9승)배 즉 27억 배이며, 대우주의 반경의 9x(10의3승)배 즉 9천배가 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이다.
은하 및 우주의 반경은 현재의 과학수준으로는 대략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27억 배 또는 9천배라는 수치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으로써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 또는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규모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여기서 관세음보살과 우주를 동시에 생각해본다면, 반경 150억 광년의 우리 우주 옆에 그보다 9천 배나 더 큰 어마어마한 부처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보다는 거대한 부처의 내부에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우주를 떠올리게 된다.
프랙탈 구조
석가모니는, 우주는 무한하지만 티끌과 같고 티끌 속에도 또한 무량우주가 있다고 가르친다.
즉, 그의 우주는 수평적으로 무한할뿐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프랙탈 구조로서 계속하여 이어진다.
잠시 여기서 프랙탈(fractal)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스웨덴의 수학자 코흐가 고안해낸 일종의 초눈송이의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참조:아이작 아시모프 저, 「우주의 비밀」>
먼저 정삼각형을 하나 그린다. 그리고 각 변을 3등분하고 그 중 가운데 부분을 밑변으로 하는 새로운 작은 정삼각형을 각 변 위에다 그린다. 그러면 그 모양은 6개의 팔을 가진 별 모양이 된다.
이번에는 6개의 팔인 각각의 정삼각형에서 바깥쪽 양변을 3등분하고 앞서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가운데 부분에 새로운 정삼각형을 그린다. 그러면 18개의 정삼각형으로 삐죽삐죽한 도형을 얻게 된다.
이번에는 그 18개의 정삼각형의 바깥쪽 양변을 3등분하여 같은 방법으로 새로운 정삼각형을 그려 나간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삼각형을 만들어 나간 것이 바로 초눈송이이다.
이런 도형에서는 처음의 삼각형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정교하게 그 위에 작도를 해 나간다 하더라도, 곧 새로운 삼각형들은 더이상 손으로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작아지고 만다.
기하학에서 점은 0차원이고, 선은 1차원이며, 평면은 2차원, 입체는 3차원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초눈송이의 경계선은 끝없는 보풀이 일어있을 뿐 아니라 각 점에서 갑작스런 방향전환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정상적인 선으로 생각할 수 없고 그렇다고 평면이라고 할 수도 없다.
즉, 그것은 1과 2사이의 차원을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 태생인 미국의 물리학자 망델브로는 그 차원을 log4를 log3으로 나눈 값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밝혔다. 이 값은 약 1.26186이다. 따라서 초눈송이의 경계선은 1¼을 약간 넘는 차원을 가진다.
초눈송이와 같이 정수가 아니라 분수의 차원을 갖는 이러한 도형을 프랙탈이라고 부른다.
프랙탈 구조가 갖는 특성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프랙탈의 구조이다. 처음 삼각형의 한 변에 붙어 있는 비교적 큰 삼각형 하나를 선택해서 조사해 보면, 거기에는 점점 더 작은 삼각형들이 무한히 붙어 자라나므로 무한히 복잡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붙어 있는 작은 삼각형 중에서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겨우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삼각형을 하나 선택하여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만큼 확대시킨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처음에 선택한 큰 삼각형과 똑같이 복잡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여기에 붙어 있는 더욱 작은 삼각형을 하나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확대시킨 모양은 처음의 삼각형과 똑같다.
이와 같이 아무리 작은 삼각형을 선택하더라도 처음의 삼각형이 지닌 복잡한 모양을 그대로 갖게 되는 것이 프랙탈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간단한 예로서, 줄기가 세 갈래로 갈라진 나무를 생각해보자. 이 세 갈래의 줄기는 각각 다시 세 갈래로 갈라지고, 새로 갈라진 줄기들은 다시 세 갈래로 갈라진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줄기에서 다시 세 갈래로 영원히 갈라져 나가는 초나무에서는 어느 하나의 줄기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전체 나무와 똑 같은 복잡성을 가진다.
이상 프랙탈의 개념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따라면 우주는 프랙탈 구조를 갖는다고 해석할 수가 있다. 즉, 우리의 우주는 부처라고 표현된 거대한 존재 내부의 아주 작은 부분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 안에도 무한히 많은 소우주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부처가 내 속에 있다"는 가르침의 의미
그렇다면 부처와 같은 거대한 존재는 무수히 많이 있을 것이고 그들의 하늘에는 다시 무한의 우주가 펼쳐져 있을 것이며, 같은 논리로서, 우리의 몸 속에도 우리를 거대한 부처로 여길 작은 존재들이 무수히 있을 것이고 그들의 몸 안에는 또다시 무한의 우주가 연속될 것이다.
티끌 속에 우주가 있고 우주 또한 티끌이며, 그리고 부처가 내 속에 있고 나 또한 부처라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막연한 관념으로써가 아니라 이와 같은 구체적인 인식으로써 접근할 수 있다.
이제 아미타불의 키가 관세음보살보다 항하사 배나 더 크다고 표현된 구절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겠는데, 석가모니는 부처 중의 부처인 아미타불의 키로써 우주의 프랙탈 구조적 연속성을 설(設)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필자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을 현대적 자료들을 사용하여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그가 말하고자 한 우주의 실체에 보다 더 접근해보고자 하는데, 이와 같은 시도는 분명 우주에 대해 고뇌해 본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흥미를 유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우주가 어떤 무한히 큰 존재 속에 들어 있고 우리 몸 속에도 무한히 작은 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다시 연속되어 있다는 우주관을 당장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필자는 그 가능성을 어느 정도 밝혀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작은 삼각형과 큰 삼각형이 있는데, 이 두 삼각형이 닮은꼴이라면 서로 대응하는 세 변의 비가 모두 같을 것이고 따라서 어느 하나를 축소시키거나 확대시켜 다른 쪽과 같은 크기로 만든다면 두 삼각형은 정확히 일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닮은꼴이란 크기만 서로 다를 뿐 본질적으로 동일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 삼각형을 점점 축소시키고 다른 것은 점점 확대시켜 보자. 이렇게 하면 크기는 10배, 20배... 점점 차이가 나게 되겠지만 양 삼각형이 닮은꼴이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만약 두 삼각형을 그 크기에 있어서 하나는 소립자 수준까지 축소시키고 다른 하나는 대우주 수준까지 확대시켰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대응하는 변의 비를 측정할 수만 있다면 두 삼각형이 닮은꼴임을 증명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논리로 석가모니의 우주관을 생각해보자. 우리의 우주가 부처라는 거대한 존재의 내부에 있고 우리 내부에도 무한의 우주가 같은 구조로서 연속되어 있다면 여기에는 반드시 위와 같은 비례관계가 성립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례관계가 성립하는 경우 그 값은 사람과 부처의 크기의 비와 동일할 것이다. 사람은 갓난아기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다양하기 때문에 그 평균적인 신장을 1m로 잡으면 될 것이므로, 사람과 부처의 신장의 비는
1m : 1.28 x(10의 27승)km = 1 : 1.28 x (10의 30승)
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밀한 수치는 표현상 오히려 부적절할 수 있으므로, 사람과 부처의 신장의 비를 대략 1 : (10의30승)으로 보기로 하자.
여기서 부처의 내부를 구성하는 큰 우주를 거시세계라 하고 우리 내부에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된 아주 작은 우주를 미시세계라 하면, 거시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과 미시세계에서 그에 대응하는 요소들 사이에는 위와 동일한 비례관계가 성립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비교
그러면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어떤 요소끼리 서로 대응하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거시세계.
인간이 현대 과학으로써 관측하고 있는 대우주의 반경은 약 1백50억 광년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은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우주에는 천억개 이상의 은하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은하는 인접한 다른 은하들과 국부은하군을 형성하고 국부은하군들이 모여서 더 큰 은하단을 이루고 있다.
또 은하의 중심에는 은하핵이 있고 은하는 그 중심을 축으로 하여 회전운동을 하며, 국부은하군을 구성하는 은하들은 국부은하군의 인력중심 주위를 돌고 있다. 은하는 별의 집단으로서, 우리 은하계는 대략 3천억 개의 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태양도 그 별들 중의 하나이다.
다음은 우리 내부의 미시세계를 들여다보자.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기본단위는 세포이다.
인간의 신체는 약 60조 개의 세포로써 구성되어 있는데 세포의 크기는 반경 약 5미크론 [5x(10의-4승)cm]에서 50미크론 [5x(10의-3승)cm]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세포의 기초단위는 원자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의 몸은 대략 63%의 수소, 25.5%의 산소, 9.4%의 탄소, 1.4%의 질소 및 0.7%의 기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가 몇 개 합쳐 물질의 특성을 갖는 최소 단위인 분자를 이루고, 분자들이 모여서 단백질, 핵산 등의 거대분자를 만들며 이 거대분자들이 모여서 세포 내의 형태학적 물질인 리보솜, 미토콘드리아, 핵, DNA 등을 만든다.
그리고 원자의 중심에는 원자핵이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으며,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들은 상호 진동함과 동시에 그 인력중심 주위를 돌고 있다. 원자는 물질의 궁극적인 최소 단위가 아니며 그 내부에는 무수한 소립자가 존재한다.
이상 살펴본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체계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거시세계 : 별 - (은하핵) - 은하 - 국부은하단 - 은하단 - 우주 - 부처
미시세계 : 소립자 - (원자핵) - 원자 - 분자 - 형태학적 물질 - 세포 - 사람
필자는 양 극단의 두 세계를 살펴보고 그 구성 요소를 서로 대응시켜 위와 같이 정리하였는데, 이렇게 대응 요소를 결정하기 위하여 각 단계의 크기의 비와 동일 요소 상호간의 간격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였다.
만일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된다는 우주관이 옳은 것이라면 대응하는 각 요소들 사이에는 사람과 부처의 키의 비인 대략 1 : (10의30승)의 비례법칙이 성립할 것이고, 그 우주관이 틀린 것이라면 이와 같은 비례법칙이 성립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각 대응 요소의 크기의 비를 구하기 위해서는 각 요소의 크기가 먼저 결정되지 않으면 안되는 바, 현대과학으로써 그 크기가 거의 정확하게 알려져 있고 또한 그 크기가 일정한 범위 내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는 원자핵과 은하핵, 원자와 은하, 그리고 세포와 우주 등을 들 수 있다.
원자의 반경은 옹스트롬[= (10의-8승)cm]으로 표시되며, 원자핵의 반경은 원자반경의 약 10만분의 1인 (10의-13승)cm이다.
세포의 반경은 약 5미크론[5x (10의-4승)cm]에서 50미크론[5x(10의-3승)cm] 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은하의 반경은 약 1만 광년에서 5만 광년 사이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평균적인 반경은 약 3만 광년이다.
은하의 중심에는 은하핵이 있는데, 우리 은하계의 경우 그 반경은 약 0.33광년이다. 그리고 천억 개 이상의 은하로 구성되어 있는 대우주는 최근 그 반경이 약 1백50억 광년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상 비교할 각 요소들의 크기를 알아 보았는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작은 문제점에 부딪치게 된다.
즉, 위에서 살펴 본 수치들은 모두 대략치로서 확정적인 하나의 크기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범위 내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크기를 서로 비교할 대상으로서 결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세포가 곧 우주
혹자는 확정적인 값을 갖지 않는 대상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이와 같은 시도가 별 가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우주에는 확정적인 단일의 값을 갖는 대상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필자의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기 위하여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원자, 원자핵, 은하핵 및 우주의 반경은 현재까지 알려진 값 또는 평균치를 채택하며, 세포와 은하의 반경에 대해서는 분포하는 범위의 중간쯤 되는 25미크론과 3만 광년을 택하여 계산하고, 그 결과에 플러스 마이너스 약 10배 정도의 편차를 허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만일 석가모니의 우주관이 옳지 않다면 따라서 이러한 비교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행위라면, 우리는 10배의 편차는 고사하고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양 극단 세계의 대응요소들의 크기를 비교해 보자.
첫째, 세포의 반경 : 우주의 반경 = 25미크론 : 1백 50억 광년
= 25x(10의-9승)km : 1.42x(10의23승)km
= 1 : 5.68 x (10의 30승)
둘째, 원자의 반경 : 은하의 반경 = 1옹스트롬 : 3만 광년
= 1x(10의-13승)km : 2.84x(10의17승)km
= 1 : 2.84 x (10의30승)
셋째, 원자핵의 반경 : 은하핵의 반경 = 1x(10의-13승)cm : 0.33광년
= 1x(10의-18승)km : 3.27x(10의12승)km
= 1 : 3.07 x (10의30승)
위의 놀라운 계산 결과는 석가모니의 우주관 즉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되어 있다는 가르침이 타당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우리가 관측하고 있는 반경 150억 광년의 대우주란 실은 어떤 거대한 존재 내부의 하나의 세포에 불과하며 그리고 반경 5만 광년의 우리 은하계는 그 세포 속의 겨우 하나의 원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같은 논리로써 우리 몸 속에는 세포 하나 하나를 반경 150억 광년의 광대한 우주로 여길 아주 작은 존재들이 살고 있는 소우주가 60조 개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우주는 무한의 공간과 무한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가모니는 부처의 수명 즉 우주의 시간은 무한히 길다고 가르치는 한편 그와 같은 긴 시간도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불경에는 부처의 수명에 대하여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위하여 겁이라는 기나긴 시간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법화경(法華經)중 여래수량품에 실려 있는「여래가 성불한 지는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라는 구절을 들 수 있겠다.
겁(劫·kalpa)이란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을 말하지만 고대 인도인들의 시간 개념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보면 약 43억2천만 년에 해당되며, 나유타란 만억을 뜻한다.
따라서 여래의 수명은, 100x1,000x10,000x100,000,000x10,000x100,000,000x4,320,000,000년 = [4.32 x (10의 38승)]년이나 되니, 현대과학이 추정하고 있는 우리 우주의 역사인 약 150억 년과 비교하면 아득하기 이를 데 없다.
공간이 다르면 시간도 다르다
석가모니는 이렇게 무한히 긴 시간도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는 바, 이제 그의 우주관을 시간의 측면에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우주는 무한의 공간과 무한의 시간으로 이루어지지만 시간이란 공간과는 달리 순전히 관념적인 것일 따름으로 현실적인 시간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며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순간에 구현되는 우주를 체험하고 있을 뿐 결코 시간축을 따라 여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간의 크기가 다르면 시간의 흐름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인데, 이 생각을 한 번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가령 가로 세로 각 1백m인 운동장이 있고, 키가 1m인 사람이 달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은 100m를 10초에 주파한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어떤 마술을 써서 세상의 모든 치수를 10분의 1로 축소시킨 작은 세계를 상상해 보자.
그러면 운동장은 10분의 1로 줄어들 것이므로 축소된 사람에게는 축소된 운동장의 길이가 여전히 100m로 보일 것이다.
이제 정상세계와 축소된 세계를 운동장의 출발선이 같도록 나란히 놓고, 두 사람이 동시에 자기 운동장의 출발점에서 달려나가게 했다고 상상한다.
이때 축소된 세계에 있는 사람의 경우 그에게는 운동장도, 그를 둘러싼 환경도, 그리고 그 자신도 모두 10분의 1로 축소되었고 또한 그가 가지고 있는 시계도 축소된 세계의 시계이므로, 그가 자기의 운동장 끝까지 달리는 데는 당연히 자기의 시계로 10초가 걸릴 것이다.
그러나 정상세계에서 볼 때 그 축소된 운동장은 10m로 보일 것이므로, 정상세계의 사람이 축소된 운동장의 끝과 동일한 지점에 도달하는 데는 1초 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두 세계의 사람이 서로 상대편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고 가정하면, 정상세계에서 볼 때 축소된 세계의 작은 사람이 달리는 모습은 아주 재빠르게 보일 것이고, 축소된 세계에서 볼 때는 정상세계의 거대한 사람의 달리는 동작은 마치 영사기를 10분의 1의 속도로 돌릴 때처럼 매우 느릿느릿하게 보일 것이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이 공간의 크기에 반비례하여 길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10분의 1로 축소된 공간에 있는 존재에게는 시간의 흐름이10배 길게 느껴진다. 다시 말하면 정상 세계의 1초는 10분의 1로 축소된 세계의 사람에게는 10초로 느껴진다.
축소된 공간에서 시간이 길어진다 함은 시간의 절대적인 길이가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간이 미분화되어 그 흐름을 느리게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원자의 1회전과 은하의 1회전 시간 비교
시간에 관한 이 논리는 공간을 백분의 1, 천분의 1, ..... (10의30승)분의 1로 축소한 경우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될 것이다.
따라서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되어 있다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이 옳다고 가정한다면, 양 극단 세계 사이에서 시간 흐름의 비는 두 세계 공간의 크기에 반비례할 것이다.
즉, 우리의 우주를 포함하고 있는 거대한 존재의 1초는 우리에게는 우주와 세포 크기의 비만큼 기나긴 시간으로 나타날 것이며, 같은 논리로써, 우리의 1초는 우리 내부의 미립자적 세계에 살고 있을 작은 존재에게는 무한에 가까운 긴 시간으로 나타날 것이다.
시간에 관한 필자의 이와 같은 의견이 현실적으로 성립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하여 필자는 은하와 원자의 운동을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은하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다시 한 번 보자.
그것은 마치 고속으로 소용돌이치는 물체의 정지 화면을 보는 것 같다.
실제 은하들은 은하의 중심을 지나는 축 주위를 회전하고 있으며, 은하가 1회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2억 년이라고 한다.
은하의 1회전에는 이토록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 움직임을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천체의 스펙트럼을 분석하여 확인할 수 있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된다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에 따른다면, 거시세계의 은하는 미시세계의 원자에 해당된다.
따라서 미시세계에 살고 있는 아주 작은 존재들에게는 원자가 은하로 보일 것이며, 원자의 1회전 시간이 그들에게는 2억 년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시간의 흐름은 공간의 크기에 반비례하여 길어진다는 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면, 원자의 1회전 시간과 은하의 1회전 시간의 비는 원자와 은하의 크기의 비와 동일할 것이다.
그러면 은하의 1회전 시간인 2억 년이라는 수치와 시간의 흐름에 관한 필자의 견해로써 원자의 회전 속도를 구해보기로 한다.
여기서 혹자는 은하의 회전속도가 은하내의 위치에 따라 다르고 원자의 회전속도 또한 원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계산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은하계의 회전에 관하여 살펴보면, 태양계가 위치한 지점에서의 은하의 회전속도는 1회전에 약 2억 년 걸리지만 은하계의 중심부근에서는 약 2천만 년밖에 걸리지 않으며, 태양계보다 더 외곽에서는 당연히 2억 년 이상이 소요된다. 그리고 원자의 회전에 관하여 보더라도 원자마다 회전 진동수가 다르며, 한 원자에서도 양자수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필자가 시도하는 것은 대국적인 시각에서 우주의 큰 틀을 추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사용하는 수치가 아주 세밀하지 않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공간의 문제에서처럼 계산 결과에 플러스 마이너스 10배의 편차를 허용할 용의만 있다면 이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킬 수 있다. 은하의 회전시간을 약 2억 년으로 잡으면 은하의 위치에 관계없이 그리고 은하의 종류에 관계없이 거의가 허용된 편차 내에 들어가며, 원자의 경우에도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의 99.3%가 수소, 산소, 탄소 및 질소로서 모두 근접한 준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회전 진동수는 다소 다르다 하더라도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기막힌 일치!
이제 거시세계와 미시세계 사이에서 은하의 1회전 시간인 2억 년이 원자의 회전에 적용될 경우 어떻게 나타나는지 계산해 보자. 우선 은하의 1회전 시간인 2억 년을 초 단위로 환산한다.
200,000,000년 x 365 x 24시간 x 60분 x 60초 = 6.31 x (10의15승)초
공간의 크기의 비는 원자와 은하의 크기의 비와 같으며, 이 값은 앞에서 계산한 바가 있다.
원자의 평균 반경 : 은하의 평균 반경 = 1옹스트롬 : 3만 광년 = 1 : 2.84x(10의 30승)
시간의 길이는 공간의 크기에 반비례한다는 필자의 가정에 따라서 원자의 1회전에 소요되는 시간을 계산하면,
[6.31x(10의15승)초] ÷ [2.84x(10의30승)] = 2.22 x (10의-15승)초
또 이로써 원자의 매 초당 회전수를 구하면,
원자의 매 초당 회전수 = 1 ÷ [2.22x(10의-15승) = 4.5 x (10의14승)회전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는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되어 있고, 시간의 흐름은 공간의 크기에 반비례하여 길어진다는 우주관으로써 계산한 원자의 1회전에 요하는 시간은 2.22 x (10의-15)초, 그리고 매 초당 회전수는 4.5 x (10의 14승)회전이다.
이 계산 결과를 물리학적 계산치와 비교해 보자.
덴마크의 물리학자 보어는 원자의 구조를 규명함에 있어서 최초로 양자론을 도입한 위대한 과학자인데, 그의 공식은 수소원자에 적용할 경우 실제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한다.
원자의 회전 진동수는 양자수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데 위의 계산 결과를 비교하기 위하여 양자수 2일 경우 즉, 수소원자의 스펙트럼 중 가시광선부의 진동수를 보기로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은하의 1회전 주기 2억 년 또한 은하의 가시광선부를 관측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보어의 공식을 수소 원자에 적용할 경우, 양자수 2일 때 원자의 1회전에 소요되는 시간은 1.22 x (10의-15승)초, 그리고 매초당 회전수는 8.2 x (10의14승)회전이다. 물리학적 계산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한 위의 계산 결과와 보어의 공식에 따른 계산 결과를 비교해 볼 때 놀라울만치 미소한 차이를 두고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10의 30승 배율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는 프랙탈 구조로 연속되며 양극단의 세계 사이에서 시간의 흐름은 공간의 크기에 반비례한다는 우주관의 타당성을 재확인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분자와 국부은하군의 운동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분자는 몇 개의 원자가 인력에 의해 결합해 있는 것으로서 물질의 특성을 갖는 최소 단위이다.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들은 그 중심을 통하는 축 주위를 회전하고 있으며, 또 원자들은 상호간에 진동운동을 함과 동시에 분자 전체의 인력중심 주위를 돌고 있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되어 있다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으로 우리의 우주를 생각해보면, 은하계와 주위의 몇몇 은하들로 구성되어 있는 국부은하군은 거대한 존재의 세포 안에 있는 하나의 분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은하계를 포함하는 국부은하군은 대략 30개의 대소 은하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은하들은 자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국부은하군 전체의 인력중심 주위를 돌고 있다.
만약 석가모니의 우주관과 공간의 크기에 따른 시간의 흐름에 관한 필자의 의견이 타당하다면, 분자와 국부은하군의 운동속도의 비는 당연히 앞의 계산 결과들처럼 대략 1 : (10의 30승)의 값을 나타낼 것이다.
분자구조 안에서 원자들은 상호 진동함과 동시에 인력중심 주위를 돌고 있기 때문에, 다(多)원자분자 내에서의 원자의 운동은 3방향의 자유도를 갖는 극히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분자의 표준적인 진동수는 매 초당 (10의11승)회이다.
따라서 분자가 1회 진동하는데 (10의 -13승)초 걸리며, 1회전에는 (10의 -11승)초가 걸린다.
이처럼 분자의 진동운동은 회전운동보다 100배 빠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는 주로 진동운동이 부각될 것이다.
그러므로 국부은하군의 운동과 분자의 운동을 비교함에 있어서는 진동운동을 고려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경우에도 물론 분자의 종류에 따라서 그 운동속도는 당연히 다르고 또 우리 은하계가 포함된 국부은하군이 어떤 분자에 해당될 것인지 알지 못하므로 이러한 비교는 의미가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 글의 목적이 우주의 대국적인 틀을 고찰하기 위한 것이므로 분자의 표준적인 운동과 우리 은하계가 속한 국부은하군만의 운동을 비교하는 것이 이 글의 일관성에서 벗어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어쨋든 석가모니의 우주관과 필자의 시간에 대한 견해가 타당성이 없다면, 이러한 종류의 시도로써는 아무런 답을 도출해 낼 수 없을 게 뻔하다.
은하계로부터 국부은하군의 맞은편 끝쯤에 위치한 안드로메다 은하까지의 거리는 약 250만 광년이며, 안드로메다 은하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그 시선속도는 초속 약 250km라고 한다.
그러나 태양계가 은하계 주위를 공전하면서 현재의 운동방향이 안드로메다 은하 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 효과를 감안하면, 실제로 안드로메다 은하가 우리 은하계의 중심을 향하여 이동하고 있는 속도는 초속 약 50km라고 한다.
만약 거시세계에서의 국부은하군과 미시세계에서의 분자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관되어 있다면, 은하들도 분자 내의 원자들과 마찬가지로 회전운동을 함과 동시에 진동운동을 하고 있을 것이며, 이 경우 진동운동이 회전운동보다 100배나 빠를 것이므로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은하들의 운동량은 거의 진동운동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안드로메다 은하가 우리 은하계의 중심을 향하여 초속 50km로 이동하고 있는 것은 안드로메다 은하의 진동운동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안드로메다 은하가 1회 진동하는데 이동하는 거리는 현재의 위치로부터 국부은하군의 중심까지 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의 거리가 될 것이므로, 그 거리는 약 250만 광년이 된다.
그리고 이를 초속 50km로 나누면 안드로메다 은하의 1회 진동에 요하는 시간을 구할 수 있다.
250만 광년 ÷ 50 = (300,000km x 60 x 60 x 24 x 365 x 2,500,000) ÷ 50
= 4.73 x (10의17승)초
따라서,
분자의 진동주기 : 국부은하군의 진동주기 = (10의-13승)초 : 4.73x(10의17승)초
= 1 : 4.73 x (10의 30승)
이 계산결과도 역시 앞에서 예측한대로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배율과 일치한다.
무의미한 존재는 없다
이상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된다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을 현대적 시각으로 고찰해 보았는데, 이에 따르면 인간도 그리고 삼라만상 어느 하나도 무의미한 존재란 없다.
우리는 프랙탈 구조로서 무한히 연속되는 우주의 한가운데에 있다. 우리 몸 안의 미시세계에 살고 있을 존재들에게 우리는 무한히 거대한 존재이며, 우리의 시계가 매초 째깍거릴 때마다 미시세계에서는 무한의 시간이 흘러간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사이에서의 시간의 흐름의 비는 대략 1 : (10의30승)이 될 것이므로, 우리의 시계로 1초 지나면 미시세계에서는 (10의 30승)초가 흘러가며 이것을 햇수로 환산하면 약 3백억조 년이 된다.
우리의 수명을 100년이라고 할 때 그 동안 미시세계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길이를 불경에서처럼 겁(=43억2천만 년)단위로 환산해 보면 물경 2백억 나유타 겁이 된다.
이제 독자 여러분들은 우주가 티끌이며 티끌 속에 우주가 있다는 것, 부처의 수명이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며 이 또한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이 바로 부처이며 내 속에 부처가 있고 또한 삼라만상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치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을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이 글은 결코 현대과학이 이룬 위대한 업적을 부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제 맹목과 아집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인류는 열린 우주로 들어섰다.
종교와 과학은 대립하는 체계로 인식되어서는 아니되며, 이제 인류는 바야흐로 종교와 과학이 한 점에서 만나는 시점에 도달하였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종교는 은둔에서 벗어나 과학적인 시각으로써 자신을 재조명해야 할 것이며, 과학은 옛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그 속에 담겨진 지혜를 재발견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우주를 바라보게끔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끝)
출처:http://nucosmos.mytripod.co.kr/
참고로 이글은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내셔널가이드 정윤표씨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의문은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실체에 관한 것이리라.
오늘날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의문에 대한 끊임없는 과학적 탐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그 해답에 도달하는 것은 아직도 요원하며, 사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이 과연 있는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오랜 옛날부터 이들 의문에 대한 단정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또한 세대에서 세대를 거치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굳게 믿고 있는 사상체계가 있으니 이는 곧 종교이다.
현재 인류의 정신세계를 이끌고 있는 종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유태교 및 그에서 파생된 기독교, 마호메트교 등 중동의 사막지대에서 일어난 유일신을 숭배하는 종교로서 신의 절대적 권능에 대한 믿음의 종교라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로서 이는 인간 스스로 자아와 우주의 본질을 깨쳐 나가야 하는 깨달음의 종교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원류인 유태교는 약 3천5백년 전 모세에 의하여 그 체계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불교는 약 2천5백년 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계승하기 위하여 성립되었다.
유태교 및 기독교의 경전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저자들이 쓴 것을 집성한 것이며, 불교의 경전들은 석가모니의 열반 후 제자들이 기억을 모아 기록한 것이다.
이들 종교의 신실한 신자들에게는 불경스런 말이겠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러한 기록들에는 필경 기록자들의 생각이나 당시의 보편적인 가치관 같은 것이 가미되고 채색되어 있을 것이며, 그리고 당연히 모든 경전들은 수 천년 전 당시 사람들의 언어로 쓰여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진리는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을 것이지만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옛날 사람들의 시각을 탈피하여, 경전 속에 고대의 언어로써 감추어지고 고대의 관념으로써 덧씌워진 진리의 본질을 찾아내어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조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인류의 두 가지 기본적인 의문 중 우주의 실체에 관하여 석가모니가 제시한 해답을 현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우주의 본질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불교의 우주관
불교의 경전은 그 수가 방대하고 또 그 속에 담겨진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에 걸쳐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우주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참 뜻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부처란 우주의 다른 표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해석을 받아들일 경우, 불경에서「부처를 본다」또는「여래를 본다」라고 하는 구절은 우주의 본질을 깨닫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대승경전들에는 부처의 키가 무한히 크며 그 수명 또한 무한히 길다는 구절이 빈번하게 나오는데, 그 뜻은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히 크며 시간적으로 무한히 길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부처의 키나 수명을 말할 때 그냥 무한하다고 하지 않고 겁, 아승지, 항하사, 나유타 등 거대한 단위를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제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비유를 들어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석가모니는 무한한 우주라 하더라도 한낱 티끌에 불과하며, 하나의 티끌 속에도 무량우주가 담겨져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석가모니의 우주관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필자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이 정확히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라는 경전에서 찾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제 9절 진신관(眞身觀) : 無量壽佛...
佛身高六十萬億那由他恒河沙由旬...
제10절 관음관(觀音觀) : 觀世音菩薩...
身長八十萬億那由他由旬...
제11절 세지관(勢至觀) : 大勢至菩薩...
身量大小亦如觀世音...
즉, 아미타불(무량수불)의 신장은 60만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고, 관세음보살의 신장은 80만억 나유타 유순이며, 대세지보살의 신장은 관세음보살과 같다고 하는 내용이다.
석가모니는 여기서 부처 즉 우주의 크기를 아주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 경전의 명칭을 고려해볼 때 석가모니는 이 구절로써 우주의 실체에 대하여 확정적으로 설파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관세음보살의 신장을 계산한다
그러면 우선, 관세음보살의 신장인 80만억 나유타 유순이 도대체 얼마만한 크기인가를 먼저 계산해 보기로 한다.
「나유타」란 아주 많은 수를 표시하는 인도의 단위로서 천억 또는 만억을 뜻하는데, 이 구절이 아주 큰 부처의 신장을 표현하고 있는 점과 나유타 앞에 이미 만억이라는 단위를 사용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여기서 사용된 나유타란 만억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리고 「유순」이란 인도의 거리 단위로서 우리나라식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약30리 또는 40리에 해당되며, 이 단위도 마찬가지로 거대한 부처의 키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고 있으므로 큰 쪽인 40리를 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80만억 나유타 유순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80x만억x만억x16km = 80x10,000x100,000,000x10,000x100,000,000x16km
= 1,280,000,000,000,000,000,000,000,00
= 1.28 x (10의 27승)km
이것은 그야말로 무한의 크기라 할 수 있고 제한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얼핏 감을 잡기 어려운 규모이므로, 이 수치를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은하의 크기 및 우주의 크기와 비교해 보기로 하겠다.
태양계가 포함된 우리 은하계의 반경은 약 5만 광년이며, 이와 같은 은하를 천억 개 이상 포함하고 있는 대우주의 반경은 현재까지 관측된 바로는 약 150억 광년이라고 한다.
광년이란 빛이 매 초당 30만km로 1년간 달리는 거리를 말하므로 은하계의 반경인 5만 광년이란,
300,000km x 60(초) x 60(분) x 24(시간) x 365(일) x 50,000(년)
= 4.7 x (10의 17승)km이고,
또 대우주의 반경인 150억 광년은,
300,000km x 60 x 60 x 24 x 365 x 15,000,000,000
= 1.4x(10의23승)km로 표시된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의 신장은 은하계 반경의 27x(10의9승)배 즉 27억 배이며, 대우주의 반경의 9x(10의3승)배 즉 9천배가 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이다.
은하 및 우주의 반경은 현재의 과학수준으로는 대략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27억 배 또는 9천배라는 수치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으로써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 또는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규모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여기서 관세음보살과 우주를 동시에 생각해본다면, 반경 150억 광년의 우리 우주 옆에 그보다 9천 배나 더 큰 어마어마한 부처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보다는 거대한 부처의 내부에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우주를 떠올리게 된다.
프랙탈 구조
석가모니는, 우주는 무한하지만 티끌과 같고 티끌 속에도 또한 무량우주가 있다고 가르친다.
즉, 그의 우주는 수평적으로 무한할뿐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프랙탈 구조로서 계속하여 이어진다.
잠시 여기서 프랙탈(fractal)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스웨덴의 수학자 코흐가 고안해낸 일종의 초눈송이의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참조:아이작 아시모프 저, 「우주의 비밀」>
먼저 정삼각형을 하나 그린다. 그리고 각 변을 3등분하고 그 중 가운데 부분을 밑변으로 하는 새로운 작은 정삼각형을 각 변 위에다 그린다. 그러면 그 모양은 6개의 팔을 가진 별 모양이 된다.
이번에는 6개의 팔인 각각의 정삼각형에서 바깥쪽 양변을 3등분하고 앞서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가운데 부분에 새로운 정삼각형을 그린다. 그러면 18개의 정삼각형으로 삐죽삐죽한 도형을 얻게 된다.
이번에는 그 18개의 정삼각형의 바깥쪽 양변을 3등분하여 같은 방법으로 새로운 정삼각형을 그려 나간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삼각형을 만들어 나간 것이 바로 초눈송이이다.
이런 도형에서는 처음의 삼각형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정교하게 그 위에 작도를 해 나간다 하더라도, 곧 새로운 삼각형들은 더이상 손으로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작아지고 만다.
기하학에서 점은 0차원이고, 선은 1차원이며, 평면은 2차원, 입체는 3차원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초눈송이의 경계선은 끝없는 보풀이 일어있을 뿐 아니라 각 점에서 갑작스런 방향전환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정상적인 선으로 생각할 수 없고 그렇다고 평면이라고 할 수도 없다.
즉, 그것은 1과 2사이의 차원을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 태생인 미국의 물리학자 망델브로는 그 차원을 log4를 log3으로 나눈 값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밝혔다. 이 값은 약 1.26186이다. 따라서 초눈송이의 경계선은 1¼을 약간 넘는 차원을 가진다.
초눈송이와 같이 정수가 아니라 분수의 차원을 갖는 이러한 도형을 프랙탈이라고 부른다.
프랙탈 구조가 갖는 특성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프랙탈의 구조이다. 처음 삼각형의 한 변에 붙어 있는 비교적 큰 삼각형 하나를 선택해서 조사해 보면, 거기에는 점점 더 작은 삼각형들이 무한히 붙어 자라나므로 무한히 복잡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붙어 있는 작은 삼각형 중에서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겨우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삼각형을 하나 선택하여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만큼 확대시킨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처음에 선택한 큰 삼각형과 똑같이 복잡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여기에 붙어 있는 더욱 작은 삼각형을 하나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확대시킨 모양은 처음의 삼각형과 똑같다.
이와 같이 아무리 작은 삼각형을 선택하더라도 처음의 삼각형이 지닌 복잡한 모양을 그대로 갖게 되는 것이 프랙탈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간단한 예로서, 줄기가 세 갈래로 갈라진 나무를 생각해보자. 이 세 갈래의 줄기는 각각 다시 세 갈래로 갈라지고, 새로 갈라진 줄기들은 다시 세 갈래로 갈라진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줄기에서 다시 세 갈래로 영원히 갈라져 나가는 초나무에서는 어느 하나의 줄기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전체 나무와 똑 같은 복잡성을 가진다.
이상 프랙탈의 개념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따라면 우주는 프랙탈 구조를 갖는다고 해석할 수가 있다. 즉, 우리의 우주는 부처라고 표현된 거대한 존재 내부의 아주 작은 부분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 안에도 무한히 많은 소우주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부처가 내 속에 있다"는 가르침의 의미
그렇다면 부처와 같은 거대한 존재는 무수히 많이 있을 것이고 그들의 하늘에는 다시 무한의 우주가 펼쳐져 있을 것이며, 같은 논리로서, 우리의 몸 속에도 우리를 거대한 부처로 여길 작은 존재들이 무수히 있을 것이고 그들의 몸 안에는 또다시 무한의 우주가 연속될 것이다.
티끌 속에 우주가 있고 우주 또한 티끌이며, 그리고 부처가 내 속에 있고 나 또한 부처라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막연한 관념으로써가 아니라 이와 같은 구체적인 인식으로써 접근할 수 있다.
이제 아미타불의 키가 관세음보살보다 항하사 배나 더 크다고 표현된 구절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겠는데, 석가모니는 부처 중의 부처인 아미타불의 키로써 우주의 프랙탈 구조적 연속성을 설(設)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필자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을 현대적 자료들을 사용하여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그가 말하고자 한 우주의 실체에 보다 더 접근해보고자 하는데, 이와 같은 시도는 분명 우주에 대해 고뇌해 본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흥미를 유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우주가 어떤 무한히 큰 존재 속에 들어 있고 우리 몸 속에도 무한히 작은 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다시 연속되어 있다는 우주관을 당장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필자는 그 가능성을 어느 정도 밝혀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작은 삼각형과 큰 삼각형이 있는데, 이 두 삼각형이 닮은꼴이라면 서로 대응하는 세 변의 비가 모두 같을 것이고 따라서 어느 하나를 축소시키거나 확대시켜 다른 쪽과 같은 크기로 만든다면 두 삼각형은 정확히 일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닮은꼴이란 크기만 서로 다를 뿐 본질적으로 동일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 삼각형을 점점 축소시키고 다른 것은 점점 확대시켜 보자. 이렇게 하면 크기는 10배, 20배... 점점 차이가 나게 되겠지만 양 삼각형이 닮은꼴이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만약 두 삼각형을 그 크기에 있어서 하나는 소립자 수준까지 축소시키고 다른 하나는 대우주 수준까지 확대시켰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대응하는 변의 비를 측정할 수만 있다면 두 삼각형이 닮은꼴임을 증명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논리로 석가모니의 우주관을 생각해보자. 우리의 우주가 부처라는 거대한 존재의 내부에 있고 우리 내부에도 무한의 우주가 같은 구조로서 연속되어 있다면 여기에는 반드시 위와 같은 비례관계가 성립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례관계가 성립하는 경우 그 값은 사람과 부처의 크기의 비와 동일할 것이다. 사람은 갓난아기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다양하기 때문에 그 평균적인 신장을 1m로 잡으면 될 것이므로, 사람과 부처의 신장의 비는
1m : 1.28 x(10의 27승)km = 1 : 1.28 x (10의 30승)
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밀한 수치는 표현상 오히려 부적절할 수 있으므로, 사람과 부처의 신장의 비를 대략 1 : (10의30승)으로 보기로 하자.
여기서 부처의 내부를 구성하는 큰 우주를 거시세계라 하고 우리 내부에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된 아주 작은 우주를 미시세계라 하면, 거시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과 미시세계에서 그에 대응하는 요소들 사이에는 위와 동일한 비례관계가 성립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비교
그러면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어떤 요소끼리 서로 대응하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거시세계.
인간이 현대 과학으로써 관측하고 있는 대우주의 반경은 약 1백50억 광년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은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우주에는 천억개 이상의 은하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은하는 인접한 다른 은하들과 국부은하군을 형성하고 국부은하군들이 모여서 더 큰 은하단을 이루고 있다.
또 은하의 중심에는 은하핵이 있고 은하는 그 중심을 축으로 하여 회전운동을 하며, 국부은하군을 구성하는 은하들은 국부은하군의 인력중심 주위를 돌고 있다. 은하는 별의 집단으로서, 우리 은하계는 대략 3천억 개의 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태양도 그 별들 중의 하나이다.
다음은 우리 내부의 미시세계를 들여다보자.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기본단위는 세포이다.
인간의 신체는 약 60조 개의 세포로써 구성되어 있는데 세포의 크기는 반경 약 5미크론 [5x(10의-4승)cm]에서 50미크론 [5x(10의-3승)cm]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세포의 기초단위는 원자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의 몸은 대략 63%의 수소, 25.5%의 산소, 9.4%의 탄소, 1.4%의 질소 및 0.7%의 기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가 몇 개 합쳐 물질의 특성을 갖는 최소 단위인 분자를 이루고, 분자들이 모여서 단백질, 핵산 등의 거대분자를 만들며 이 거대분자들이 모여서 세포 내의 형태학적 물질인 리보솜, 미토콘드리아, 핵, DNA 등을 만든다.
그리고 원자의 중심에는 원자핵이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으며,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들은 상호 진동함과 동시에 그 인력중심 주위를 돌고 있다. 원자는 물질의 궁극적인 최소 단위가 아니며 그 내부에는 무수한 소립자가 존재한다.
이상 살펴본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체계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거시세계 : 별 - (은하핵) - 은하 - 국부은하단 - 은하단 - 우주 - 부처
미시세계 : 소립자 - (원자핵) - 원자 - 분자 - 형태학적 물질 - 세포 - 사람
필자는 양 극단의 두 세계를 살펴보고 그 구성 요소를 서로 대응시켜 위와 같이 정리하였는데, 이렇게 대응 요소를 결정하기 위하여 각 단계의 크기의 비와 동일 요소 상호간의 간격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였다.
만일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된다는 우주관이 옳은 것이라면 대응하는 각 요소들 사이에는 사람과 부처의 키의 비인 대략 1 : (10의30승)의 비례법칙이 성립할 것이고, 그 우주관이 틀린 것이라면 이와 같은 비례법칙이 성립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각 대응 요소의 크기의 비를 구하기 위해서는 각 요소의 크기가 먼저 결정되지 않으면 안되는 바, 현대과학으로써 그 크기가 거의 정확하게 알려져 있고 또한 그 크기가 일정한 범위 내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는 원자핵과 은하핵, 원자와 은하, 그리고 세포와 우주 등을 들 수 있다.
원자의 반경은 옹스트롬[= (10의-8승)cm]으로 표시되며, 원자핵의 반경은 원자반경의 약 10만분의 1인 (10의-13승)cm이다.
세포의 반경은 약 5미크론[5x (10의-4승)cm]에서 50미크론[5x(10의-3승)cm] 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은하의 반경은 약 1만 광년에서 5만 광년 사이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평균적인 반경은 약 3만 광년이다.
은하의 중심에는 은하핵이 있는데, 우리 은하계의 경우 그 반경은 약 0.33광년이다. 그리고 천억 개 이상의 은하로 구성되어 있는 대우주는 최근 그 반경이 약 1백50억 광년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상 비교할 각 요소들의 크기를 알아 보았는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작은 문제점에 부딪치게 된다.
즉, 위에서 살펴 본 수치들은 모두 대략치로서 확정적인 하나의 크기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범위 내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크기를 서로 비교할 대상으로서 결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세포가 곧 우주
혹자는 확정적인 값을 갖지 않는 대상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이와 같은 시도가 별 가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우주에는 확정적인 단일의 값을 갖는 대상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필자의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기 위하여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원자, 원자핵, 은하핵 및 우주의 반경은 현재까지 알려진 값 또는 평균치를 채택하며, 세포와 은하의 반경에 대해서는 분포하는 범위의 중간쯤 되는 25미크론과 3만 광년을 택하여 계산하고, 그 결과에 플러스 마이너스 약 10배 정도의 편차를 허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만일 석가모니의 우주관이 옳지 않다면 따라서 이러한 비교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행위라면, 우리는 10배의 편차는 고사하고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양 극단 세계의 대응요소들의 크기를 비교해 보자.
첫째, 세포의 반경 : 우주의 반경 = 25미크론 : 1백 50억 광년
= 25x(10의-9승)km : 1.42x(10의23승)km
= 1 : 5.68 x (10의 30승)
둘째, 원자의 반경 : 은하의 반경 = 1옹스트롬 : 3만 광년
= 1x(10의-13승)km : 2.84x(10의17승)km
= 1 : 2.84 x (10의30승)
셋째, 원자핵의 반경 : 은하핵의 반경 = 1x(10의-13승)cm : 0.33광년
= 1x(10의-18승)km : 3.27x(10의12승)km
= 1 : 3.07 x (10의30승)
위의 놀라운 계산 결과는 석가모니의 우주관 즉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되어 있다는 가르침이 타당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우리가 관측하고 있는 반경 150억 광년의 대우주란 실은 어떤 거대한 존재 내부의 하나의 세포에 불과하며 그리고 반경 5만 광년의 우리 은하계는 그 세포 속의 겨우 하나의 원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같은 논리로써 우리 몸 속에는 세포 하나 하나를 반경 150억 광년의 광대한 우주로 여길 아주 작은 존재들이 살고 있는 소우주가 60조 개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우주는 무한의 공간과 무한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가모니는 부처의 수명 즉 우주의 시간은 무한히 길다고 가르치는 한편 그와 같은 긴 시간도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불경에는 부처의 수명에 대하여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위하여 겁이라는 기나긴 시간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법화경(法華經)중 여래수량품에 실려 있는「여래가 성불한 지는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라는 구절을 들 수 있겠다.
겁(劫·kalpa)이란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을 말하지만 고대 인도인들의 시간 개념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보면 약 43억2천만 년에 해당되며, 나유타란 만억을 뜻한다.
따라서 여래의 수명은, 100x1,000x10,000x100,000,000x10,000x100,000,000x4,320,000,000년 = [4.32 x (10의 38승)]년이나 되니, 현대과학이 추정하고 있는 우리 우주의 역사인 약 150억 년과 비교하면 아득하기 이를 데 없다.
공간이 다르면 시간도 다르다
석가모니는 이렇게 무한히 긴 시간도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는 바, 이제 그의 우주관을 시간의 측면에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우주는 무한의 공간과 무한의 시간으로 이루어지지만 시간이란 공간과는 달리 순전히 관념적인 것일 따름으로 현실적인 시간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며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순간에 구현되는 우주를 체험하고 있을 뿐 결코 시간축을 따라 여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간의 크기가 다르면 시간의 흐름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인데, 이 생각을 한 번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가령 가로 세로 각 1백m인 운동장이 있고, 키가 1m인 사람이 달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은 100m를 10초에 주파한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어떤 마술을 써서 세상의 모든 치수를 10분의 1로 축소시킨 작은 세계를 상상해 보자.
그러면 운동장은 10분의 1로 줄어들 것이므로 축소된 사람에게는 축소된 운동장의 길이가 여전히 100m로 보일 것이다.
이제 정상세계와 축소된 세계를 운동장의 출발선이 같도록 나란히 놓고, 두 사람이 동시에 자기 운동장의 출발점에서 달려나가게 했다고 상상한다.
이때 축소된 세계에 있는 사람의 경우 그에게는 운동장도, 그를 둘러싼 환경도, 그리고 그 자신도 모두 10분의 1로 축소되었고 또한 그가 가지고 있는 시계도 축소된 세계의 시계이므로, 그가 자기의 운동장 끝까지 달리는 데는 당연히 자기의 시계로 10초가 걸릴 것이다.
그러나 정상세계에서 볼 때 그 축소된 운동장은 10m로 보일 것이므로, 정상세계의 사람이 축소된 운동장의 끝과 동일한 지점에 도달하는 데는 1초 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두 세계의 사람이 서로 상대편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고 가정하면, 정상세계에서 볼 때 축소된 세계의 작은 사람이 달리는 모습은 아주 재빠르게 보일 것이고, 축소된 세계에서 볼 때는 정상세계의 거대한 사람의 달리는 동작은 마치 영사기를 10분의 1의 속도로 돌릴 때처럼 매우 느릿느릿하게 보일 것이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이 공간의 크기에 반비례하여 길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10분의 1로 축소된 공간에 있는 존재에게는 시간의 흐름이10배 길게 느껴진다. 다시 말하면 정상 세계의 1초는 10분의 1로 축소된 세계의 사람에게는 10초로 느껴진다.
축소된 공간에서 시간이 길어진다 함은 시간의 절대적인 길이가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간이 미분화되어 그 흐름을 느리게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원자의 1회전과 은하의 1회전 시간 비교
시간에 관한 이 논리는 공간을 백분의 1, 천분의 1, ..... (10의30승)분의 1로 축소한 경우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될 것이다.
따라서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되어 있다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이 옳다고 가정한다면, 양 극단 세계 사이에서 시간 흐름의 비는 두 세계 공간의 크기에 반비례할 것이다.
즉, 우리의 우주를 포함하고 있는 거대한 존재의 1초는 우리에게는 우주와 세포 크기의 비만큼 기나긴 시간으로 나타날 것이며, 같은 논리로써, 우리의 1초는 우리 내부의 미립자적 세계에 살고 있을 작은 존재에게는 무한에 가까운 긴 시간으로 나타날 것이다.
시간에 관한 필자의 이와 같은 의견이 현실적으로 성립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하여 필자는 은하와 원자의 운동을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은하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다시 한 번 보자.
그것은 마치 고속으로 소용돌이치는 물체의 정지 화면을 보는 것 같다.
실제 은하들은 은하의 중심을 지나는 축 주위를 회전하고 있으며, 은하가 1회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2억 년이라고 한다.
은하의 1회전에는 이토록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 움직임을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천체의 스펙트럼을 분석하여 확인할 수 있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된다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에 따른다면, 거시세계의 은하는 미시세계의 원자에 해당된다.
따라서 미시세계에 살고 있는 아주 작은 존재들에게는 원자가 은하로 보일 것이며, 원자의 1회전 시간이 그들에게는 2억 년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시간의 흐름은 공간의 크기에 반비례하여 길어진다는 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면, 원자의 1회전 시간과 은하의 1회전 시간의 비는 원자와 은하의 크기의 비와 동일할 것이다.
그러면 은하의 1회전 시간인 2억 년이라는 수치와 시간의 흐름에 관한 필자의 견해로써 원자의 회전 속도를 구해보기로 한다.
여기서 혹자는 은하의 회전속도가 은하내의 위치에 따라 다르고 원자의 회전속도 또한 원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계산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은하계의 회전에 관하여 살펴보면, 태양계가 위치한 지점에서의 은하의 회전속도는 1회전에 약 2억 년 걸리지만 은하계의 중심부근에서는 약 2천만 년밖에 걸리지 않으며, 태양계보다 더 외곽에서는 당연히 2억 년 이상이 소요된다. 그리고 원자의 회전에 관하여 보더라도 원자마다 회전 진동수가 다르며, 한 원자에서도 양자수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필자가 시도하는 것은 대국적인 시각에서 우주의 큰 틀을 추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사용하는 수치가 아주 세밀하지 않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공간의 문제에서처럼 계산 결과에 플러스 마이너스 10배의 편차를 허용할 용의만 있다면 이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킬 수 있다. 은하의 회전시간을 약 2억 년으로 잡으면 은하의 위치에 관계없이 그리고 은하의 종류에 관계없이 거의가 허용된 편차 내에 들어가며, 원자의 경우에도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의 99.3%가 수소, 산소, 탄소 및 질소로서 모두 근접한 준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회전 진동수는 다소 다르다 하더라도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기막힌 일치!
이제 거시세계와 미시세계 사이에서 은하의 1회전 시간인 2억 년이 원자의 회전에 적용될 경우 어떻게 나타나는지 계산해 보자. 우선 은하의 1회전 시간인 2억 년을 초 단위로 환산한다.
200,000,000년 x 365 x 24시간 x 60분 x 60초 = 6.31 x (10의15승)초
공간의 크기의 비는 원자와 은하의 크기의 비와 같으며, 이 값은 앞에서 계산한 바가 있다.
원자의 평균 반경 : 은하의 평균 반경 = 1옹스트롬 : 3만 광년 = 1 : 2.84x(10의 30승)
시간의 길이는 공간의 크기에 반비례한다는 필자의 가정에 따라서 원자의 1회전에 소요되는 시간을 계산하면,
[6.31x(10의15승)초] ÷ [2.84x(10의30승)] = 2.22 x (10의-15승)초
또 이로써 원자의 매 초당 회전수를 구하면,
원자의 매 초당 회전수 = 1 ÷ [2.22x(10의-15승) = 4.5 x (10의14승)회전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는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되어 있고, 시간의 흐름은 공간의 크기에 반비례하여 길어진다는 우주관으로써 계산한 원자의 1회전에 요하는 시간은 2.22 x (10의-15)초, 그리고 매 초당 회전수는 4.5 x (10의 14승)회전이다.
이 계산 결과를 물리학적 계산치와 비교해 보자.
덴마크의 물리학자 보어는 원자의 구조를 규명함에 있어서 최초로 양자론을 도입한 위대한 과학자인데, 그의 공식은 수소원자에 적용할 경우 실제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한다.
원자의 회전 진동수는 양자수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데 위의 계산 결과를 비교하기 위하여 양자수 2일 경우 즉, 수소원자의 스펙트럼 중 가시광선부의 진동수를 보기로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은하의 1회전 주기 2억 년 또한 은하의 가시광선부를 관측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보어의 공식을 수소 원자에 적용할 경우, 양자수 2일 때 원자의 1회전에 소요되는 시간은 1.22 x (10의-15승)초, 그리고 매초당 회전수는 8.2 x (10의14승)회전이다. 물리학적 계산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한 위의 계산 결과와 보어의 공식에 따른 계산 결과를 비교해 볼 때 놀라울만치 미소한 차이를 두고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10의 30승 배율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는 프랙탈 구조로 연속되며 양극단의 세계 사이에서 시간의 흐름은 공간의 크기에 반비례한다는 우주관의 타당성을 재확인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분자와 국부은하군의 운동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분자는 몇 개의 원자가 인력에 의해 결합해 있는 것으로서 물질의 특성을 갖는 최소 단위이다.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들은 그 중심을 통하는 축 주위를 회전하고 있으며, 또 원자들은 상호간에 진동운동을 함과 동시에 분자 전체의 인력중심 주위를 돌고 있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되어 있다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으로 우리의 우주를 생각해보면, 은하계와 주위의 몇몇 은하들로 구성되어 있는 국부은하군은 거대한 존재의 세포 안에 있는 하나의 분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은하계를 포함하는 국부은하군은 대략 30개의 대소 은하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은하들은 자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국부은하군 전체의 인력중심 주위를 돌고 있다.
만약 석가모니의 우주관과 공간의 크기에 따른 시간의 흐름에 관한 필자의 의견이 타당하다면, 분자와 국부은하군의 운동속도의 비는 당연히 앞의 계산 결과들처럼 대략 1 : (10의 30승)의 값을 나타낼 것이다.
분자구조 안에서 원자들은 상호 진동함과 동시에 인력중심 주위를 돌고 있기 때문에, 다(多)원자분자 내에서의 원자의 운동은 3방향의 자유도를 갖는 극히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분자의 표준적인 진동수는 매 초당 (10의11승)회이다.
따라서 분자가 1회 진동하는데 (10의 -13승)초 걸리며, 1회전에는 (10의 -11승)초가 걸린다.
이처럼 분자의 진동운동은 회전운동보다 100배 빠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는 주로 진동운동이 부각될 것이다.
그러므로 국부은하군의 운동과 분자의 운동을 비교함에 있어서는 진동운동을 고려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경우에도 물론 분자의 종류에 따라서 그 운동속도는 당연히 다르고 또 우리 은하계가 포함된 국부은하군이 어떤 분자에 해당될 것인지 알지 못하므로 이러한 비교는 의미가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 글의 목적이 우주의 대국적인 틀을 고찰하기 위한 것이므로 분자의 표준적인 운동과 우리 은하계가 속한 국부은하군만의 운동을 비교하는 것이 이 글의 일관성에서 벗어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어쨋든 석가모니의 우주관과 필자의 시간에 대한 견해가 타당성이 없다면, 이러한 종류의 시도로써는 아무런 답을 도출해 낼 수 없을 게 뻔하다.
은하계로부터 국부은하군의 맞은편 끝쯤에 위치한 안드로메다 은하까지의 거리는 약 250만 광년이며, 안드로메다 은하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그 시선속도는 초속 약 250km라고 한다.
그러나 태양계가 은하계 주위를 공전하면서 현재의 운동방향이 안드로메다 은하 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 효과를 감안하면, 실제로 안드로메다 은하가 우리 은하계의 중심을 향하여 이동하고 있는 속도는 초속 약 50km라고 한다.
만약 거시세계에서의 국부은하군과 미시세계에서의 분자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관되어 있다면, 은하들도 분자 내의 원자들과 마찬가지로 회전운동을 함과 동시에 진동운동을 하고 있을 것이며, 이 경우 진동운동이 회전운동보다 100배나 빠를 것이므로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은하들의 운동량은 거의 진동운동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안드로메다 은하가 우리 은하계의 중심을 향하여 초속 50km로 이동하고 있는 것은 안드로메다 은하의 진동운동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안드로메다 은하가 1회 진동하는데 이동하는 거리는 현재의 위치로부터 국부은하군의 중심까지 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의 거리가 될 것이므로, 그 거리는 약 250만 광년이 된다.
그리고 이를 초속 50km로 나누면 안드로메다 은하의 1회 진동에 요하는 시간을 구할 수 있다.
250만 광년 ÷ 50 = (300,000km x 60 x 60 x 24 x 365 x 2,500,000) ÷ 50
= 4.73 x (10의17승)초
따라서,
분자의 진동주기 : 국부은하군의 진동주기 = (10의-13승)초 : 4.73x(10의17승)초
= 1 : 4.73 x (10의 30승)
이 계산결과도 역시 앞에서 예측한대로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배율과 일치한다.
무의미한 존재는 없다
이상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프랙탈 구조로서 연속된다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을 현대적 시각으로 고찰해 보았는데, 이에 따르면 인간도 그리고 삼라만상 어느 하나도 무의미한 존재란 없다.
우리는 프랙탈 구조로서 무한히 연속되는 우주의 한가운데에 있다. 우리 몸 안의 미시세계에 살고 있을 존재들에게 우리는 무한히 거대한 존재이며, 우리의 시계가 매초 째깍거릴 때마다 미시세계에서는 무한의 시간이 흘러간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사이에서의 시간의 흐름의 비는 대략 1 : (10의30승)이 될 것이므로, 우리의 시계로 1초 지나면 미시세계에서는 (10의 30승)초가 흘러가며 이것을 햇수로 환산하면 약 3백억조 년이 된다.
우리의 수명을 100년이라고 할 때 그 동안 미시세계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길이를 불경에서처럼 겁(=43억2천만 년)단위로 환산해 보면 물경 2백억 나유타 겁이 된다.
이제 독자 여러분들은 우주가 티끌이며 티끌 속에 우주가 있다는 것, 부처의 수명이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며 이 또한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이 바로 부처이며 내 속에 부처가 있고 또한 삼라만상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치는 석가모니의 우주관을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이 글은 결코 현대과학이 이룬 위대한 업적을 부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제 맹목과 아집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인류는 열린 우주로 들어섰다.
종교와 과학은 대립하는 체계로 인식되어서는 아니되며, 이제 인류는 바야흐로 종교와 과학이 한 점에서 만나는 시점에 도달하였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종교는 은둔에서 벗어나 과학적인 시각으로써 자신을 재조명해야 할 것이며, 과학은 옛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그 속에 담겨진 지혜를 재발견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우주를 바라보게끔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끝)
출처:http://nucosmos.mytripod.co.kr/
참고로 이글은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내셔널가이드 정윤표씨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아이패드는 '컴퓨터'가 아니다
오마이뉴스 | 입력 2010.04.18 16:55 | 수정 2010.04.18 18:03
이달초 애플의 '아이패드'가 공개됐다. 전 세계적 화제가 된 제품이니만큼 한국 언론으로부터도 큰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수 언론은 과거 아이폰 보도에서 보여주었던 몰이해를 되풀이했을 뿐이다. (기억하는가? '국내 스마트폰 시장 토종이 이끈다', '옴니아 2 아이폰 잡으러 왔다', '아이폰 게 섯거라', '아이폰 무턱대고 구입했다간 낭패')
아이패드가 출시된 후의 언론보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패드 뜯어보니 삼성, LG부품', '아이패드 뜨면 삼성, LG 웃는다?', '삼성전자도 '아이패드'같은 태블릿 PC 만든다', '애플 떨고 있니... 타블릿PC시장 '후끈'', '아이패드, 넷북 경쟁... '승자'는 누구'….
먼저 분명히 하고 싶은 게 있다. 아이패드는 '태블릿 피씨'가 아니다. 태블릿 피씨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과거에 휴렛패커드(HP)와 후지쯔 등이 내놓았다 실패한 윈도스 기반의 터치스크린 컴퓨터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휴렛패커드와 삼성 등이 내놓았다 실패할 윈도스 기반의 터치스크린 컴퓨터다. 앞으로 나올 태블릿 피씨가 옛날 것과 다른 점은 최신판 윈도스 운영체제를 담고 있다는 점과, 물리적 키보드가 빠져있다는 (따라서 입력이 매우 불편할 것이라는) 점뿐이다.
▲ 아이패드는 넷북과 달리 기존의 컴퓨터 판매를 침식하기보다는 '소비미디어'라는 새로운 시장을 형성할 것이다. 아이패드의 핵심은 소프트웨어로, 직관적인 인터페이스와 다양한 앱들은 다양한 미디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 준다.
ⓒ 강인규
아이패드는 소비용 기기다
아이패드는 '태블릿 피씨'가 아닐 뿐 아니라, '컴퓨터'도 아니다. 아이패드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던 영역을 개척한 새로운 도구다. 이름을 붙이자면, '종합미디어 소비기기(multimedia consumption device)' 쯤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소비'다.
컴퓨터는 '생산'작업용으로는 적합할지 모르나, '소비'에 적합한 매체는 결코 아니었다. 물론 컴퓨터는 다양한 일을 해낸다. 여기에는 문서작성, 웹사이트 제작, 이미지와 비디오 편집 등의 생산작업에서, 웹 서핑, 사진/비디오 시청, 게임 등의 소비영역까지 두루 포함된다. 문제는 컴퓨터가 이 모든 일들을 제대로 해 냈느냐다.
소비용 매체로서 컴퓨터는 배우기 어렵고, 가지고 다니기 무겁고, 조작하기 불편한 장치였다. 아이패드는 컴퓨터의 소비영역을 떼어내어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따라서 "삼성, '아이패드'같은 태블릿PC 만든다"거나 "애플 떨고 있니... 태블릿PC 시장 '후끈'" 같은 기사는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삼성이 '태블릿PC'를 만들지는 모르지만 (물론 만들 것이다), "아이패드 같은" 것일 수는 없으며, "태블릿PC 시장이 '후끈'"거릴지 모르지만, 이는 아이패드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아이패드는 미디어 소비전용 매체일뿐 아니라, 모바일 기기라는 점에서도 컴퓨터와는 차이가 있다.
▲ 매체와 도구가 내용을 지배하던 컴퓨터와 달리, 아이패드는 내용을 우위에 둔다. 컴퓨터 기반의 웹브라우저와 달리, 아이패드는 웹사이트를 틀에 가두지 않는다. 복잡한 메뉴나 스크롤바 등도 보이지 않는다.
ⓒ 강인규
컴퓨터 포기하고 아이패드 살 사람 얼마나 될까
대만의 컴퓨터업체 아수스는 2007년 말에 '이피시(Eee PC)'라는 저가의 휴대용 컴퓨터를 내놓았다. 이 제품은 '넷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시장의 좋은 반응을 얻었고, 대다수의 컴퓨터 업체가 이 영역에 뛰어들었다.
비록 노트북과 구분되는 상품군을 형성하긴 했지만, 넷북은 혁신이 낳은 새로운 제품은 아니었다. 넷북은 사양과 크기를 낮춘 '저가 노트북'으로, 경제침체 속에서 값싼 컴퓨터를 찾는 소비자의 얇은 지갑을 열었을 뿐이다. 당연히 넷북은 노트북 시장을 잠식해 업체들의 수익률을 악화시켰을 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지 못했다.
전세계 업체들이 수익도 거의 나지 않는 넷북 시장에서 이전투구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애플 넷북설'이 흘러나왔다. 애플도 곧 넷북을 내놓을 예정이라는 이야기였다. 업계와 투자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말 한 마디로 상황을 깨끗이 정리했다. "애플에게 500불 이하의 컴퓨터를 만들 재주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쓰레기 컴퓨터가 아닌 바에야."
잡스가 틀렸던 걸까? 최근 나온 아이패드 가격은 499불부터 시작하니 말이다. 게다가 내가 써 본 아이패드는 결코 '쓰레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변함 없이 유효하다. 아이패드는 컴퓨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급한 사람들은 벌써 '피씨 이후의 시대'를 말하기도 하지만, 아이패드가 컴퓨터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다. 컴퓨터를 포기하고 아이패드를 선택할 사람들은 컴퓨터를 소비 목적으로 써 온 사람들에 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메일 확인이나 웹서핑용으로 넷북을 구매했던 사람들은 상당수 아이패드로 옮겨갈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컴퓨터를 갖춘 뒤 추가로 아이패드를 구입하는 형태를 취할 것이다.
▲ 아이패드는 기존의 미디어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 올 것이다. 사진은 만화용 앱으로, 손가락으로 만화를 한 컷씩 넘겨볼 수 있게 되어있다.
ⓒ DC Comics
아이패드는 하드웨어가 아니다
아이패드를 '태블릿 피씨'로 보는 시각은 한국 업체들과 언론을 지배해 온 '하드웨어 마인드'를 드러낸다. 아무리 천하의 애플이라지만, 컴퓨터를 널판지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법석을 떨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럴 이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패드의 핵심은 겉모양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다. 이 소프트웨어는 너무 단순하고 쉽고 직관적이어서 사용자가 소프트웨어를 조작하고 있다는 점조차 잊게 한다. 마치 텔레비전 스위치를 켜거나 책장에서 책을 꺼내는 데 아무런 의식적 판단이 필요 없듯 말이다. 그로 인해 사용자는 소프트웨어로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웹사이트, 사진, 영화, 책, 게임 자체를 두 손에 쥐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 와이어드 > 지의 딜런 트웨니는 지난 4월 1일자 기사 '우리는 왜 아이패드에 열광하는가'에서 아이패드의 특징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 그에 따르면, 아이패드의 특성은 "사라지는(disappear)" 데 있다. 컴퓨터의 경우, 내용물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적 장치가 두드러지지만, 아이패드의 경우는 이런 인터페이스가(UI)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이패드에서 웹브라우저를 열면 웹사이트 전체가 화면을 채운다. 컴퓨터와 달리 웹사이를 둘러싼 각종 틀, 메뉴, 버튼 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에는 도구가 내용(content)을 지배했으나, 이제 내용이 도구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아이패드에는 위 아래도, 오른쪽 왼쪽도 없다. 사용자가 어떤 방향으로 장치를 잡든 사용자의 시선에 모든 것을 맞추어 준다. 도구가 내용을 위한 수단임을 생각하면, 이보다 이상적인 소비장치는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이패드와 '경쟁'하려면 이에 맞설만한 소프트웨어와 앱(응용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유리판 달린 알루미늄통에 윈도스를 넣고 나서 '애플, 떨고 있니'나 '애플, 게 섯거라'고 호기롭게 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종합미디어 회사'가 된 애플
아이패드가 공개 됐을 때, 열광하는 사람 못지 않게 실망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유중 하나는 마우스나 프린터 등의 장치를 연결할 '유에스비(USB) 포트'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패드를 컴퓨터의 연장선에서 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불평이지만, 소비도구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핵심을 비껴간 평가일수밖에 없다.
문서작업이나 이미지 편집 등 생산작업 위한 사람에게 아이패드는 적합한 장치가 아니다. 비록 '가상 키보드'가 달려 있지만, 효율성 측면에서 기존의 키보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손가락에 닿은 키의 색이 변하거나 오류를 자동으로 바로잡아 주는 장치가 있긴하지만, 아이패드에서 타이핑은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다. 앞으로 대폭 개선된다고 해도 화면상의 키보드가 물리적 키보드를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가상키보드는 이메일이나 블로그, 트위터 등을 업데이트하는 간단한 용도로는 큰 문제 없이 쓸 수 있다. 비록 심각한 생산도구는 아닐망정, 사용자를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시킨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간편하고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는 수동적인 소비에 머물렀던 미디어를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 준다.
예컨대 아이패드용 앱 '믹서(Mixr)'를 이용하면 음악의 속도, 박자 등을 마음대로 바꾸고 다양한 효과음을 넣을 수 있다. 아이패드는 기존 컴퓨터의 소비기능을 극대화했을 뿐 아니라, 과거에는 어렵거나 불가능했던 창조적 소비까지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미디어 경험을 제공하고, 이것이 애플이 관리하는 앱을 통해 전달된다는 점에서 애플은 단순한 기기 제조업체가 아닌 종합미디어 회사인 셈이다.
▲ 아이패드는 전자책으로 쓸 수 있지만, 디스플레이 방식, 무게, 전지 수명, 데이터 서비스, 구입 가능한 전자책의 수에서 아마존의 킨들과는 차이가 있다.
ⓒ 강인규
아이패드 대 킨들
아이패드가 획기적인 제품임에는 틀림 없지만, 아쉬운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무게가 그렇다. 물론 주재료가 알루미늄과 유리라는 점, 그리고 그만한 성능을 내기 위한 부품(특히 10시간 이상 작동하는 고성능 전지)을 고려하면 결코 과하다고 할 수 없는 무게다.
싱가포르의 퓨전 거라지(Fusion Garage)사에서 경쟁품(정확히는 '경쟁 희망품')으로 출시된 '주주(JooJoo) 태블릿'의 무게가 아이패드보다 60%나 더 나가는 것만 봐도 아이패드가 얼마나 가볍게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이패드의 무게(680그램)는 모바일 기기로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특히 쉬운 인터페이스의 가장 큰 수혜자인 어린이와 노인들은 이 무게를 더 크게 느낄 것이다.
두번째는 '전자책'으로서의 한계다. 아이패드의 '아이북(iBook)'은 다양한 색상을 구현할 수 있고, 손가락을 이용해 책장을 실제 책처럼 넘길 수 있다. 그러나 빛을 직접 눈에 투사하는 백라이트 화면의 한계를 고스란히 갖는다. 대표적인 단점으로, 해가 밝은 장소에서 잘 보이지 않고, 장시간 주시하면 눈이 피로하고, 전력 소모가 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아이패드는 아마존 킨들(Kindle)에게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자책으로서 킨들은 아이패드보다 가볍고, 저렴하고, 눈에 편하고, 전지 소모량이 적어 훨씬 오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추가비용 없이 무료 데이터 서비스를 쓸 수 있는 것도 킨들의 장점이다. 아마존이 제공하는 방대한 전자책 서비스의 혜택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전자 잉크(E Ink)'와 일반 칼라 액정모니터의 장점을 결합한 '픽셀 키(Pixel Qi)' 기술이 곧 상용화될 예정이다. 킨들이 이 기술을 채용한다면 보다 효과적으로 전자책 시장을 지켜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애플도 놀고만 있지는 않겠지만.
▲ 아이패드의 가상 키보드는 물리적 키보드에 비해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 성능이 대폭 개선된다고 해도 가상 키보드가 기존의 키보드를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 강인규
인터페이스 혁명
컴퓨터의 역사에서 변함없이 지켜져 온 금기가 있다. 흑백 브라운관 모니터가 달린 초기 컴퓨터에서 오늘날의 고해상도 액정 모니터가 달린 노트북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요구되어 온 철칙이다. 그것은 '모니터를 만지지 말라'는 것이다. 화면에 손을 대어 얻는 것은 닦기 어려운 지문과 컴퓨터 주인의 분노 뿐이었다.
모니터 화면을 건드리는 행위는 컴퓨터를 처음 본 '초짜'나 친구의 새 컴퓨터를 질투하는 악당이나 하는 짓이었다. 컴퓨터를 '제대로' 쓰는 방법은 키보드 아니면 마우스 뿐이었다. 키보드보다는 마우스가 훨씬 직관적인 입력장치지만,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화면은 수직인 반면, 마우스는 수평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오래 써 온 사람들은 이 공간적 괴리에 큰 고통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기술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정이 다르다. 예컨대 컴퓨터 회사의 소비자 상담실에는 별의별 전화가 다 걸려 온다. < 뉴욕타임스 > 의 기술 칼럼니스트 데이빗 포그가 인용한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한 노인이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했다. 마우스를 움직일 때마다 화면에서 '끼익끼익'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마우스를 빨리 움직이면 소리도 빨라진다고 했다. 마우스를 어디에 놓고 쓰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모니터 화면 위'이라고 답한다. 모니터에 그렇게 하라는 지시문이 뜬다는 것이다. 지시문 내용을 읽어달라고 했더니 노인이 당당히 말한다.
"이곳을 클릭하시오"
화면을 맨손으로 조작하게 만든 아이패드의 첨단 인터페이스는 인터페이스 자체를 없앤 효과를 낸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아래로 내리면 밑으로 내려가고, 옆으로 넘기면 다음 장로 넘어간다. 이게 바탕화면이든, 웹사이트든, 지도든, 사진이든, 책이든, 음악이든 상관 없다. 아이패드는 '모니터를 만지지 말라'는 금기에 정면으로 맞섬으로써 새로운 길을 연 셈이다.
▲ 애플 매장에서 아이패드로 게임을 즐기는 아이들. 아이패드는 사용방법을 별도로 익히지 않아도 될만큼 쉽고 간단하다. 아이패드는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풍요로운 멀티미디어 경험을 선사한다.
ⓒ 강인규
우린 '이런 거' 왜 못 만드냐고 물으신다면?
"우린 이런 거 왜 못 만드냐?" 최근 국가 지도자와 기업 경영자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이다. 닌텐도 게임기와 애플 아이폰의 성공 이후 흔히 듣게 된 말이다. 불행히도, 아이패드의 등장으로 이 말을 더 지겹게 듣게 될 것 같다.
그 답을 알고 싶은가? 다음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결론을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소위 '지도자'란 사람들이 그런 어리석은 질문이나 던지고 있기 때문에 못 만드는 것이다. (참고로,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최고 경영자다.) 물론 '아랫'사람들에게 태연히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위계적, 중앙집중적 사회/조직구조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자.
이달초 애플의 '아이패드'가 공개됐다. 전 세계적 화제가 된 제품이니만큼 한국 언론으로부터도 큰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수 언론은 과거 아이폰 보도에서 보여주었던 몰이해를 되풀이했을 뿐이다. (기억하는가? '국내 스마트폰 시장 토종이 이끈다', '옴니아 2 아이폰 잡으러 왔다', '아이폰 게 섯거라', '아이폰 무턱대고 구입했다간 낭패')
아이패드가 출시된 후의 언론보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패드 뜯어보니 삼성, LG부품', '아이패드 뜨면 삼성, LG 웃는다?', '삼성전자도 '아이패드'같은 태블릿 PC 만든다', '애플 떨고 있니... 타블릿PC시장 '후끈'', '아이패드, 넷북 경쟁... '승자'는 누구'….
먼저 분명히 하고 싶은 게 있다. 아이패드는 '태블릿 피씨'가 아니다. 태블릿 피씨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과거에 휴렛패커드(HP)와 후지쯔 등이 내놓았다 실패한 윈도스 기반의 터치스크린 컴퓨터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휴렛패커드와 삼성 등이 내놓았다 실패할 윈도스 기반의 터치스크린 컴퓨터다. 앞으로 나올 태블릿 피씨가 옛날 것과 다른 점은 최신판 윈도스 운영체제를 담고 있다는 점과, 물리적 키보드가 빠져있다는 (따라서 입력이 매우 불편할 것이라는) 점뿐이다.
▲ 아이패드는 넷북과 달리 기존의 컴퓨터 판매를 침식하기보다는 '소비미디어'라는 새로운 시장을 형성할 것이다. 아이패드의 핵심은 소프트웨어로, 직관적인 인터페이스와 다양한 앱들은 다양한 미디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 준다.
ⓒ 강인규
아이패드는 소비용 기기다
아이패드는 '태블릿 피씨'가 아닐 뿐 아니라, '컴퓨터'도 아니다. 아이패드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던 영역을 개척한 새로운 도구다. 이름을 붙이자면, '종합미디어 소비기기(multimedia consumption device)' 쯤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소비'다.
컴퓨터는 '생산'작업용으로는 적합할지 모르나, '소비'에 적합한 매체는 결코 아니었다. 물론 컴퓨터는 다양한 일을 해낸다. 여기에는 문서작성, 웹사이트 제작, 이미지와 비디오 편집 등의 생산작업에서, 웹 서핑, 사진/비디오 시청, 게임 등의 소비영역까지 두루 포함된다. 문제는 컴퓨터가 이 모든 일들을 제대로 해 냈느냐다.
소비용 매체로서 컴퓨터는 배우기 어렵고, 가지고 다니기 무겁고, 조작하기 불편한 장치였다. 아이패드는 컴퓨터의 소비영역을 떼어내어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따라서 "삼성, '아이패드'같은 태블릿PC 만든다"거나 "애플 떨고 있니... 태블릿PC 시장 '후끈'" 같은 기사는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삼성이 '태블릿PC'를 만들지는 모르지만 (물론 만들 것이다), "아이패드 같은" 것일 수는 없으며, "태블릿PC 시장이 '후끈'"거릴지 모르지만, 이는 아이패드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아이패드는 미디어 소비전용 매체일뿐 아니라, 모바일 기기라는 점에서도 컴퓨터와는 차이가 있다.
▲ 매체와 도구가 내용을 지배하던 컴퓨터와 달리, 아이패드는 내용을 우위에 둔다. 컴퓨터 기반의 웹브라우저와 달리, 아이패드는 웹사이트를 틀에 가두지 않는다. 복잡한 메뉴나 스크롤바 등도 보이지 않는다.
ⓒ 강인규
컴퓨터 포기하고 아이패드 살 사람 얼마나 될까
대만의 컴퓨터업체 아수스는 2007년 말에 '이피시(Eee PC)'라는 저가의 휴대용 컴퓨터를 내놓았다. 이 제품은 '넷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시장의 좋은 반응을 얻었고, 대다수의 컴퓨터 업체가 이 영역에 뛰어들었다.
비록 노트북과 구분되는 상품군을 형성하긴 했지만, 넷북은 혁신이 낳은 새로운 제품은 아니었다. 넷북은 사양과 크기를 낮춘 '저가 노트북'으로, 경제침체 속에서 값싼 컴퓨터를 찾는 소비자의 얇은 지갑을 열었을 뿐이다. 당연히 넷북은 노트북 시장을 잠식해 업체들의 수익률을 악화시켰을 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지 못했다.
전세계 업체들이 수익도 거의 나지 않는 넷북 시장에서 이전투구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애플 넷북설'이 흘러나왔다. 애플도 곧 넷북을 내놓을 예정이라는 이야기였다. 업계와 투자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말 한 마디로 상황을 깨끗이 정리했다. "애플에게 500불 이하의 컴퓨터를 만들 재주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쓰레기 컴퓨터가 아닌 바에야."
잡스가 틀렸던 걸까? 최근 나온 아이패드 가격은 499불부터 시작하니 말이다. 게다가 내가 써 본 아이패드는 결코 '쓰레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변함 없이 유효하다. 아이패드는 컴퓨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급한 사람들은 벌써 '피씨 이후의 시대'를 말하기도 하지만, 아이패드가 컴퓨터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다. 컴퓨터를 포기하고 아이패드를 선택할 사람들은 컴퓨터를 소비 목적으로 써 온 사람들에 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메일 확인이나 웹서핑용으로 넷북을 구매했던 사람들은 상당수 아이패드로 옮겨갈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컴퓨터를 갖춘 뒤 추가로 아이패드를 구입하는 형태를 취할 것이다.
▲ 아이패드는 기존의 미디어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 올 것이다. 사진은 만화용 앱으로, 손가락으로 만화를 한 컷씩 넘겨볼 수 있게 되어있다.
ⓒ DC Comics
아이패드는 하드웨어가 아니다
아이패드를 '태블릿 피씨'로 보는 시각은 한국 업체들과 언론을 지배해 온 '하드웨어 마인드'를 드러낸다. 아무리 천하의 애플이라지만, 컴퓨터를 널판지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법석을 떨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럴 이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패드의 핵심은 겉모양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다. 이 소프트웨어는 너무 단순하고 쉽고 직관적이어서 사용자가 소프트웨어를 조작하고 있다는 점조차 잊게 한다. 마치 텔레비전 스위치를 켜거나 책장에서 책을 꺼내는 데 아무런 의식적 판단이 필요 없듯 말이다. 그로 인해 사용자는 소프트웨어로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웹사이트, 사진, 영화, 책, 게임 자체를 두 손에 쥐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 와이어드 > 지의 딜런 트웨니는 지난 4월 1일자 기사 '우리는 왜 아이패드에 열광하는가'에서 아이패드의 특징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 그에 따르면, 아이패드의 특성은 "사라지는(disappear)" 데 있다. 컴퓨터의 경우, 내용물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적 장치가 두드러지지만, 아이패드의 경우는 이런 인터페이스가(UI)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이패드에서 웹브라우저를 열면 웹사이트 전체가 화면을 채운다. 컴퓨터와 달리 웹사이를 둘러싼 각종 틀, 메뉴, 버튼 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에는 도구가 내용(content)을 지배했으나, 이제 내용이 도구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아이패드에는 위 아래도, 오른쪽 왼쪽도 없다. 사용자가 어떤 방향으로 장치를 잡든 사용자의 시선에 모든 것을 맞추어 준다. 도구가 내용을 위한 수단임을 생각하면, 이보다 이상적인 소비장치는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이패드와 '경쟁'하려면 이에 맞설만한 소프트웨어와 앱(응용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유리판 달린 알루미늄통에 윈도스를 넣고 나서 '애플, 떨고 있니'나 '애플, 게 섯거라'고 호기롭게 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종합미디어 회사'가 된 애플
아이패드가 공개 됐을 때, 열광하는 사람 못지 않게 실망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유중 하나는 마우스나 프린터 등의 장치를 연결할 '유에스비(USB) 포트'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패드를 컴퓨터의 연장선에서 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불평이지만, 소비도구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핵심을 비껴간 평가일수밖에 없다.
문서작업이나 이미지 편집 등 생산작업 위한 사람에게 아이패드는 적합한 장치가 아니다. 비록 '가상 키보드'가 달려 있지만, 효율성 측면에서 기존의 키보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손가락에 닿은 키의 색이 변하거나 오류를 자동으로 바로잡아 주는 장치가 있긴하지만, 아이패드에서 타이핑은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다. 앞으로 대폭 개선된다고 해도 화면상의 키보드가 물리적 키보드를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가상키보드는 이메일이나 블로그, 트위터 등을 업데이트하는 간단한 용도로는 큰 문제 없이 쓸 수 있다. 비록 심각한 생산도구는 아닐망정, 사용자를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시킨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간편하고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는 수동적인 소비에 머물렀던 미디어를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 준다.
예컨대 아이패드용 앱 '믹서(Mixr)'를 이용하면 음악의 속도, 박자 등을 마음대로 바꾸고 다양한 효과음을 넣을 수 있다. 아이패드는 기존 컴퓨터의 소비기능을 극대화했을 뿐 아니라, 과거에는 어렵거나 불가능했던 창조적 소비까지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미디어 경험을 제공하고, 이것이 애플이 관리하는 앱을 통해 전달된다는 점에서 애플은 단순한 기기 제조업체가 아닌 종합미디어 회사인 셈이다.
▲ 아이패드는 전자책으로 쓸 수 있지만, 디스플레이 방식, 무게, 전지 수명, 데이터 서비스, 구입 가능한 전자책의 수에서 아마존의 킨들과는 차이가 있다.
ⓒ 강인규
아이패드 대 킨들
아이패드가 획기적인 제품임에는 틀림 없지만, 아쉬운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무게가 그렇다. 물론 주재료가 알루미늄과 유리라는 점, 그리고 그만한 성능을 내기 위한 부품(특히 10시간 이상 작동하는 고성능 전지)을 고려하면 결코 과하다고 할 수 없는 무게다.
싱가포르의 퓨전 거라지(Fusion Garage)사에서 경쟁품(정확히는 '경쟁 희망품')으로 출시된 '주주(JooJoo) 태블릿'의 무게가 아이패드보다 60%나 더 나가는 것만 봐도 아이패드가 얼마나 가볍게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이패드의 무게(680그램)는 모바일 기기로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특히 쉬운 인터페이스의 가장 큰 수혜자인 어린이와 노인들은 이 무게를 더 크게 느낄 것이다.
두번째는 '전자책'으로서의 한계다. 아이패드의 '아이북(iBook)'은 다양한 색상을 구현할 수 있고, 손가락을 이용해 책장을 실제 책처럼 넘길 수 있다. 그러나 빛을 직접 눈에 투사하는 백라이트 화면의 한계를 고스란히 갖는다. 대표적인 단점으로, 해가 밝은 장소에서 잘 보이지 않고, 장시간 주시하면 눈이 피로하고, 전력 소모가 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아이패드는 아마존 킨들(Kindle)에게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자책으로서 킨들은 아이패드보다 가볍고, 저렴하고, 눈에 편하고, 전지 소모량이 적어 훨씬 오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추가비용 없이 무료 데이터 서비스를 쓸 수 있는 것도 킨들의 장점이다. 아마존이 제공하는 방대한 전자책 서비스의 혜택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전자 잉크(E Ink)'와 일반 칼라 액정모니터의 장점을 결합한 '픽셀 키(Pixel Qi)' 기술이 곧 상용화될 예정이다. 킨들이 이 기술을 채용한다면 보다 효과적으로 전자책 시장을 지켜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애플도 놀고만 있지는 않겠지만.
▲ 아이패드의 가상 키보드는 물리적 키보드에 비해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 성능이 대폭 개선된다고 해도 가상 키보드가 기존의 키보드를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 강인규
인터페이스 혁명
컴퓨터의 역사에서 변함없이 지켜져 온 금기가 있다. 흑백 브라운관 모니터가 달린 초기 컴퓨터에서 오늘날의 고해상도 액정 모니터가 달린 노트북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요구되어 온 철칙이다. 그것은 '모니터를 만지지 말라'는 것이다. 화면에 손을 대어 얻는 것은 닦기 어려운 지문과 컴퓨터 주인의 분노 뿐이었다.
모니터 화면을 건드리는 행위는 컴퓨터를 처음 본 '초짜'나 친구의 새 컴퓨터를 질투하는 악당이나 하는 짓이었다. 컴퓨터를 '제대로' 쓰는 방법은 키보드 아니면 마우스 뿐이었다. 키보드보다는 마우스가 훨씬 직관적인 입력장치지만,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화면은 수직인 반면, 마우스는 수평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오래 써 온 사람들은 이 공간적 괴리에 큰 고통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기술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정이 다르다. 예컨대 컴퓨터 회사의 소비자 상담실에는 별의별 전화가 다 걸려 온다. < 뉴욕타임스 > 의 기술 칼럼니스트 데이빗 포그가 인용한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한 노인이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했다. 마우스를 움직일 때마다 화면에서 '끼익끼익'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마우스를 빨리 움직이면 소리도 빨라진다고 했다. 마우스를 어디에 놓고 쓰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모니터 화면 위'이라고 답한다. 모니터에 그렇게 하라는 지시문이 뜬다는 것이다. 지시문 내용을 읽어달라고 했더니 노인이 당당히 말한다.
"이곳을 클릭하시오"
화면을 맨손으로 조작하게 만든 아이패드의 첨단 인터페이스는 인터페이스 자체를 없앤 효과를 낸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아래로 내리면 밑으로 내려가고, 옆으로 넘기면 다음 장로 넘어간다. 이게 바탕화면이든, 웹사이트든, 지도든, 사진이든, 책이든, 음악이든 상관 없다. 아이패드는 '모니터를 만지지 말라'는 금기에 정면으로 맞섬으로써 새로운 길을 연 셈이다.
▲ 애플 매장에서 아이패드로 게임을 즐기는 아이들. 아이패드는 사용방법을 별도로 익히지 않아도 될만큼 쉽고 간단하다. 아이패드는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풍요로운 멀티미디어 경험을 선사한다.
ⓒ 강인규
우린 '이런 거' 왜 못 만드냐고 물으신다면?
"우린 이런 거 왜 못 만드냐?" 최근 국가 지도자와 기업 경영자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이다. 닌텐도 게임기와 애플 아이폰의 성공 이후 흔히 듣게 된 말이다. 불행히도, 아이패드의 등장으로 이 말을 더 지겹게 듣게 될 것 같다.
그 답을 알고 싶은가? 다음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결론을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소위 '지도자'란 사람들이 그런 어리석은 질문이나 던지고 있기 때문에 못 만드는 것이다. (참고로,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최고 경영자다.) 물론 '아랫'사람들에게 태연히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위계적, 중앙집중적 사회/조직구조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자.
2010년 4월 17일 토요일
2010년 4월 13일 화요일
“거대한 적 ‘대학·국가·자본’에 작은 돌을 던진 것”
고려대 자퇴생 김예슬씨 인터뷰
경향신문 | 김지환 기자 | 입력 2010.04.14 03:22
"안녕하세요." 지난 12일 오후 7시 경향신문사를 찾은 김예슬씨(24·여)는 밝게 웃었다. 대학 교정에 대자보를 붙이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한 달째. 세상으로 다시 나온 그의 손엔 「김예슬 선언」이라는 125쪽 분량의 작은 책자가 들려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대학을 거부한다는 게 단순히 치기어린 행동은 아니었다"며 "대학생활 내내 스스로에게 던졌던 물음 중 일부가 대자보의 내용이고 더 많은 고민들을 책으로 담아봤다"고 말했다. "사실 답보다는 물음이 많은 책"을 썼다는 그와의 인터뷰는 경향신문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ERISS) 사무실에서 2시간 넘게 진행됐다. 그의 이야기는 차분했지만 때로 단호했고, 함께 고통 받는 이들을 말할 때는 따뜻함도 느껴졌다. 다음은 일문일답.
고려대 경영학과를 자퇴한 김예슬씨가 지난 1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앞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지난달 10일 대자보를 붙이고 한 달 사이 비판이든 지지든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어떻게 지냈나.
"생각지도 못하게 격렬한 반응이 있었던 것 같다. 나로선 한 달 동안 (스스로) 차분해지는 시간을 보냈다. 김예슬이라는 개인보다는 메시지에 주목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처음엔 루머나 개인에 대한 관심이 제기됐지만 많은 분들이 갈수록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주셨다. 생각의 힘도 부족하고 살아낸 것도 부족한 터라 비판해주시는 분들이나 속울음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많은 분들이 쏟아낸 이야기를 통해 어떤 것을 느꼈나.
"3월 첫 수업시간에 대자보 전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선생님과 중학생, 거대한 시스템에서 빠져나오고 싶다고 토로하는 직장인들, 대학을 그만둘 용기는 없지만 마음만으로라도 대학 보이콧을 하겠다는 대학생이 있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접하며 서로의 생각이 연결되는 시간이었다. 이것이 정말 우리 사회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라는 걸 느꼈다. 교육과 대학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고통이 돼 버렸다."
-조용히 그만둘 수도 있었는데 대자보를 붙이고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이유는.
"너무나 약해서였다. 다시 비겁해질까봐, 다시 받아달라고 학교 문을 들어설까봐. 내 안의 비겁함과 싸우기 위해 그렇게 했다. 거대한 사회적 모순은 은폐되고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인 양 떠넘겨지는 세상이다. 그래서 무력한 개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고통이 깊어가고 있으니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했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대학생들이 대기업 하청업체가 된 대학에 절망하면서도 트랙에서 계속 경주를 이어간다. 실존적인 결단을 내리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용기라기보다는 끝이 안 보였다.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좋은 결혼을 하면, 뭐 하면, 뭐 하면…. 언제까지 트랙에서 경주마로 달려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앞으로 달려가야 할 길은 보이는데 내 영혼은 등을 돌려 불화하기 시작했다. 아파야 나으니까. 나부터 끝도 없는 트랙에서 멈춰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지? 왜 살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런 큰 물음을 할 수 있도록 특권처럼 주어진 게 대학 시절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불가능해진 시대다. 대학(大學) 없는 대학이 인생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지 않은가."
-대학생활의 고민을 압축해 본다면. 대학이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고려대에서 보낸 생활은 스펙에 매달리자니 젊음이 아깝고, 다른 걸 하자니 뒤처질까 두려웠던 시간이었다. 크게는 세 번의 사건이 있었다. 2005년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을 짓는 데 400억원을 기부한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가 수여되는 것을 막으려던 학생들이 출교당한 사건, 2006년 이스라엘과 미국이 석유자원 확보를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불의한 전쟁에 침묵하는 '글로벌 코리아' '글로벌 고대'에서 지내고 있는 나를 되돌아본 사건, 2008년 경영대 '이명박 라운지'에 앉아 신문에서 '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다'라는 말을 읽었던 사건이다. 이건 비단 고려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학이 이런 가치관을 부추기고 기업의 탐욕에 활짝 열려도 좋은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대학 내에서 대학을 바꿔보는 운동을 해볼 수도 있지 않으냐는 얘기도 나왔다. 이른바 '극단적인 선택'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대학 내에서 대학을 바꾸려는 움직임도 중요하고 그런 분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대학은 공고해진 하나의 거대한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됐다. 기업에 인재를 조달하고 채용 일제고사를 기업 대신 실시해 등급을 매기고 있다. 대학의 존재 자체가 변화된 상황에서 안에서 바꾸는 것 이외에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성적경쟁의 의자에 앉아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야 하는 지금의 삶이 되레 더 극단적인 것 아닌가."
-대학거부 선언 후에 많은 '각주'들이 달렸다. 88만원 세대론에 대한 논의도 다시 불이 붙은 것 같다.
"우리 세대의 현실 문제를 88만원이라는 숫자로 풀어낸 부분은 인정한다. 하지만 88만원 세대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숫자만으로 담을 수 없는 진실이 축소되고 단순화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대학 거부선언 이후 88만원 세대의 저항이 시작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88만원을 188만원으로 올려달라는 것이 아니다. 등록금을 인하하고 비정규직 대신 정규직 일자리를 늘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청년실업의 문제를 넘어 국가가 모든 배움을 독점한 의무교육 제도, 자격증 유일잣대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 진보는 몸으로 살아내고 일상과 긴밀히 연결된 진보는 아닌 것 같다. 더 나아가 대학·국가·시장의 3각동맹이 공고히 하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 도시·기계 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의무교육이 아닌 대안적인 배움의 장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안 대학의 구체적인 상은 어떤 것인가.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이 있었다. 인간 자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한 나라 교육의 목표일 수 있는지 궁금하다. 모든 사람들이 인적자원화의 과정을 겪어 대학과 기업에 차근차근 보내지는 것이 의무교육의 실체다. 의무교육 문제는 말 그대로 배움의 권한을 국가가 독점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과정 속에서 배우고 겪는데 학교에서 커리큘럼을 잘 이수해야만 다음으로 갈 수 있는 자격증을 받게 된다. 또 의무교육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한다고 하지만 실은 처음부터 패배자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대안 대학은 구체적인 상을 이거다라고 제시하긴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지옥으로 가는 길을 알면 천국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나. 문예창작과를 가지 않고도 시를 쓸 수 있고, 미대를 안 가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의 편리를 위해 개성이 무시되는 걸 인정해선 안 된다."
-지인들과 부모님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특히 부모님의 반대가 컸을 것 같다.
"물론 반대를 많이 하셨다. 사실 부모님은 내가 배신했다고 느끼실 거다.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은 진정한 나 자신의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시대의 부모님들께 말씀을 드리면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모의 기대, 미련 이런 것들이 실상 어떤 것인가를 돌이켜보셨으면 좋겠다. 촛불집회 때 만난 중·고등학생들이 명박산성보다 넘기 힘든 게 부모산성이라고 하더라. 그 자체가 미래인 아이들이 상처받더라도 스스로 독립성의 날개를 키울 수 있게 사랑의 이름으로 길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대학·시장·국가의 3각 동맹에서 예슬씨 몫의 돌멩이가 빠졌지만 탑을 새로 세우려면 개인의 탈주만으론 불가능할 것 같다.
"방법론적인 이야기보다 각자가 품은 씨앗에서 어떤 꽃이 피어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학습된 두려움이나 난 무력한 개인이라는 두려움 앞에 지레 포기하지 않고 서로 격려하고 북돋우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미 균열은 시작됐다고 했지만 일상의 속도로 시스템은 계속 굴러가고 내 선언은 잊혀질 거다. 막막한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큰 존재다'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큰 존재들이 자기 안에 있는 물음들로 시작하고 옳은 일을 옳은 방법으로 밀어가는 힘을 믿으면서 갈 뿐이다."
-세상에 하고 싶은 또 다른 말이 있다면.
"사실 이 말로 인터뷰를 시작해야 됐는지도 모르겠다. 대학문을 넘지 않아서 수많은 차별을 감내하고 사는 농촌, 노동현장의 수많은 분들에게 나의 선언이 또다른 상처가 되었다면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다. 그런 곳에서 고되게 일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힘들다고 주저앉거나 절망할 수 없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그런 분들도 기업이나 시장에서 제품처럼 쓰고 버려진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박지연씨처럼. 비단 대학생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학 나오지 못한 분들의 고통은 더 크다. 대졸자가 주류인 사회라 더 조명되지 않을 뿐이다. 그분들을 내 삶의 거울로 비추면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20대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 정해진 몇 개의 직업이 꿈이 되어버린 것들에 대해 분노하면서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상상력을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010년 4월 8일 목요일
금융전쟁-신장섭
http://cafe.daum.net/liveinbook/Rbp/4825
금융 전쟁 한국경제의 기회와 위험
저자
신장섭 지음
출판사
청림출판 펴냄 | 2009.11.30 발간
카테고리
미분류
책소개
세계적인 경제학자 신장섭 교수의 한국경제 처방전 한국은 이번 세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10여 년 전....
국내 굴지의 경제연구소, 한국은행, 정부, 그리고 IMF에서 내년 한국경제성장율을 예상보다 높이 책정했다는 보도가 슬슬 흘러나오고 있다. 이제 불황의 바닥을 쳤다. 유동성확장에 대한 준비로서 이제는 출구전략 검토를 운운하던 우리 경제에 지난주 엄습한 두발이發 쇼크는 또다시 국내 금융시장을 아노미상태로 몰아넣어 버렸고 일반 개미투자자들은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뱉어내야 했다. 미국발 세계금융위기라는 거대한 쓰나미를 힘들게 넘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또 다시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물론 그 여타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정부와 연구기관의 전망치가 나오지만 IMF위기때나 이번 세계금융위기때도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들어야만 했던 우리에게 어디가 그 끝인지에 대해서 정말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IMF권고와 워싱턴 컨센서스가 주창한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 세상 어느 국가보다 충실하게 모범을 보인 대한민국으로서는 이번 세계금융위기에서 또다시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도대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금융시스템을 가져와 10년가까이 학습하고 외환보유고 역시 세계6위를 기록할 만큼 풍부했다고 자부했던 우리에겐 더할 나위없는 낭패감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IMF위기는 우리를 비롯한 몇몇 국가의 국소적인 원인으로 그리고 당시 IMF를 비롯한 서구선진국들의 표현처럼 낙후되고 경직된 금융시스템과 제조업을 비롯한 산업전반에 대한 과도한 투자로 인하여 우리가 자처한 결과라고 한다면 이후 IMF의 처방전과 선진산업국의 선진기법 금융시스템과 금융시장을 한치의 속임 없이 활짝 열어 재쳐 자유화를 실천했는데도 이번 금융위기에서 영국과 브라질처럼 몇 안되는 이중고(경제침체+외환위기)를 겪고 있으니 더욱더 환장할 노릇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선진금융시스템을 받아 들인 우리에게 문제가 있던지 아니면 선진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금융전쟁 한국경제의 기회와 위험>은 <한국경제 패러다임을 바꿔라>로 IMF위기에 대한 남다른 이론을 주장해서 주목을 받았던 싱가폴국립대 신장섭교수의 또다른 역작이다. 저자가 지난번 저서에서 IMF위기의 원인과 그 대처방안에 대한 논증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금융주권을 포기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게 다가오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우리의 환기를 일깨우고 있다. 저자는 그동안 정사(정설)로 여겨져 온 5가지 명제에 대해서 조목조목 그 반증을 하면서 결국 워싱턴 컨센서스에 의거한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허상에 대해서 강도높은 비판과 그 대응방안에 대해서 논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시스템이라는 도그마가 제시한 펀더멘틀의 강화 그리고 자유로운 금융거래를 통한 펀더멘틀의 강화만이 제2의 IMF를 겪지 않는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한 우리는 그동안 금융자유화를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충실하게 이행해왔다. IMF의 권고대로 금융기관의 BIS강화, 국영기업의 민영화, 자유환율변동제 도입등을 통해서 우리는 슬기롭게 IMF위기를 조속한 시일내에 벋어 나고 서서히 정상적인 궤도에 진입했다. 또한 국제적인 위상에서도 G7에는 미치지 못하나 G20이라는 중심국의 위치로까지 올라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체질적 개선으로 우리는 선진국 반열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다시금 보여주었던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조차 그 규제의 범위에 유통성을 가지는 BIS기준을 오히려 12%대로 상향함으로써 국내경제를 더 혼란으로 빠트리고 세계6위라는 외환보유고를 가지고서도 환율방어를 하지 못하여 환치기보험 형식으로 가입한 키코(KIKO)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가져오면서 우리는 그야말로 이번 금융위기 피해자중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을 이렇게 당하다 보면 이제는 그런 금융시스템자체에 대한 재 검토가 있어야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책입안자들이나 일부 관련 전문가들은 워싱턴 컨세서스에 의한 글로벌 스탠다드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사실 이번 금융위기에서 그다지 피해를 적게 본 국가들(중국,인도,싱가폴등)의 면모를 보면 물론 강력한 내수시장의 바탕이 있었던 점도 있지만 나름대로의 금융정책에 있어서 자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싱가폴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바스킷환율제도와 금융의 규제를 통해서 외환보유고와 적절한 환율유지로 이번 금융위기를 최소화 하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이러한 조절시스템을 포기함으로써 그 어떠한 조치를 할 수 없었고 급기야 스왑이라는 극단적인 조치와 미국의 IB은행(투자은행)들의 국유화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진정국면을 맞이할만큼 우리 독자적인 조치의 약발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만큼 우리는 우리 경제에 대한 칼자루를 쥐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금융위기는 우리를 비롯한 세계에 많은 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동안 신앙처럼 믿었던 글로벌 스탠다드는 없었다는 점 아니 한마디로 말해 글로벌 스탠다드는 선진국만의 제도였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를 IMF극복사례로 글로벌 스탠다를 강조했던 점 자체가 모순이었다는 것을 다시한번 각인시켜 주는 것이다. IMF구제금융을 받은 나라치고 향후 경제발전에 성공한 사례가 대한민국이외는 없다는 점이 바로 IMF가 제시한 글로벌 스탠다드가 문제가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IMF위기를 맞이했고 그리고 친철한 IMF씨의 올바른 가르침에 따라 위기를 탈출했다고 믿는 것이 정설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는 100%맞는 말이 아니다. 단기외환부채의 급증과 일부 해외 투기세력의 외환유출로 인해 IMF위기를 맞이했다고 하면 너무나 큰 음모론에 동조하는 것일까? IMF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그동안 과잉투자했다는 기업들의 기반이 있었기에 실물경제의 회복속도가 탄력을 받았다고 하면 이것 역시 음모론으로 몰아붙일 수 있을까? 물론 IMF위기는 이러한 음모론과 우리의 경제정책 실패에서 온 요인이었다. 하지만 그네들이 강조한 글로벌 스탠다드를 수용한 지금의 금융위기는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저 운이 없다고만 해야 하겠는가?
저자는 이러한 논거들에 의거해서 향후 우리 금융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제도주의 학파의 입장에서 그 해결책을 각 나라의 역사와 제도를 중시하고 이를 중심으로 경제전반에 걸친 현상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한다. 이는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개념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성에 기인한다는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금융주권에 관해서는 시장에 맡겨두는 것보다 정부가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례로 현재 아시아에서 자유변동환율제를 도입한 나라는 일본과 필리핀 그리고 대한민국 이렇게 3나라 밖에 없다. 일본이야 선진국이다는 논리 그리고 필리핀이야 미국의 제2중대라는 개념 그러면 남는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물론 그동안 시행해 왔던 제도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선진산업국들의 눈치보 봐야겠지만 미래를 봐서라도 금융주권의 회복은 필요한 것이다. 글러벌 스탠다드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확인했듯이 선진산업국의 입맛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국유화도 하고 달러도 맘껏 찍어내고 이런것이 바로 글러벌 스탠다드의 실체인 것이다. 다만 그동안 우리는 글로벌 스탠다드의 이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면은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차려진 밥상에서 한줌의 힘들임도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설겆이는 우리가 해왔던 것이고.
이제 두번의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터득한 진리는 다름아닌 우리나라 제도와 환경에 맞는 금융정책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결국 총성없는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실탄을 축적해야 하는 것이고 이 실탄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탄을 지키기 위해선 우리만의 통제가 가능한 시스템이 이었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번 금융위기같은 파도는 언제든지 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파도를 시의 적절하게 이용하여 타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번처럼 또 한번 그 파도에 휘말리게 되면 정말 회생불가능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갈수록 파생금융상품과 각종 펀드주의 그리고 금융에 대한 공격들은 거세질 것이다. 이러한 때 국부를 지킬수 있는 칼자루를 우리가 쥘 것인지 아니면 아예 남에게 맡겨야 할 것인지 이제 그 해답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앞으로 이런 데자뷰가 오지 않는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에게 맞는 제도와 정책을 캐취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서 장못담그랴는 말이 있다. 결국 장맛은 구더기의 숫자를 최소한으로 줄이것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생각하면 우리 금융정책에 산재하는 구더기를 줄여나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금융 전쟁 한국경제의 기회와 위험
저자
신장섭 지음
출판사
청림출판 펴냄 | 2009.11.30 발간
카테고리
미분류
책소개
세계적인 경제학자 신장섭 교수의 한국경제 처방전 한국은 이번 세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10여 년 전....
국내 굴지의 경제연구소, 한국은행, 정부, 그리고 IMF에서 내년 한국경제성장율을 예상보다 높이 책정했다는 보도가 슬슬 흘러나오고 있다. 이제 불황의 바닥을 쳤다. 유동성확장에 대한 준비로서 이제는 출구전략 검토를 운운하던 우리 경제에 지난주 엄습한 두발이發 쇼크는 또다시 국내 금융시장을 아노미상태로 몰아넣어 버렸고 일반 개미투자자들은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뱉어내야 했다. 미국발 세계금융위기라는 거대한 쓰나미를 힘들게 넘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또 다시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물론 그 여타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정부와 연구기관의 전망치가 나오지만 IMF위기때나 이번 세계금융위기때도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들어야만 했던 우리에게 어디가 그 끝인지에 대해서 정말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IMF권고와 워싱턴 컨센서스가 주창한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 세상 어느 국가보다 충실하게 모범을 보인 대한민국으로서는 이번 세계금융위기에서 또다시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도대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금융시스템을 가져와 10년가까이 학습하고 외환보유고 역시 세계6위를 기록할 만큼 풍부했다고 자부했던 우리에겐 더할 나위없는 낭패감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IMF위기는 우리를 비롯한 몇몇 국가의 국소적인 원인으로 그리고 당시 IMF를 비롯한 서구선진국들의 표현처럼 낙후되고 경직된 금융시스템과 제조업을 비롯한 산업전반에 대한 과도한 투자로 인하여 우리가 자처한 결과라고 한다면 이후 IMF의 처방전과 선진산업국의 선진기법 금융시스템과 금융시장을 한치의 속임 없이 활짝 열어 재쳐 자유화를 실천했는데도 이번 금융위기에서 영국과 브라질처럼 몇 안되는 이중고(경제침체+외환위기)를 겪고 있으니 더욱더 환장할 노릇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선진금융시스템을 받아 들인 우리에게 문제가 있던지 아니면 선진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금융전쟁 한국경제의 기회와 위험>은 <한국경제 패러다임을 바꿔라>로 IMF위기에 대한 남다른 이론을 주장해서 주목을 받았던 싱가폴국립대 신장섭교수의 또다른 역작이다. 저자가 지난번 저서에서 IMF위기의 원인과 그 대처방안에 대한 논증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금융주권을 포기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게 다가오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우리의 환기를 일깨우고 있다. 저자는 그동안 정사(정설)로 여겨져 온 5가지 명제에 대해서 조목조목 그 반증을 하면서 결국 워싱턴 컨센서스에 의거한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허상에 대해서 강도높은 비판과 그 대응방안에 대해서 논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시스템이라는 도그마가 제시한 펀더멘틀의 강화 그리고 자유로운 금융거래를 통한 펀더멘틀의 강화만이 제2의 IMF를 겪지 않는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한 우리는 그동안 금융자유화를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충실하게 이행해왔다. IMF의 권고대로 금융기관의 BIS강화, 국영기업의 민영화, 자유환율변동제 도입등을 통해서 우리는 슬기롭게 IMF위기를 조속한 시일내에 벋어 나고 서서히 정상적인 궤도에 진입했다. 또한 국제적인 위상에서도 G7에는 미치지 못하나 G20이라는 중심국의 위치로까지 올라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체질적 개선으로 우리는 선진국 반열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다시금 보여주었던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조차 그 규제의 범위에 유통성을 가지는 BIS기준을 오히려 12%대로 상향함으로써 국내경제를 더 혼란으로 빠트리고 세계6위라는 외환보유고를 가지고서도 환율방어를 하지 못하여 환치기보험 형식으로 가입한 키코(KIKO)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가져오면서 우리는 그야말로 이번 금융위기 피해자중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을 이렇게 당하다 보면 이제는 그런 금융시스템자체에 대한 재 검토가 있어야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책입안자들이나 일부 관련 전문가들은 워싱턴 컨세서스에 의한 글로벌 스탠다드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사실 이번 금융위기에서 그다지 피해를 적게 본 국가들(중국,인도,싱가폴등)의 면모를 보면 물론 강력한 내수시장의 바탕이 있었던 점도 있지만 나름대로의 금융정책에 있어서 자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싱가폴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바스킷환율제도와 금융의 규제를 통해서 외환보유고와 적절한 환율유지로 이번 금융위기를 최소화 하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이러한 조절시스템을 포기함으로써 그 어떠한 조치를 할 수 없었고 급기야 스왑이라는 극단적인 조치와 미국의 IB은행(투자은행)들의 국유화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진정국면을 맞이할만큼 우리 독자적인 조치의 약발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만큼 우리는 우리 경제에 대한 칼자루를 쥐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금융위기는 우리를 비롯한 세계에 많은 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동안 신앙처럼 믿었던 글로벌 스탠다드는 없었다는 점 아니 한마디로 말해 글로벌 스탠다드는 선진국만의 제도였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를 IMF극복사례로 글로벌 스탠다를 강조했던 점 자체가 모순이었다는 것을 다시한번 각인시켜 주는 것이다. IMF구제금융을 받은 나라치고 향후 경제발전에 성공한 사례가 대한민국이외는 없다는 점이 바로 IMF가 제시한 글로벌 스탠다드가 문제가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IMF위기를 맞이했고 그리고 친철한 IMF씨의 올바른 가르침에 따라 위기를 탈출했다고 믿는 것이 정설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는 100%맞는 말이 아니다. 단기외환부채의 급증과 일부 해외 투기세력의 외환유출로 인해 IMF위기를 맞이했다고 하면 너무나 큰 음모론에 동조하는 것일까? IMF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그동안 과잉투자했다는 기업들의 기반이 있었기에 실물경제의 회복속도가 탄력을 받았다고 하면 이것 역시 음모론으로 몰아붙일 수 있을까? 물론 IMF위기는 이러한 음모론과 우리의 경제정책 실패에서 온 요인이었다. 하지만 그네들이 강조한 글로벌 스탠다드를 수용한 지금의 금융위기는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저 운이 없다고만 해야 하겠는가?
저자는 이러한 논거들에 의거해서 향후 우리 금융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제도주의 학파의 입장에서 그 해결책을 각 나라의 역사와 제도를 중시하고 이를 중심으로 경제전반에 걸친 현상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한다. 이는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개념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성에 기인한다는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금융주권에 관해서는 시장에 맡겨두는 것보다 정부가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례로 현재 아시아에서 자유변동환율제를 도입한 나라는 일본과 필리핀 그리고 대한민국 이렇게 3나라 밖에 없다. 일본이야 선진국이다는 논리 그리고 필리핀이야 미국의 제2중대라는 개념 그러면 남는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물론 그동안 시행해 왔던 제도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선진산업국들의 눈치보 봐야겠지만 미래를 봐서라도 금융주권의 회복은 필요한 것이다. 글러벌 스탠다드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확인했듯이 선진산업국의 입맛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국유화도 하고 달러도 맘껏 찍어내고 이런것이 바로 글러벌 스탠다드의 실체인 것이다. 다만 그동안 우리는 글로벌 스탠다드의 이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면은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차려진 밥상에서 한줌의 힘들임도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설겆이는 우리가 해왔던 것이고.
이제 두번의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터득한 진리는 다름아닌 우리나라 제도와 환경에 맞는 금융정책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결국 총성없는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실탄을 축적해야 하는 것이고 이 실탄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탄을 지키기 위해선 우리만의 통제가 가능한 시스템이 이었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번 금융위기같은 파도는 언제든지 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파도를 시의 적절하게 이용하여 타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번처럼 또 한번 그 파도에 휘말리게 되면 정말 회생불가능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갈수록 파생금융상품과 각종 펀드주의 그리고 금융에 대한 공격들은 거세질 것이다. 이러한 때 국부를 지킬수 있는 칼자루를 우리가 쥘 것인지 아니면 아예 남에게 맡겨야 할 것인지 이제 그 해답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앞으로 이런 데자뷰가 오지 않는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에게 맞는 제도와 정책을 캐취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서 장못담그랴는 말이 있다. 결국 장맛은 구더기의 숫자를 최소한으로 줄이것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생각하면 우리 금융정책에 산재하는 구더기를 줄여나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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